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은 마른 뼈들이 살아나리라입니다.
이 에스겔에서는 에스겔 선지자가 여호와 약인 왕 597년에 18세 때에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게 되고, 포로로 끌려간 지 12년째 되는 그때에 에스겔 선지자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시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루살렘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 하나님이 에스겔 선지자에게 나타나셨을 때 에스겔은 깜짝 놀랍니다. 왜냐하면 에스겔의 생각 속에 하나님은 항상 예루살렘에 계셔야 하기 때문이죠. 예루살렘에 늘 가서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을 만났던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그 바벨론에 하나님이 나타나셨으니 그러니까 자기 머릿속으로만 인간은 늘 항상 자기가 할 수 있는 생각으로만 하나님을 가둬놓게 되는 것이죠.
하나님은 온 천지를 어디든 활보하시는 하나님이시고, 거칠 것이 없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어떤 한 지역이나 어떤 예루살렘 성전이나 어떤 한 곳에 국한되어 있지 않으시는 우주적인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나타나서 에스겔을 데리고 골짜기로 가게 됩니다. 그 골짜기에는 온통 뼈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생명의 기운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죽음의 땅입니다. 그 죽음의 땅 한가운데 세우시고 마른 뼈가 가득찬 것을 보여주시면서 에스겔에게 3절에 물어보십니다. 이 뼈들이 이렇게 말라 비틀어진 뼈들이 살 수 있겠느냐 당연히 살 수 없죠.
어떻게 살아납니까? 그래서 에스겔이 어떤 대답을 합니까?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십니다고 얘기를 합니다. 그러니까 상식적으로는 살아날 수 없지만 하나님의 결정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하시면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될 수도 있다는 고백이 되어지는 것이죠.
제가 이 말씀을 보면서 만약 하나님께서 저에게 물어보신다면 구미목장교에 있는 청년부에 있는 마른 뼈들이 살아날 수 있을까라고 저한테 물어보신다면 저는 에스겔과 다르게 대답할 것입니다. 당연하죠. 당연히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른 뼈들을 살아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제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할 때에 하나님께서 하실 것을 기대할 때에 하나님께서 하실 것입니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골짜기에 가득한 마른 뼈들이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어지니까 힘줄과 살이 생기고 가죽이 덮이게 되며 다시 살아나게 됩니다.
그렇지만 그 그것은 시체에 불과한 거죠. 살아 숨쉬는 상태는 아닌 거죠. 뼈와 살과 가죽은 있지만 정작 살아 숨쉬는 영적인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이죠. 그저 그냥 주일 되면 왔다가 봉사하고 점심 먹고 있다가 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 숨쉬는 영혼들이 되어야 하는 것이죠. 영적 회복을 통해 하나님을 새롭게 깨달아서 알게 되어야 하는 것, 그것까지가 생명이 살아나는 것이죠.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흙으로 빚으시고 후 하면서 생기를 불어넣으셔서 흙에 불과했던 아담을 생명 있는 인간으로 만들어주신 것처럼 생기를 불어넣어주십니다. 그 뒤에 감지하고 인지하는 영혼이 생기는, 그러므로 자기에게 생명을 불어넣어주신 생명의 주인이 여호와인 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메마른 영혼들은 생명에 주어진 여호와를 알지 못합니다. 느끼지 못합니다. 생명이 없습니다. 메말라서 무지한 영혼들에게 하나님의 주되심을 알려야 하는 것이죠. 마른 뼈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어자 되어지자 많은 뼈들이 사람의 형상을 갖추게 됩니다. 생명의 주관자이신 여호와의 말씀이 선포되어짐에 따라 죽음에서 생명으로, 절망에서 소망으로, 멸망 가운데에서 주님을 바라보는 영광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이 혹시는 메말라 있지는 않은지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마른 뼈다귀 같이 골짜기에 가만히 안주하며 널려 있지는 않은지 되새겨 봐야 할 것입니다. 아무리 마른 뼈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말씀에 움직이며 살아 숨쉬는 것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적은 믿음과 좁은 안목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이 하시는 일들을 비판하며 판단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친히 계획하시고 주관하십니다. 그저 우리는 그 일에 쓰임 받는 도구입니다. 우리가 잘나서 우리가 자라기 때문에 쓰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면 마른 뼈에도 생기가 돌게 하시고 마른 고목에도 새싹이 나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이 새 일을 행하시며 광야의 길과 사막에도 메마른 사막에도 강을 내시는 거죠.
