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기뻐하라”(살전 5:16)
레3장 본교주석 “3장에 관한 추가적 설명
“실제로는 기쁨과 감사의 화목제가 더 이상 드려지지 않지만 그 정신은 계속되어야 한다. 소위 “선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자들도 마땅히 해야 할 만큼 그리고 그것이 그들의 특권인데도 하나님의 사랑과 평화를 기뻐하는 자들은 거의 없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행하신 것에 대한 감사의 결여에 있지만 항상 그렇지는 않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종교 생활에서 행복한 것이 그들의 특권임을 이해하지 못한다. 태양 빛보다는 십자가의 그늘 안에서 살고 있다. 그들은 행복해 하는 것은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라고 느끼며, 심지어 미소도 적합하지 않으며 솔직한 웃음이나 그밖의 다른 웃음도 신성을 더럽히는 것이라고 여긴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일찍이 웃거나 심지어 미소를 지었다는 기록이 없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것은 사실이지만, 그분이 머리를 빗었다거나 목욕을 했다는 기록도 없다. 그러한 사람들은 세상의 짐을 자신들의 어깨에 지려고 하며 휴양에 사용되는 시간은 모두 시간 낭비일 뿐만 아니라 불경한 것임이 틀림없다고 느낀다. 그들은 “선한” 그리스도인들이지만 행복한 자들은 아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시대에 살면서 그분을 따르는 자들 가운데 있었더라면 그들은 그분이 갈릴리의 결혼식에 참석하는 것에 대한 타당성을 의심하고 기껏해야 그분을 마지못해 따랐을 것이다. 그들은 그분을 매우 초조하게 기다렸을 것이다. 그분은 큰 일을 해야 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그분이 사교 모임에 시간을 낭비할 수 있었는가? 그분에게 일할 시간이 단 3년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을 그들이 알았더라면 더욱 혼란에 빠졌을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선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사교적 활동에는 무언가 잘못된 것이 있다고 느낄 것이다. 어떻게 그분이 죄인들과 먹고 마시는 데 시간을 소비할 수 있는가? 심지어 바리새인들도 요한의 제자들이 금식하고 기도하는 것을 지적하며, 연회에서 먹고 계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책망을 암시하면서 의아해 했다(눅 5:29~35).
이것은 영원의 문턱에서 살고 있는 우리의 시대를 충분히 고려하여 기록된 것이다. 만약 진지함과 침착함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의 삶을 특징지어야 한다면 지금이 바로 그때이다. 다가오는 위기를 바라보며 우리는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살아야 한다(벧후 3:11). 모든 경박함을 뒤로 하고 엄숙함이 모든 신자들을 사로잡아야 한다. 크고 중대한 사건들이 임박해 있다. 어리석은 것들과 무의미한 것들을 위한 시간이 없다. 왕중왕께서 문 앞에 당도했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들을 통해 우리가 왕의 자녀이며 우리의 죄가 용서되었으며 따라서 행복하고 기뻐해야 할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사업은 완성되어야 하며 우리도 거기에서 한 몫을 담당해야 한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모든 것이 자신들에게 달려 있는 것처럼 말한다. 그들은 이루어져야 할 필요에 대하여 기도로써 하나님께 독촉하면서도, 그들의 마음에 소중하게 보이는 몇몇 중요한 일들을 그분이 잊어버릴까봐 두려워한다. 그들은 항상 바르게 행하려고 노력하는 “선한” 영혼들이지만 그들의 짐을 주님께 맡기는 것을 배우지 못했다. 그들의 짐을 옮기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으며, 짐에 눌려 신음할지라도 결코 포기하려는 마음은 없다. 그들은 끊임없이 분투 노력하여 많은 선을 행한다. 그들은 가치 있는 일꾼들이며 주님은 그들을 매우 사랑하신다.
