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은 열등한 문학인가/ 맹난자
불교 TV에서 방영하는 BTN문학관 <나는 문학을 말하다>를 가끔 시청하고 있다. 작가들의 삶과 문학을 직접 들을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날, 신달자 시인의 발언은 좀 유감이었다. 문학을 삼각형으로 자리매김한다면 꼭짓점에 시와 소설이 있고, 그 밑에 있는 주변 문학은 없어져도 좋다는 얘기였다. 예를 들면 수필, 희곡, 아동문학 등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사견私見이라 할지라도 기존의 질서를 깨는 발언은 공적公的매체에서 삼가야 한다는 것쯤은 모를리 없는 교양인일 텐데.... 그렇다면 시적詩的 자만심에 도취된 그녀는 어떤 시인이란 말인가? 순간 이런 분노와 반문이 솟구쳐 올라왔다. 괴테는 최고의 시인이었다. 그러나 약관의 나이로 세계를 열광케 한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썼고, <파우스트>라는 대작의 희곡을 남겼다. 소설가 오스카 와일드도 <살로메>라는 희곡으로 더 유명하며, 그리고 헤르만 헤세는 시와 소설과 아름다운 수필을 우리에게 선물했다. 인류 역사상 최고의 극작가인 셰익스피어도 소네트 형식의 주옥같은 시를 남겼다. 그들은 문학의 전 장르를 넘나들며 형식에 구애됨 없이 활발한 창작활동을 전개했다. 이 지구상에서 하루라도 셰익스피어 연극이 공연되지 않는 날이 없고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는 전 세계인의 각광을 받고 있다. 이래도 희곡이 없어져야 한단 말인가? 문학의 경계가 허물어진 지금, 우리는 퓨전 시대에 살고 있다. 더구나 '21세기는 수필의 시대'라고 공언한 어느 평론가의 말이 아니더라도 수필에 대한 관심은 날로 고조되고 있다. 문인협회에 등록 수필가는 어느새 3천명을 넘어섰고, 20여 개가 넘는 수필 잡지들은 수필의 문학성 제고와 정체성을 위한 이론 확립에 힘쓰며 비평 활동을 통해 젊은 작가들을 키워내고 있다. 이러한 양적 팽창에서 불구하고 수필은 아직 일간지의 신춘문예 현상 공모에서 제외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다면 수필은 열등한 장르인가? 신달자 씨의 발언과 관련하여 나는 안으로 눈길을 돌려 수필에 대한 의의와 반성할 점을 짚어보기로 하였다. 수필은 어떠한 문학인가? 수필은 한마디로 홍차와도 같은 문학이다. 유리잔 안에 담긴 맑은 빛깔과 은은한 향기, 그 향기의 여운은 또한 길다. 수필은 이와 같이 향기롭고도 아름다운 문학이다. 쉬우면서도 결코 가볍지 않은 글이며, 수필의 대상은 작으면서도 크다. 오동잎 하나를 가지고도 천하의 가을을 논할 수 있고, 겨자씨 한 톨을 가지고도 우주의 진리를 논할 수 있어야 한다. 저마다 자유로운 보폭으로 하나를 가지고도 열을 논할 수 있다. 주제는 땅굴 파듯 깊이 천착하되, 표현은 듬성듬성, 생략돼 함축으로 마치 고목등걸에 핀 매화처럼 성긴 것이 그 귀격이라 하겠다. 글 속엔 뼈대가 서야 하고 논리와 도덕성이 갖춰 있어야 한다. 인생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얻기 위해서는 사물의 관조와 성숙된 인생관을 또한 지니지 않으면 안 된다. 이에 부단한 독서와 사색은 좋은 글쓰기의 필수 조건이다. 그러나 배움學問이 없는 사색은 위험하다. "문장이 비록 작은 재주라고는 하나 학력學力과 식견識見, 그리고 공정功程이 없이는 지극한 데로 이를 수 없다."