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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함과 진실함으로 (요한일서 3.13-19)
착시
저는 지난 주일 설교의 말미에 한 영화를 소개해드렸습니다. 홀로 된 아버지가 흩어져 살아가는 네 자녀들을 만나고 돌아오는 과정을 묘사한 영화였는데, 저는 그 영화 제목을 에브리바디 파인스 (Everybody fines) 라고 소개했습니다.
그런데 설교 후에 어떤 분이 그 영화에 대하여 언급한 글을 보게 되었는데, 그 분은 그 영화제목을 에브리바디즈 파인 (Everybody’s fine) 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저는 그 영화 파일을 다시 한번 재생해서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영화의 첫 화면에 분명히 ‘Everybody’s fine’ 이라고 적혀 있는 것이 아닙니까? 저는 그 영화를 세 번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또 그 영화의 제목을 떠올릴 때마다 ‘fine 이라는 단어가 형용사일텐데, 왜 형용사에 s가 붙어있을까?’ 생각하면서도 그 영화의 제목을 ‘Everybody fines’ 라고 기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일종의 착시현상이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이런 착시에서 비롯된 착각이 우리 삶의 영역에서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알 수 있습니다
함께 읽은 본문 14절에서는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신학자 유진 피터슨은 이렇게 옮겨 줍니다. ‘형제자매를 사랑하면 그것으로 우리가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의 말에 의하면, 어떤 사람이 구원받은 사람 즉 사망의 운명에서 벗어나 생명의 미래를 향해 가는 사람임을 짐작할 수 있는 경우는, 그 사람이 자신의 형제자매들과 이웃을 사랑하고자 하는 사람일 때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아닌 타인을 사랑하고자 하는 그 모습이 바로 구원받은 사람의 증거라는 이야기입니다.
사도 요한의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자신은 사망에서 벗어나 생명으로 들어간 사람이라고 자부하였지만, 사도 요한은 그런 이들의 자기 확신을 신뢰하지 않고, ‘그들이 사랑하고자 하는가?’ 살펴보면서, 사랑이 고백의 진실 여부를 짐작할 수 있는 기준이 된다고 본 것입니다. 즉 믿음이 사랑으로 증명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으로 증명되지 않는 믿음은 참 믿음이 아니며, 그 믿음이 참 믿음이 아니기에, 그런 믿음은 구원으로 가는 길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사도 요한의 선언인 것입니다.
이와 똑같은 이야기를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6절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 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구원을 얻는 길은 할례라는 종교적인 의식에 참여하는 것도 아니고, 율법을 준수하여 고상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들이는 길인데, 그 믿음이 사랑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졌는데, 그렇게 시작된 구원의 길이 사랑의 수고를 통하여 이루어져 가는 것이라고도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구원의 완성을 향해 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믿음과 사랑은 동전의 양면처럼 떼려야 뗄 수 없는 하나의 짝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 사랑하고자 하는 수고를 멈춘 이가 있다면, 그런 분은 더 이상 생명을 향해 걸어가는 사람이라고 자신 있게 말하기 어렵습니다.
혹시 미움이나 원망에 빠진 자신을 방치하고 있다면, 적어도 지금 그는 구원의 길에서 비껴난 상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힘이 들어도 사랑하기 위한 수고를 계속해야 합니다. 그래야 생명을 향한 행진에서 이탈하지 않습니다.
상처 준 사람을 용서하기 위해 기도하고 있고, 사랑하지 못하는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형제자매들에게 또 이웃에게 더 가까이 다가서려고 애쓰고 있다면, 그런 분은 지금 생명의 길로 걸어가고 있는 분이 맞습니다.
그러나 내 안에 그런 사랑의 애씀이 없다면 그건 가볍게 생각할 일이 아닙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가장 명백한 증거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반드시 사랑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사랑의 수고를 통하여,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구원을 얻을 만한 믿음으로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순종으로의 초대’ 라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 드리자면, 우리가 순종해야 할 단 하나의 계명이 바로 주님께서 명하신 ‘사랑하라’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사랑하고자 하는 사람들, 혹은 사랑을 지향하는 사람들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주님처럼
이어지는 16절은 그 사랑의 내용을 설명합니다. 어떤 사랑을 해야 하는지를 설명하는데, 그 사랑의 본보기는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라고 말씀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십자가, 그 십자가가 바로 우리가 알아야 하고 따라야 하는 사랑의 본보기라는 말씀입니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마음에 드는 이성에게 사랑의 고백을 하는 장면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영어로 하면 ‘I love you.’입니다. 이런 달콤한 사랑의 고백을 다르게 표현하기도 합니다. ‘나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영어로는 ‘I need you.’입니다.
