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자미 식혜가 익는 시간 (제1회 / 김외숙)
현관 벨소리가 울렸을 때 나는 급히 창문부터
열었다. 창을 열자 공원으로부터 기다렸다는 듯이 바람이 밀고 들어왔다.
바람이 휘저어도 유쾌하지 않은 냄새는 여전하다. 현관문 밖에는 수아가 서 있었다. 수아는 어쩌면 내가 끊은 담배를 다시 시작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눈에도
보이지 않는 틈사이로 아래층에서 올라오는 담배냄새 스트레스엔 맞담배가 약이라고 했더니 수아가 말했었다, ‘그러지
말아요, 언니. 힘들게 끊었는데.’ 라고. “좀 심하지,
이 냄새?” 현관 문 앞에 선 채 좀 큰 소리로 냄새부터
들먹였다. 수아가 몇 번 코를 킁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여행용
가방도 따라 집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잠시 가방에다 눈길을 주다가 이내 수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내 시선을 느낀 수아가 눈을 내리깔았다. “앉아라, 수아야.” 따라 온 가방에 대한 궁금증을 다스리며 나는
부엌으로 갔다. 가방을 현관 입구에다 세워둔 수아는 내가 책상 겸 식탁으로 쓰는 테이블에 가 의자를
뽑아내 앉았다. “작업 중이었어요, 언니?” 컴퓨터의 커서가 내가 쓰고 있던 작품 말미
즈음에서 여태 깜빡거리는 것을 보며 수아가 말했다. “응, 그냥...” 나는 수아를 돌아보지 않은 채 대답하고는 커피를
내리기 시작했다. ‘얼굴은 왜 저렇게 상한 거야?’ 그러나 끌고 온 가방에 대해, 상한 얼굴에 대해 아무 것도 묻지 않은 채 졸졸 빠지는 연갈색 커피를 바라보고 있었다. 앉아 있던 수아가 창가로 갔다. 수아의 눈길이 가 있는 창밖 공원엔
송아지만한 개를 앞세운 남녀가 걸어가고 있었다. ‘공원 때문에 언니는 이 집, 못 떠나실 거예요.’ 수아는 내 집에 올 때마다 마치 자신이 서
있어야 할 자리인 듯 저 창가에 서서 탁 트인 공원바라보기를 즐겨했다. 그 때 내가 이렇게 말했던가, ‘넌 더 좋아하잖아.’ 하고. 오랜만에, 그것도
가방까지 앞세우고 내 집을 찾았으니 할 말이 많아야 할 것 같은데 수아는 물끄러미 바깥을 내다볼 뿐 말이 없고 나도 ‘저 가방은 뭐며, 네 얼굴은 왜 그렇게 상했니?’ 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어차피 내가 묻지 않아도 조금 시간이 흐르면 수아는 스스로 속을 드러낼 것이고 그것은 수아가 내 집을 찾는
이유이기도 했다. 실은 수아가 통곡을 하며 내 집을 들어선대도 ‘수아야, 왜? 하고 나는 묻지 않는다. 말
대신 울음부터 앞세울 땐 분명 이유가 있기 때문일 것이고 나는 수아의 그런 점을 이미 알고 있으므로 스스로 마음의 문을 열기까지 늘 기다린다. ‘언니는 나 같지 않아서 좋아요.’ 기다리는 일 만큼은 저보다 내가 낫다고 생각하는지
언젠가 수아가 말했었다. 그러나 수아가 모르는 것이 있었다, 내가
참을성이 있어서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이란 것이 억지로 연다고 쉬이 열리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을 뿐이란 것을. 참지
못해, 기다리지 못해 범한 오류는 이 나이가 되면 이미 손으로 꼽을 수 없을 정도여서 그렇게 되풀이
하다 보니 알게 모르게 참을성이 있는 사람으로 보일 뿐이란 것을. 열어둔 창으로 들어오는 바람결에 커턴 자락이
일렁인다. 나는 머그 잔 두 개와 사각 유리그릇을 쟁반에 얹어 수아가 앉았던 책상 겸 식탁으로 들고
왔다. “김치 담았어요, 언니?” 창가에서 돌아와 수아가 말했다. 유리그릇 속의 내용물이 붉어서 김치로 아는 것 같았다. “알아 맞춰봐, 뭔지.” 김치를 못 알아볼 정도로 수아가 이 땅에 오래
살지는 않았음을 이미 알고 있음에도 내 속에서 사뭇 장난기가 발동했다. 여행 가방을 끌고 내 집으로
와야 했던 그 심정보다 통 속의 음식에다 수아의 관심을 붙잡아 두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김치 아닌
것이 이렇게 고추 가루와 버무려질 것이 무엇일까, 그것을 알아내면 이 집안에 찬 정체모를 냄새도 알게
될 것이란 묘한 표정으로 수아가 통을 들여다보며 고개를 갸웃댄다. ‘가꾸면 눈길이 더 갈 얼굴인데...’ 나는 수아의 어린아이 같은 표정을 보며 자신을
저리도 가꾸지 않는 수아의 심리를 먼저 생각했다. 늘 마음을 딴 곳에다 두고 있으니 가꾸지를 못하고, 마음 딴 곳에다 둔 저 모습을 대해야 하는 푸른 눈은 또 무슨 죄인가 싶다.
