꽃으로 피어나소서
강근숙
만물이 소생하는 봄, 땅속에 뿌리를 박은 초목에 싹이 트고 꽃들이 피어나는 계절이다. 청명과 한식이 든 4월 초는 농사 준비를 하는 시기로, 조상을 찾아 인사드리고 허물어진 묘역을 보수하기도 한다. 더욱이 올 4월은 부정이 없다는 윤달이라 조상 묘를 이장하거나 화장으로 모시는 집이 많아졌다.
우리 민족의 전통장례는 매장이다. 선산이 있는 집은 물론, 그러지 못한 집안에서도 공동묘지를 이용해 장사를 지냈다. 이십삼 년 전, 선친은 꽃상여 타고 가서 뒷동산에 묻혔다. 앞마당을 떠날 때 가족들은 울며불며 상여 뒤를 따라갔고, 하관하고 회 닺는 소리에 목 놓아 통곡했다.
현대에 와서는 장례에 대한 모든 절차가 바뀌었다. 마을에서 치러지던 큰일을 1990년 중반 이후, 장례식장에서 대신했으며, ‘묘지 강산을 금수강산으로’라는 구호를 내걸고 화장문화 운동이 퍼져나갔다. 환경보존과 국토의 효율적인 이용 측면에서 장묘문화의 개혁을 사회지도층이 앞장서서 이끌었으며, 지금은 선산이 있음에도 매장보다는 화장이 보편화 되었다.
윤달이 드는 해마다 우리 집안에서도 조상 묘를 없애고 화장하자는 얘기가 나왔었다. ‘편히 계신 조상 묘를 왜 건드리느냐’는 내 의견에 반대하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는데, 윤달이 든 올해는 조상 묘를 없애고 화장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4대 봉사하는 것을 당연지사로 알던 예전과는 달리, 요즘 젊은이들은 제삿날도 모르고 할아버지 할머니 이름조차 알지 못한다. 머리 허연 동생들은 예초기를 메고 땀을 뻘뻘 흘리며 벌초를 하는데, 조카들은 휴일임에도 불구하고 얼굴도 비치지 않는다. 그래서 늙어가는 동생들이 걱정 끝에 내린 결론이 조상님 유골을 자연으로 돌려보내 드리자는 것이었다.
조상님을 만난다는 기대로 일찌감치 친정 동네로 향했다. 눈을 감고도 찾아갈 수 있는 나를 키워준 향양리 작은 마을, 발전이라는 거센 물결은 산을 뭉개고 시멘트로 흙길을 발라 풀냄새 나는 유년의 발자국을 모두 지워버렸다. 밥이 유난히 맛있던 우리 논에는 거대한 공장이 들어서고, 정든 사람들이 떠난 마을은 예전의 고향이 아니었다.
마을로 들어서면서 어느 묘역으로 가야 할지 전화를 하니, 부모님 묘역이라 하였다. 벌써 증조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모시고 와서 할머니 유골을 수습하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갓 서른에 돌아가시고 청춘에 혼자되어 아들 셋을 기르신 밀양박씨 우리 할머니, 막내아들이 제사상에 놓인 곶감을 달라고 칭얼댔다는 얘기를 들으며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 마음이 아렸다. 할아버지 산소는 너무 멀리 있어 벌써 오래전에 화장해서 할머니 곁으로 모셨다.