실제로 ‘I need you.’ 는 ‘I love you.’ 대신에 자주 쓰여지기도 합니다. 물론 이 말 자체도 분위기에 따라 상당히 감미롭게 들리는 말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필요합니다.’ 라는 말은 좀 다른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당신이 필요합니다.’ 라는 말은 ‘내가 외롭지 않기 위해서, 내가 꿈꾸는 삶을 위해서, 내 마음과 몸의 욕망을 해소하기 위해서, 나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이런 말이라면 지나친 표현일까요?
‘당신의 외모가 나를 들뜨게 하고, 당신의 성품이 나를 편안하게 하고, 당신의 능력이 나를 안심시킵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라는 뜻을 우리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말로 포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것은 지나친 의심이 아닙니다. 사실이 그러합니다. 지난 주일 설교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는 모두 마음의 결핍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마음의 결핍을 채워줄 사람을 찾는데, 그 결핍을 채워줄 만한 사람을 만났을 때, 우리는 사랑을 발견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분명히 이해해야 합니다.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는 ‘당신의 사랑을 원합니다.’ 는 말의 다른 표현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I love you.’ 는 사실 ‘I need you.’ 였던 것입니다.
어떤 분은 ‘I need you.’ 를 노골적으로 이렇게 표현하기도 합니다. ‘니 덕 좀 보자.’ 사랑의 갈등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남자가 여자에게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는데, 여자는 그 말이 사실은 ‘당신이 필요합니다.’ 즉 ‘니 덕 좀 보자.’는 말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 남자와 결혼하면 자신이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자기가 덕을 좀 볼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결혼해보니, 이 남자는 사랑을 주기보다 사랑받기를 원합니다. 여자의 외로움을 달래주고 든든한 기둥이 되어줄 줄 알았던 남자가 오히려 여자에게 자신의 마음을 달래주고 필요를 채워달라고 요청하는 것이 아닙니까? 여자도 할 말은 없습니다. 자신이 그러했듯이 남자도 같은 기대를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서로가 다 착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I need you.’ 를 ‘I love you.’ 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서로 할 말은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부터 사랑의 투쟁이 시작됩니다. 한쪽에서는 ‘왜 당신은 나를 존중하지 않느냐?’ 고 소리치고 또 한쪽에서는 ‘그러는 당신은 왜 나를 인정하지 않느냐?’ 고 되받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나의 결핍을 채워줄 것이라는 기대를 사랑이라고 착각했던 것입니다. 이 사람이라면 나를 만족시켜 줄 것이라는 기대에서 비롯된 좋은 감정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사랑은 다릅니까?
군 복무를 마치고 다시 신학교로 복학하던 1991년 봄에 저는 학교로 가는 차안에서 한 여학생을 보았습니다. 키도 크고, 눈매도 서글서글하고, 어깨까지 내려오는 치렁치렁한 머릿결도 매력적이었지만 무엇보다도 마음이 참 순수할 것 같은 좋은 인상이었습니다. 첫 눈에도 목사 사모로서 손색이 없을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자꾸 눈길이 가고 신경이 쓰였습니다. 제가 키가 작은 편인데 비해 그 여학생은 키가 크다는 것도 마음에 들었고, 제가 내성적이고 소심한 반면 서글서글하고 밝아 보이는 인상도 좋았습니다. 그리고 얼굴이 예쁘다는 사실도 매우 마음에 들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4년 후 드디어 저는 그 여학생과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의 제 아내입니다. 그러나 결혼생활이 시작되고 나서 저는 아내가 제 기대를 채워주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명백한 사실과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그 사실을 인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최근에 와서야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제가 아내에게 수없이 들려주었던 ‘I love you.’ 는 사실 ‘I need you.’ 더 정직하게 말하면 ‘니 덕 좀 보자’ 그런 마음이었던 것을 말입니다.
‘내가 당신을 행복하게 해드리겠습니다. 당신이 내 덕 좀 보세요.’ 그런 마음이 아니었음을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깨닫고 인정하기까지 거의 20년의 세월이 걸린 것 같습니다.
