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비치호텔
서녘으로 설핏 기운 해가 동백섬 송림 너머에서 호텔을 향해 오렌지 빛 광채를 쏟아 붓고 있었다. 사람들은 주로 드넓은 백사장이 짙푸른 겨울바다를 물고 있는 뒤쪽에서 호텔을 바라보게 되어 정면의 이러한 모습엔 익숙지 않다. 경북 안동에서 딸들 내외와 부산투어에 나선 92세 원로를 모시고 찾은 해운대였다. 코로나로 관광객마저 뜸한 백사장에서 갈매기 떼를 만난 후 호텔 앞에 섰다. 호텔엔 한 발짝도 들여놓지 않았지만 우리가 단체로 투숙했다가 나오는 걸로 연출해 보자며 일행을 카메라 앞에 세웠다. 은은한 햇살이 조명을 보탠 건 덤이었다.
천혜의 비경을 간직한 해운대라 세계적인 관광지로 부상한 것은 너무나 당연했을 터이다. 근년 들어 해수욕장 모래사장도 대대적으로 넓혔고 동백섬 수목도 더욱 풍요로운 숲을 이루었다. 환경론자들은 다르겠지만 백사장과 동백섬 경계지점에 들어선 조선비치호텔도 이곳 풍경에 일조했음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해운대 백사장이 태고의 신비를 간직했던 1960년대 중반의 풍광은 퍽 단조로웠다. 당시 군복차림으로 해변에 쓸쓸하게 서서 포즈를 취한 흑백사진 속 바닷가는 여느 갯가나 다름없이 초라했기에 더욱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반세기 이상 부산에 살면서도 내가 조선비치호텔에 투숙한 경험은 없다. 가난한 월급쟁이로선 감히 넘볼 수 없는 고급호텔이었다. 1978년 준공하여 개장했을 땐 전국에서도 손꼽힐 정도였다. 그로부터 10년 세월이 지나 대기업 공장장을 지낸 지인이 불러주어 두 부부가 호텔 일식당을 들어선 게 손님으로선 처음이었다. 그는 여름휴가로 일주간 동해안을 다녀오자 오륙천만 원 수익이 올랐다며 싱글벙글했다. 당시 개최된 서울올림픽 효과였는지 그가 산 주식이 대박을 터뜨렸다고 했다. 그 후 지인들의 자녀결혼 때도 몇 차례 더 호텔을 들어선 적은 있었다.
그보다 앞서 맨 처음 호텔을 체험한 것은 호텔이 준공된 해인 1978년 연말이었다. 대통령이 가족들과 함께 신년휴가 3일을 이 호텔에서 보내게 되어 우리 직장엔 비상이 걸렸다. 그 사흘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대통령 숙소에 전기를 공급하는 일에 만전을 기하라는 엄명이 떨어졌다. 대통령 경호실이 요구하는 안정적인 전기공급은 대통령에게 테러를 가할 적색분자들이 나타난다면 전기부터 먼저 끊고 일을 벌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 전까진 해운대 극동호텔에서 해오던 VIP 행사를 새 호텔로 옮기면서 전력공급시설도 그 범위가 훨씬 넓어졌다.
행사 10년 전 1월엔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기습이 있었고 5년 전 광복절엔 문세광의 흉탄에 대통령은 부인을 잃었다. 그 여파로 호텔은 동백섬과 백사장 그리고 바다까지 이중으로 경계가 강화되었다. 전기공급 책임을 진 우리는 살을 에는 칼바람에 외곽보초에 나선 소방대원 경찰 군인들에 비해 변전실에 배치된 것만도 감지덕지했다. 청와대에선 경호요원들이 도착하기 전 검측반이 먼저 와서 이 잡듯이 호텔 안팎을 샅샅이 체크했다. 이 과정에서 검측반장이 보여준 낯 뜨거운 언행은 지금까지 우리 기억에 오롯이 남았기에 이런 글이라도 쓸 수 있게 되었다.