할머니 묘 바로 옆에 아버지, 작은아버지와 작은 엄마 합장 묘가 나란히 있었다. 사촌 동생은 벌초하기 힘들어도 “우리 부모님은 그대로 모시겠다”하니 그 마음이 갸륵했다. 포크레인은 조심스레 굳게 닫힌 아버지 유택을 여는 중이다. 23년 전에 세상을 떠난 선친을 오늘 이렇게 만나리라 생각이나 했던가. 조금은 설레고 긴장되었다. 드디어 관이 보이고 유골이 그대로 드러났다. 뼈를 수습하던 분들이 색이 좋다고, 아주 편한 자리였다고 하였다. 아! 아버지, 깊은 잠을 깨워드려서 죄송합니다. 나는 아버지 손을 덥석 잡듯 유골을 어루만지며 인사를 드렸다. 하나밖에 없는 딸자식이 살갑지도 못했고, 어려운 환경에서 과음하는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미워만 한 것이 늘 죄스러웠다. 아버지는 술을 너무 좋아하셨기에 짓궂은 동네 분들은 관 옆에 진로 소주를 빙 둘러 넣어 드렸다. 그 좋아하는 술, 곁에 계신 작은 아버지와 같이 드셨으니 진즉 동이 났을 텐데, 이십 년이 넘은 지금 아직 두 병 반이나 남아 있었다. 아버지가 저승에서 남긴 귀한 소주는 내 몫이었다.
2년 전에 돌아가신 엄마는 아버지 곁으로 모셨다. 엄마는 평소 합장하지 말라고 손사래를 쳤지만, 늘그막엔 그래도 자식보다 남편이 낫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엄마는 자식들 불효를 털어놓았을까. 아니면 다들 효성스러웠다고 덮어주었을까. 손톱이 다 닳도록 기른 자식들이 늙도록 곁을 지켜 주었건만, 자식들은 그 가슴에 못을 박았다. 90이 넘도록 사셨고 딸내미 품에서 돌아가신 엄마를 보고 남들은 호상이라 말들 하지만, 못난 자식은 눈물만 쏟아진다. 언제 또다시 이렇게 엄마를 품에 안아 볼 것인가. 나는 유골함을 꼭 끌어안고 ‘엄마 사랑해요 고맙습니다’ 되뇌었다.
오늘 아버지 엄마, 할아버지 할머니, 증조할아버지 할머니 모두 한자리에 계신다. 3대 조상님 유골을 모셔놓고 진주 강씨 핏줄을 이어받은 자손들은 지극한 마음으로 제주를 따르고 절을 올렸다. 이분들 아니면 어찌 우리가 생명을 얻었으며 세상 구경할 수 있었겠는가. 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셔서 얼굴도 모르지만, 핏줄이 이어져 우리의 몸속에 흐르고 있으니 존재의 근원을 만나는 뜻깊은 자리임이 틀림없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생존법칙에 따라 언젠가 지수화풍으로 돌아간다. 오래전에 세상을 떠난 선조의 유골 또한 벗어버린 헌 옷에 불과하지만, 그분들에게서 뼈를 받고 살을 받은 자손들은 유골 앞에서 선조를 만난 듯 설레고 경건한 마음이 된다. 조상님을 자연으로 돌려보낼 시간이다. 우리는 한 분 한 분을 가슴에 안고 말동산으로 향했다. 집에서 가까운 야트막한 이 동산은 어른들이 생전에 새끼들 추울세라 배고플세라, 나무하고 버섯 따고 산나물을 뜯으러 오르내리던 길섶이다.
당숙들은 증조부와 증조모를 모시고 앞장을 섰다. 할머니는 넷째 동생이, 아버지는 막내가 모시고 그 뒤를 따른다. 나는 엄마를 안고 맨 뒤에서 천천히 따라갔다. 이 시간이 지나면 영영 이별이라 생각하니 또다시 가슴이 미어진다. 당숙과 동생들은 벚나무 아래서 유골을 훌훌 뿌린다. 때마침 바람이 불어 벚꽃을 타고 흩날리는 하얀 가루, 그 광경은 마치 슬픈 영화의 한 장면처럼 눈물겹도록 아름다웠다. 나는 차마 엄마를 뿌릴 수 없어 진달래꽃 나무 아래 가만히 내려놓았다. “엄마 세세생생 꽃으로 피어나세요. 날마다 그립고 보고파도 꾹 참다가 진달래꽃 흐드러진 날 찾아오겠습니다” 마지막 인사를 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