성경은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진짜 사랑은 주님처럼 그리하신 것처럼 자기를 주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당신이 내 덕을 보세요.’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내주어서 상대를 평안하게 하고, 그 결핍을 채워주려는 마음입니다.
우리는 사랑받고 싶은 기대를 사랑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중심적인 욕구에서 비롯된 소망, 나의 결핍을 채워줄 것이라는 기대를 사랑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사랑은 늘 평행선을 달리는 기차의 선로처럼 서로를 향해 요구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말과 혀로만
이런 기대하는 사랑의 특징은 말과 혀로만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사랑받기를 원합니다. 상대에게 무얼 주고나면 반드시 무언가 돌아오기를 기대합니다. 주된 관심은 언제나 ‘그가 나에게 무엇을 줄 것인가?’ 입니다.
이런 사랑은 주고 끝나는 사랑이 아닙니다. 항상 마지막은 주는 일이 아니라 받는 일이 되기를 원합니다. 사랑을 주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을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늘 마음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을 주는 일은 일시적일 뿐 아니라 곧 다시 돌아오는 사랑을 기대하곤 합니다. 그래서 그 사랑은 말과 혀로만 하는 사랑이 되고 맙니다.
나는 결핍된 영혼이기에 당신이 먼저 나를 채우라고 요구합니다. 상대방도 똑같은 결핍된 영혼이라는 사실을 끝내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그런 사랑은 영원히 상대방의 가슴에 가 닿지 못합니다. 세월은 덧없이 흐를 뿐입니다. 언제까지나 우리는 서로 결핍된 영혼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저 말과 혀로만 사랑을 덧칠할 뿐입니다. 세상은 사랑의 노래로 가득 차 있지만 말과 혀로만 사랑을 노래하고 있을 뿐입니다.
러시아 작가인 안톤 채호프의 소설 ‘귀여운 여인’의 주인공 올렌카는 뭇 남성들의 눈길을 끄는 사랑스러운 여인입니다. 그녀는 극장 지배인인 쿠킨과 결혼하여 남편의 사랑을 받으며 행복하게 살다가 어느 날 모스크바로 출장을 간 남편이 사망했다는 전보를 받게 됩니다. 장례를 치르면서 올렌카는 이렇게 울부짖습니다.
"여보! 나의 소중한 바니치카! 이게 어떻게 된 노릇이오! 불쌍한 당신의 올렌카를 두고, 이 가엾고 불행한 올렌카를 두고, 당신은 혼자 어디로 가버렸단 말예요?"
한동안 슬픔에 젖어 살던 올렌카는 석달 후 예배당을 다녀오다가 목재상 주인 푸스토발로프를 만나게 되고 며칠 후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리게 됩니다. 그러나 6년간의 행복한 결혼생활 끝에 푸스토발로프도 감기에 걸려 시름시름 앓다가 그만 세상을 떠나가게 됩니다.
남편의 장례식을 치르면서 그녀는 다시 이렇게 통곡합니다. "당신 없이 나 혼자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면 좋아요. 내가 가엾고 불쌍하지도 않으세요? 이웃 여러분들이 나를 보살펴 주어요. 나는 이제 사고무친의 고아가 돼버렸어요.”
두 번의 장례를 치르면서도 귀여운 여인, 올렌카의 관심은 늘 혼자 남겨진 자신의 신세입니다. 그리고 다시 또 자신을 사랑해줄 세 번째 남자, 군수의사 스미르닌을 만나게 됩니다. 그녀는 늘 사랑받기를 바라고 있을 뿐입니다.
나의 결핍을 채워줄 것이라는 기대를 사랑이라고 이해하는 한, 우리는 아무도 사랑할 수 없을 것입니다.
부부 사이든, 교우간의 관계이든, 이웃이든 그 누구도 사랑하기가 힘듭니다. 말과 혀로는 사랑을 말하는데, 마음은 늘 받을 사랑에 목이 마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나의 결핍을 채워주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기대를 사랑이라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입술은 주님 닮은 듯하나, 내 맘은 아직도 추하여 받을 사랑만 계수하고 있으니 예수를 나를 도와 주소서.’ 라는 찬양의 가사 그대로입니다.
행함과 진실함으로
주님은 당신이 사랑받으러 오신 분이 아니라 사랑하러 오셨다고 선언합니다. 마태복음 10장 28절입니다.