저도, 함께 하는 사람도 피차에 힘들다. “가자미 식혜 먹고 싶다고 했잖아.” 수아를 더 궁금하게 만들기 싫어서 예사롭게
말했다. “가자미 식혜예요, 이게?” 들고 있던 커피 잔을 소리가 나게 놓으며 수아가
목소리를 높였다. 먹고 싶다고 간단하게 만들어질 수 있는 음식이 결코 아닌 줄 수아가 더 잘 알았다, 이곳은 가자미도 좁쌀도 없는 캐나다 변방이므로. 마치 입덧을 하듯
어떤 음식이 어느 날 갑자기 먹고 싶어 정말 환장할 것 같아도 먹을 수 있는 방법이 없어 더 미치는 곳, 안
되는 것은 안 될 수밖에 없는 땅이 이곳이었다. “언니도 참,
뭔 말을 못하겠어.” 수아가 타박 아닌 타박을 하며 짐짓 눈을 흘겨서
‘나, 있는 거라곤 시간뿐인 사람이잖아.’ 하며 웃었다. 수아의 얼굴에도 이내 웃음이 번졌다. ‘저렇게 웃으니 얼마나 보기 좋아.’ “참가자미여야 하는데 노르웨이 산이라나? 찬밥 더운밥 가릴 게재가 아니어서 말이야.” 나는 수아의 얼굴에다 저 웃음기를 더 오래
붙잡아 두고 싶어 표정까지 약간 뒤틀었다. 수아는 고개를 들어 깊게 날 바라보았다. 참가자미는 아니어도 가자미와 좁쌀을 구하기 위해 내가 장거리를 다녀와야 했다는 사실을, 한동안 전화도 안 하고 칩거 아닌 칩거를 한 사이에 저를 위해 가자미 식혜을 담았다는 사실을, 자신이 전화를 하지 않은 동안 가자미 식혜는 익었고 결국 자신을 긁고 있었던 시간이 그토록 길었다는 사실을
다 안다는, 참으로 많은 말을 눈빛으로 말하려는 것 같았다. 수아는 내게로 준 눈길을 돌려 투명한 유리그릇을
통해 속을 들여다보다가 뚜껑을 열었다. 집안에 찬 냄새의 정체가 수아가 뚜껑을 여는 것과 동시에 다투듯이
쏟아져 나왔다. “식욕을 자극하는 냄새야, 그지?” 그 콤콤하고 탑탑한 냄새가 내 탓인 듯이 내가
짐짓 큰 소리로 말했다. 좁쌀과 잘게 썬 가자미, 무채가 붉은 양념과 어우러져 삭으면서 내는 냄새였다. 이미 형체를
잃은 좁쌀은 무채와 가자미와 한데 어우러져 붉은 김치 속 같았다. 만들기는 수아를 위해서인데 난데없이 내 입에서
군침이 돌았다. 입안에 침이 고이면서 식욕이 일었다. 잘
삭아 비린내도 가시고 좁쌀 냄새도 없는, 가자미가 입속에서 콤콤한 맛을 내며 졸깃하니 씹힐 것만 같았다. 담기만 했지 수아가 올 때까지 기다린 가자미 식혜였다. “가자미 식혜 만드는 방법은 어떻게 알았어요, 언니?” 나는 입에 군침이 도는데 수아는 눈물이 그렁한
채 말했다. 코 망울과 눈시울이 붉었다. “어머니 고향이 함경도거든. 입맛이란 것이 말이야, 참 질기더라. 내가 유년을 일본에서 보냈는데 거기서 엄마가 담그시던 가자미 식혜를 어깨너머로 좀 봤어.” 내가 장황하게 말했다. 그 때 어렸던 내가 냄새 때문에 코부터 쥐면 어머니는 기름기 자르르 흐르는 더운 흰밥 위에다 잘 익은 가자미
식혜를 듬뿍 얻어먹으며 말했었다, ‘이제야 살갔구나 야.’
하고. 함경도의 딸은 일본에서, 일본에서 자란 딸은 캐나다에서
가자미 식혜를 담은 셈이었다, 그것도 귀밑머리가 허연 이 나이에. 그런데
그 때 수아는 왜 난데없이 가자미 식혜 생각이 났던 것일까? 자주 먹은 음식도 아니었을 것이고 집에서
만들어 본 적도 없을 터였다. 그렇다고 내 어머니처럼 수아 어머니가 함경도에 고향을 둔 분도 아니고
수아는 가자미 식혜를 만드는 것을 어깨너머로도 본 적도 없다고 했었다. ‘가자미 식혜가 있던 식탁에의 기억 때문일
거야.’
나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식성이란 것이 원래 그런 것이 아니던가, 어느 날 불쑥 솟구치며
엉뚱한 음식이 먹고 싶기도 하는. 그 기억이 깊은 곳에 파편처럼 박혀있다면 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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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외숙님 . 사람보다 글이 먼저 왔군요. 반갑습니다.
'건강하게 돌아오세요. ^^데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