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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손의 뛰어난 문재(어우야담)
김일손(金馹孫)은 젊은 시절, 재주가 있다고 명성이 자자했다. 무재상(武宰相)이 그를 맞이해 사위로 삼았는데,
김일손은 짐짓 문장에 능하지 못한 척하며 서재에 있으면서 읽는 것이라곤 오직 <십구사략:十九史略> 뿐이었다.
산사(山寺)에 올라가 과업(課業)을 닦으면서 장인에게 안부를 묻는 짧은 편지를 보냈는데, 다른 말은 전혀 없이 다만 '문왕몰 무왕출 주공주공 소공소공 태공태공(文王沒 武王出 周公周公 召公召公 太公太公)'이라 쓰여 있었다.
장인이 마뜩찮아 소매 속에 감추었다. 이때 한 문사가 있었는데, 그는 김일손의 명성을 익히 들었던지라 그 편지를 보고 싶어 했다.
장인이 부끄러워 감추려 하다가 그가 계속 졸라대자, 결국 편지를 꺼내 보여 주었다.
그 문사는 편지를 한참 동안 읽어 보더니, 소스라치게 놀라며 말했다.
이 사람은 천하의 기재(奇才)입니다. 문왕(文王)의 이름은 창(昌)이요, 무왕(武王)의 이름은 발(發)입니다. 우리말로 신발 바닥을 창이라고 하고 족(足)을 발이라고 하니, 문왕출 무왕출,은 신발이 닳아 발가락이 삐져나온다는 뜻입니다. 주공(周公)의 이름이 단(旦)이요, 소공(召公)의 이름은 석(奭)이요, 태공(太公)의 이름은 망(望)이니,
주공주공 소공소공 태공태공'은 아침마다 저녁마다 간절히 바라고 있다는 뜻입니다
장인은 크게 기뻐하고 신발을 사서 보내 주었다.
김일손이 그의 처형제들과 함께 동당시(東堂試)에 응시했는데, 초장(初場)에 술 취해 자다가 아무것도 쓰지 않고 돌아왔고, 중장(中場)에서도 취해 자다가 또 쓰지 않고 돌아왔다.
종장(終場) 때가 되자, 삼장(三場)의 시지(試紙)를 모두 붙여 폭을 이어 시험장에 들어갔다.
고관(考官)이 책문(策問)의 제목을 <중흥:中興>으로 삼고
송(宋)의 고종(高宗)을 역대 중흥조와 나란히 놓자, 김일손이 그 시제(試題)를 거두어 말고서는 고관 앞에 나아가 말했다.
송나라 고종은 한 귀퉁이에서 구차하게 안일만 도모하면서 어버이를 잊고 원한을 풀어 개돼지 같은 자들에게 화친을 구걸했는데, 어떻게 은나라 고종(高宗:무정:武丁)및 주나라 선왕(宣王)과 함께 나란히 중흥주에 놓을 수 있습니까? 바로 잡아 주십시오."
고관이 크게 부끄러워하며 그의 말대로 글을 고쳐 썼다.
김일손은 취기가 거나하게 오르자, 일필휘지로 수십 폭을 내리쓰고 돌아왔는데, 해가 아직 기울지도 않았다.
장인이 그의 아들에게
김서방은 오늘도 또 아무것도 쓰지 않고 왔느냐?
라고 묻자, 아들이 대답했다.
오늘은 황당하고 어지러운 언사를 하며 더럽게 먹칠만 하고 왔는데,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방을 내거는 날이 되자, 사람을 시켜 보고 오라고 하면서, 김일손은 그에게 다음과 같이 일렀다.
너는 가서 맨 위의 첫째 번 이름만 보고 오너라. 그것이 내이름이 아니거든 즉시 돌아올 것이요, 더는 볼 필요가 없다.
그 사람이 가서 방을 보니 과연 김일손이 첫째 번으로 올라 있었다.
처가에서는 크게 놀라고 그를 대접함에 비로소 공경을 다하였다.
김일손은 문장에 능했지만 매양,
자신을 낮추고 그의 두 형을 높여, 두 형이 모두 급제한 뒤에야 이등으로 급제했다.
문장을 지을 때면 마음 속으로 글을 엮어 두었다가 먹을 벼루에 가득 갈아 일필휘지하여 바로 글을 지었다.
그 뒤로는 다시 한 자도 고치는 법이 없이 상자 속에 던져 두었다가 몇 개월이 지난 후에 꺼내 보고는 고쳤다.
누군가 그 까닭을 물으니,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처음 초고를 잡을 때에는 마음 속에 아직 사심이 남아 있어 스스로 그 흠과 병통을 보지 못한다오. 오래 지난 다음에 사심이 제거되고 공심이 생겨 비로소 문장의 잘잘못을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이오."
그가 33세의 나이에 죽어 문장이 크게 이루어지지 못하였음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주나라 선왕(宣王)---주나라 11대 왕.
여왕(厲王)의 아들. 여왕(厲王) 때, 쇠약해진 주(周)왕조를 다시 부흥시킨 중흥주(中興主)로 일컬어 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