는 허균의 삼요三要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스승의 체계적인 지도 아래 인문학 전반에 걸친 공부는 필수다. 그것 없이는 자신의 독단이나 편견조차 인식하지 못할 것이며 올바른 안목과 식견도 바로 설 수 없다. "생각만 하고 공부하지 않으면 위태롭다(思而不學則殆)"는 공자의 말씀도 바로 이런 점을 지적하신 것이 아닐까 한다. 또한 문장력이 뛰어난다고 해도 빈약한 정신세계로는 훌륭한 작품을 기대할 수 없다. 수필은 손끝의 재주로 빚어지는 문학이 아니기 때문이다. 좋은 수필을 쓰기가 어려운 이유는 바로 사람의 가치가 글의 가치로 환산되는 때문이다. 수필은 곧 쓰는 그 사람이다. 그러므로 인격의 함양과 내적內的풍부가 다 함께 요구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어떤 지점에 서 있는가? 어떠한 자세로 수필 쓰기에 임하고 있는가? 얼마 전 수필집을 상재한 원로 소설가 H씨는 수필쓰기가 소설 쓰기보다 훨씬 어렵다며 "수필가들은 대단해" 라며 성찬하던 말씀이 떠오른다. 수필에서는 소설처럼 허구가 용납되지 않기 때문이다. 수필은 우선 작가 자신의 진솔한 체험이라야 하고 선별된 그 체험은 형상화形象化라는 문학적 경로를 거쳐 독자에게 다가가야 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독자들은 작가의 진정성에서 공감하기를 원한다. 그들은 찔린 손가락 끝에서 흐르는 피의 생경함 같은 것을 느끼고 싶어 한다. 픽션이 아니라는 사실이 수필의 장점이기도 하다. 수필은 우선 분량이 길지 않아서 좋고, 시처럼 함부로 비약하여 논리가 무시된 난해성도 없으며 울타리 넘어 친근한 이웃처럼 편안하고 소박한 문학이다. 그런가 하면 품격을 갖춘 노신사의 지성과도 만나는 기쁨을 나는 몽테뉴의 수필에서 누린다. 자신이 고독을 좋아하는 이유는 보다 자신에게 집중하기 위해서며 자신의 욕망과 심로心勞를 억제하기 위해서라는 자성적自省的에세이스트인 몽테뉴 외에도 유려한 문장과 섬세한 묘사로 일상적 사유의 뜰을 가꾼 헤르만 헤세의 수필, 또 죽기 일 년 전에 쓴 나쓰메 소세키의 인생에 대한 깊은 성찰이 담긴 <유리문 안에서>와 같은 수필집이라든가, 영국의 찰스 램,<도보 여행>의 스티븐슨, 미국의 에머슨, 중국의 임어당과 주자청, 새싹이 파르스름하게 돋아난 느릅나무 토막을 자르려다가 단두대를 떠올리고 차마 그 목에 톱질을 할 수 없었다는 러시아의 작가 솔제니친, 이에 버금가는 수필, 다산 정약용의 <파리를 조문하는 글>이 있다. 파리는 굶주려 죽은 백성이 다시 태어난 몸이기에 그는 글을 지어 그들의 넋을 위로한다. "이제 실컨 포식하여 굶주렸던 한을 풀도록 하여라. 그리고 다시 태어나지 말아라. 사람은 죽어도 내야하는 세금이 남았나니...." 이와 같이 사회의 부패상을 고발한 촌철살인의 수필들. 우리나라의 이규보, 연암 박지원, 피천득, 김소운, 이양하 제씨들의 수필은 또한 얼마나 빼어나던가? 어찌 수필이 열등한 장르이겠는가. 다만 그와 같이 쓰지 못함을 탄할 뿐이다. 문학 장르에 어찌 우열이 있겠는가. 다만 쓰는 사람의 우열이 있을 뿐이다. 전천후 작가, 셰익스피어, 괴테, 헤세, 이상李箱은 어떤 장르에서도 뛰어났으며 결코 어떤 장르에도 매이지 않았음을 소심한 수필가들이여, 상기해 주시기 바란다. 제 몸의 깃털을 뽑아 비단을 짠 학녀鶴女처럼 그렇게 치열한 글쓰기를 통해 수필에 봉사해 주실 것을 부탁드린다. 왜 그래야만 하는가를 짚어보게 한 자성自省의 기회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