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 한 말씀이 주님의 삶을 설명하는 열쇠가 됩니다. 주님은 사랑 받기를 기대하지 아니하시고, 당신이 사랑을 주는 사람으로 사셨습니다.
기대하지 않아야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내 결핍을 채우려는 마음을 접어야 상대의 결핍이 보입니다. 그리고 나에게 그 결핍을 채워줄 힘이 있음도 발견하게 됩니다.
지난 주일 설교에서 우리는 인간에게는 사랑받고자 하는 깊은 동경이 있다는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소중히 여겨지기를 원하고, 이해받기를 원하고, 변함없는 사랑의 대상이 되고 싶은 동경과 그리움이 우리 안에는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기대가 충분히 채워지지 못한 결핍을 우리는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우리 안에는 사랑하고 싶은 동경 또한 존재합니다.
어려서 한번쯤 누구나 타인을 위해 희생하는 삶에 대한 꿈을 꿔보셨을 것입니다. 자기를 내어주는 희생의 삶을 살아갔던 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가슴이 뛰었던 경험이 있으셨을 것입니다. ‘마더 데레사’ 같은 분들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감동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우리 안에도 그런 동경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 마을을 지나다가 한 아주머니가 길가의 고양이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주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전에도 한번 그런 모습을 본적이 있었는데 아마 그 분은 자주 고양이들을 돌보고 계시는 것 같았습니다.
길가에 돌아다니는 고양이들이 그 분과 무슨 관계가 있어서 그렇게 먹을 것을 챙겨주시는 것일까요?
우리 안에는 다른 존재에게 나의 것을 나누어주고 싶은 동경이 숨어있습니다. 돌려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주고 또 주는 것으로 끝내고 싶은 동경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용서해’ 라는 이름의 플룻 연주자가 있습니다. 이 분은 파리에서 플룻을 전공하고 돌아와 서울 시립교향악단의 단원으로 공연활동을 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서른이 넘어갈 무렵부터 행복하지 않다는 생각에 시달리게 됩니다.
어느 날 말기 암 환자들이 생의 마지막 시간을 보내고 있는 호스피스 센터를 방문하고 그 자리에서 임종을 앞둔 암 환자 한 분을 위해 플룻을 연주하게 됩니다. 그날 연주 내내 그녀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강렬하고 특별한 느낌, 큰 무대에서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벅찬 감정이 가슴을 파고 드는 것을 느꼈다고 합니다.
그녀의 말로는 자신의 외로움을 녹이는 따뜻한 봄비가 내리는 듯 했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호스피스 센터에서 한 사람만을 위한 연주를 계속하던 그녀는 결국 교향악단을 그만두고 호스피스 봉사자의 삶을 시작하셨다고 합니다. 지금 그녀는 요리를 배워 말기 환자들을 위한 음식을 만드는 호스피스 요리사가 되어 살아가고 있다고 합니다.
박수 받고 사랑받는 삶에서 얻지 못했던 행복을 생의 불꽃이 꺼져가는 한 사람을 위한 연주에서 경험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복되다고 말씀하시는 것이겠지요.
우리들 가슴 안에 숨어있는 두 개의 동경, 사랑받고 싶은 동경과 사랑하고 싶은 동경 중 어느 쪽이 앞서야 할까요?
주님은 마태복음 7.12절에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가 남을 대접하라.’
사랑받고 싶은 동경보다 사랑하고 싶은 동경을 앞세우라는 말씀입니다. 먼저 주는 사랑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저는 마태복음 6장에서 세 번이나 반복되는 주님의 말씀이 매우 중요하게 여겨지는데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희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는 말씀입니다.
무엇이든 먼저 주는 사랑을 하고자 한다면, 그때 너의 가슴으로 하늘의 샘이 흘러들어갈 것이라는 약속으로 들립니다. 이렇듯 주님의 약속을 붙잡고 받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주려는 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사랑일 것입니다.
그러려면 ‘나는 사람에게서 받는 사랑으로 내 결핍을 채우려 하지 않고, 주님께 받는 사랑으로 채우려 합니다.’ 하는 마음이 필요할 것입니다.
말로 하는 사랑은 거창하지만 행함으로 하는 사랑은 작고 구체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작고 구체적으로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라는 것이 주님의 명령이 아니었습니까?
받으려고만 하면 영원히 채울 수 없지만 주려고 하면 금새 채워지는 사랑의 신비를 경험하는 갈빛동산의 모든 교우들이 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