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01. 24.
몇 년 전 인간문화재 이형만 나전장(螺鈿匠)을 만나러 원주를 찾았다. 우리가 자개라고 부르던 것이 나전이다. 공방 문을 열자 역한 냄새가 훅 끼쳤다. 옻칠 탓이었다. 이 장인은 원주산 옻칠이 항균·방습·방충이 뛰어나다고 했다. 손이 거칠었다. 작업대엔 얇게 자른 전복껍데기 같은 자개와 실톱이 뒹굴었다. 옻나무에서 채취한 생칠과 흙가루를 섞어 자개 붙이는 채비를 하느라 마루도 어수선했다. 자개를 손질하고 옻칠과 건조를 거쳐 마지막 광내는 작업까지 마흔다섯 단계를 거친다고 했다.
▶ 2012년 서울 핵안보정상회의에 온 오바마 대통령은 인간문화재가 만든 나전칠기 갤럭시탭을 선물로 받았다. 최신 태블릿PC 뒷면에 남해안 전복껍데기를 사용한 나전으로 가로 2.9㎝ 세로 2.1㎝ 모란꽃을 새기고 옻칠로 마감했다. 후진타오 중국 주석과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을 비롯한 쉰일곱 각국 대표에게도 같은 선물을 돌렸다. "전통문화에 첨단 IT 산업을 접목했다"고 했다.
▶ 고려 500년을 대표하는 미술품으로 청자와 불화, 그리고 나전칠기가 꼽힌다. 불경을 담은 함과 작은 책상, 필통 같은 문방구에 자개를 입혔다. 고려 나전칠기는 세계를 통틀어 남은 작품이 열일곱 점밖에 안 된다고 알려질 만큼 희귀하다. 고려 때 사신으로 온 송나라 서긍이 '기법이 매우 정교해 귀하게 여길 만하다'고 귀국 보고서에 썼다. 그만큼 예술적 가치가 돋보였다.
▶ 나전칠기가 어느 위세 높은 국회의원 탓에 화제다. 목포 문화재 거리에 부동산을 사들여 욕을 먹자 나전칠기 박물관을 옮기려고 했다고 해명했다. 그런데 국립중앙박물관에 현대 나전칠기 작품을 사도록 압력을 넣었다는 의혹도 나왔다. 새로 된 문화재청장이 기자 시절 나전칠기 기사를 많이 쓴 것이 이 의원 눈에 든 것 아니냐는 말도 많다.
▶ 옛 어머니들은 안방에 자개농을 들이는 게 '로망'이었다. 1980년대 후반 들어 값비싼 옻칠 대신 헐한 화학 도료로 조잡한 자개농을 만드는 사람이 늘면서 내리막을 탔다. 근년엔 국빈 선물용으로 꼽힐 만큼 귀한 공예품 대접을 되찾고 있다. 마침 국립중앙박물관에선 고려 나전칠기 4점이 포함된 '대(大)고려' 전시가 열리고 있다. 런던 영국박물관과 뉴욕 메트로폴리탄박물관에서 온 명품이다. 박물관 후원회가 몇 년 전 사들인 국내 유일의 손상 없는 고려 나전칠기도 나왔다. 조개껍데기로 국화와 모란 넝쿨을 정교하게 새긴 장인의 솜씨가 놀랍다. 나전칠기엔 죄가 없다.
김기철 논설위원 kichul@chosun.com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