다국적기업이 세운 호텔임을 제대로 알지 못했던 검측반장은 복도 중앙 의자 위에 돌출되어 놓인 전화기를 보안에 위배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당장 치우라고 한국인 종업원에게 야단쳤고 사라진 비상전화기에 놀란 외국인 호텔 지배인은 노발대발했다. 코가 납작해진 검측반장이 정중하게 사과하고 전화기를 원상으로 복구하여 해프닝으로 끝날 수 있었다. 충청도 말씨의 검측반장은 좀 의외였다. 침대에 비스듬히 누운 채로 “당신네 오야붕은 왜 서울 간 거요? 이런 행사가 있는 걸 알면서도….” 난 그에게 어떻게 답해야 좋을지 몰라 난감했다.
어쩌면 목이 컬컬한 검측반장은 술 생각이 난 것도 같았다. 우리 직장 부책임자가 연락을 받고 급히 달려와 “클럽에 가서 시원한 맥주라도 한 잔 하시죠.”하자 그는 “그럴까?” 하면서 벌떡 일어섰다. 검측반장은 진토닉을 서너 잔이나 연거푸 마시고는 기분이 좋아져 룸으로 돌아왔을 때 우리 직장 상사가 서울에서 그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아니에요. 왜 이러십니까? 잘하고 있다니까… 내가 언제 성님한테 거짓말합디까? 내 참.” 같은 청와대 출신인 직장 상사가 그에게 무슨 말을 한지 몰라도 그쪽에서 근무할 땐 우리 상사가 그의 위였던 모양이다.
호텔 맨 꼭대기 9층 바다 쪽으로 붙은 94평이 대통령 숙소였다. 십여 명 정도가 둘러앉아 회의를 할 수 있는 제법 큰 방도 깔끔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중앙에 소파가 있는 공간이 가족들 휴게실로 보였다. 당시 영부인 역할을 했던 큰딸의 방이 조금 더 컸고 차녀와 아들 방이 붙어 있었다. 방마다 새 호텔을 개장하면서 들여왔을 LG 흑백TV가 반짝반짝 윤기를 발했다. 호텔에서 가깝게 바라다 보이는 부산기계공고 J교장 일화도 재밌다. 중학 졸업성적 기준으로 우수한 학생들만 선발하여 당시 국제기능올림픽대회를 연달아 제패하던 학교였다.
J교장은 대통령이 특별히 기능인력 양성에 관심을 쏟는 걸 알고 있었다. 밤에 학교 조명을 밝게 하여 실습하는 학생들을 대통령이 찾아오도록 만들었으니 그는 그쪽으로 머리가 비상한 사람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그는 부산시교육감에 오를 수 있었다. 대통령은 그때 딱 한 번 조선비치호텔에서 정초 휴가를 보낸 후 다음해 10월에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만약 그 시절 대통령이 더 오래 생존해 있었다면 교육부장관도 맡지 않았겠느냐?"고 물었더니 J교장은 손사래를 쳤다. 그가 경남 양산에 세운 부산외국어고등학교 교장실에서였다.
조선비치호텔이 웨스틴조선호텔로 바뀐 지는 오래다. 서울 소공동에 있는 조선호텔이 인수했기 때문이다.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소공동엔 조선호텔과 반도호텔만 있었다. 반도호텔에 사무실을 가진 외국인 상사에 외사촌 형이 근무하고 있었다. 뒤에 지방경찰청장까지 오른 한 살 위의 형은 달동네의 나와 같은 방에서 자취를 했고 그가 퇴근하면서 노란 봉투에 담아 들고 오는 바나나를 자주 먹을 수 있었다. 반도호텔은 그 뒤 롯데가 매입해 중식당 ‘아서원’ 터까지 합쳐 롯데호텔을 지어 오늘에 이른다. 격동의 세월 속엔 이처럼 호텔도 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