그러나 그들의 모든 사업과 노력에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다. 그들은 일을 시작하신 그분이 마치실 것이며 그분은 그 일에 그들만큼, 심지어 그들보다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시며 그분은 한순간에도 이룰 수 있지만 모든 일을 계속적으로 이루어 나가신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다. 그들은 신앙생활에서 기쁨을 거의 발견하지 못하고 수많은 걱정거리만 찾는다. 그들은 마르다처럼 수고하고 염려하지만 한 가지 필요한 일을 빠뜨렸다. 그들은 마리아와 같은 자들을 불만스럽게 바라보며 주님께 그들에 대해서 불평하고,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마리아의 몫을 담당하고 계시는지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만약 두 명의 마리아만 있고 마르다가 없다면 과연 음식이 준비될 수 있겠는가라고 그들은 묻는다. 그러한 그리스도인들은 일하고 있으며 그들의 직무에 신실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각자의 몫을 이행하고 있지 않으며 너무 많은 짐이 그들에게만 지워져 있다고 마음속으로 느낀다.
이와 동일한 교훈이 탕자의 이야기에서도 강조된다. 맏아들은 자신은 어떤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항상 열심히 일했으며 잔치와 환락에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다. 이제 동생이 방탕한 삶으로 유산의 몫을 소비한 뒤 집에 돌아왔을 때, 그는 화를 내며 돌아온 동생을 위한 잔치에 참여하려고 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나가서 그에게 간청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 대신, 그는 창기들과 함께 자신의 삶을 망가뜨린 탕자가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아버지가 잔치를 베풀고 살진 송아지를 잡았으면서도 순종하는 아들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안 해주었다고 말하면서 아버지를 힐난(詰難)했다(눅 15:30).
그리스도인들은 가장 엄숙한 사건들의 한가운데 있다할지라도 즐거워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십자가 앞에서도 유쾌하고 밝은 모습을 간직했다. 우리는 왜 행복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하나님은 구원받은 자들의 심령에 새로운 노래를 두었다. 그들은 지극히 높으신 자의 자녀들이다. 그들은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다. 그들은 그분의 사랑 안에서 행복하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 마땅히 해야 하며 권리가 부여된 만큼 마음속에 하나님의 평안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는 그리스도의 약속을 잊었다(요 14:27).
많은 사람들의 심령은 괴로워한다. 그들은 두려워한다. 그들은 걱정한다. 어떤 소중한 자가 양의 우리 밖에 있으며 그들은 그가 “들어오도록 그를 위해서 기도한다.” 밤낮으로 그들은 수고하며 기도한다. 그들은 그들의 노력으로 그의 구원을 가져오기 위해서라면 하나의 돌멩이도 남겨두지 않을 정도로 수고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노력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면, 그들은 그렇게 하려고 결심한다. 그리고 그 계획에서 하나님을 빠뜨리지 않는다. 그들은 그분께 기도한다. 그들은 그분께 탄원한다. 그들은 마치 하나님이 재촉을 필요로 하는 분처럼 기도한다. 그리고 마침내 소중한 자가 하나님께로 돌아온다. 그들은 얼마나 행복해 하는가! 이제 그들은 쉴 수 있다. 그들의 일이 이루어졌고, 과업이 달성되었다.
하나님은 한 영혼이 회심하는 데 그들만큼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그들이 생각해본 적이 있을까? 그들이 기도하고 일하기 오래 전에 이미 하나님은 소기의 목적을 이룰 수 있는 대리자들을 움직이셨다는 사실이 그들의 마음에 떠오른 적이 있을까? 하나님은 어떤 사람의 의지를 역행하면서 그를 구원하실 수는 없지만,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수많은 일들이 있고 그분은 그 모든 것을 행하고 계신다. 우리가 그분을 지도하려고 하는 대신에 우리가 도울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조용히 물으면서 그분과 협력한다면, 그분은 훨씬 더 많은 일을 행하실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업을 분간하고 그분과 협력하는 것이 더 나았을 때에도, 하나님의 사업을 떠맡은 다음에야 그분의 도움을 구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깨달음이 영혼에 이르러 오는 순간, 그것과 함께 평화도 온다. 그는 적게 일하거나 적게 기도하지만, 강조하는 부분이 달라질 것이다. 그는 믿음으로 기도하기 시작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이 일하고 계신다는 것을 진정으로 믿는다면, 그분이 사람들의 구원에 관심을 갖고 계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들은 전보다 더 많이 기도하겠지만, 우리는 그 책무를 하나님께 맡길 것이다. 기쁨과 즐거움으로 우리의 심령과 삶을 “향기로운 냄새”로 하나님께 드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