이 메마름의 특징은 생명이 없다는 것입니다. 꽃다발을 이런 생활을 계속 놔두면 말라버리게 되죠. 그래서 드라이 플라워로 놔두면 보기에는 이뻐 보일지 모르지만, 겉모습은 괜찮을지 모르지만 생명이 없습니다. 향기가 없습니다. 이 메마른 영혼은 세상적인 세계관으로 모든 것을 바라볼 수 없게 됩니다. 바라볼 수밖에 없게 됩니다.
이 세계관이라는 것은 내가 어떤 안경을 쓰고 이 세상을 바라보냐입니다. 선글라스를 쓰면 깜깜하게 보여지는 것이고, 빨간 안경을 쓰면 다 빨갛게 보여지는 것입니다. 어떤 세계관의 안경을 내가 쓰고 있느냐 이 세상을 바라보는 가치와 이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정체성과 나의 생각이 담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적인 세계관으로 바라보면 세상적인 논리로 보게 됩니다.
통계를 보면 우리나라 평균 평균 연봉이 5,300만 원인가 그렇게 통계청에서 나왔어요. 그러면 그 숫자와 단어를 듣는 순간 나는 떠올립니다. 내가 받는 금액과 이 금액과 그 기준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픽스가 딱 돼버립니다. 거기에 맞춰져 버립니다. 세계적인 세상적인 세계관에 그냥 나도 모르는 사이에 들어가서 거기에 비교당하는 비교 순서에 들어갈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으면 세상에 눌리게 됩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며 세상을 다스리라고 말씀하셨고 이기라고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하는데, 세상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으면 세상을 쫓아가느라 이리 뛰면 이리 뛰고 저리 뛰면 저리 가야 되고 가랭이가 찢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은 그러한 세상적인 세계관으로 숫자적인 것으로 통계적인 것으로 우리를 무능하게 만들고 무기력하게 만들고 메마름에 허덕이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지만 기독교적인 세계관은 다릅니다. 베드로전서 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퉁이 돌에 대한 얘기를 하십니다. 건축자들은 전문가들이니까 제대로 다듬어진 돌을 갖다 쓰지 그렇게 크고 다듬어야 되는 돌은 쓰지 않고 버린 돌을 주님께서는 그 돌을 가져다가 모퉁이 돌로 쓰신다고 말씀을 하시는 거죠.
세상적으로는 스펙이 있어야 되고 다듬어져 있어야 되고 경력이 있어야 쓰기도 좋고 일도 잘하니까 그것에 맞춰져서 기준에 의해서 갖다 쓰지만 하나님께서 보시는 기준은 그게 아니라는 것이죠. 그렇지 않아도 시간이 오래 걸릴 수 있어도 다듬어져야 할 수도 있지만 그 시간이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께서는 그 가치를 하나님께서 들어쓰심에 합당하게 만드시고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제가 사역을 하다가 의정부에서 제일 큰 교회인 의정부 광명교회에서 사역을 하고 거기서 사역을 연말에 그만두고 다른 사역지를 준비하게 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전까지는 사역을 한 번도 쉰 적이 없습니다. 다 물론 사역을 준비하면서 기도로 준비하고 그렇게 하면서 계속 사역지를 잘 매끄럽게 옮겨 다닐 수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그때는 12월에 사역을 그만두고 나왔는데 사역지가 구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12월이 지나버리고 1월이 되고 이제 제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도 신학 석사, 선교학 석사, 사회복지 석사 석사가 3개고 가락만도 길고 유학도 다녀오고 나름 스펙이 좋은데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도 불러주지 않으니까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거는 제가 쌍문동에 사는데 도봉산에 매일 점심 먹고 나서 도봉산에 차를 몰고 가서 부동산에 올라가서 1시간씩 기도하고 내려오는 것밖에 할 수가 없습니다.
한 달이 지났습니다. 두 달이 지났습니다. 이미 모든 교회는 12월이면 다 사역자들이 마감이 됩니다. 그리고 1월 2월 이후에 나오는 자리들은 12월에 들어갔다가 그 결과가 어떤 문제가 있거나 뭔가가 안 맞거나 힘들다 싶으면 나와서 결원이 생겨서 다시 들어가는 그러니까 대체적으로 조금 문제가 있을 수 있는 확률이 높은 교회들이 1월 2월 3월 그쯤에 나오는 거죠. 그것도 2월이면 다 끝납니다.
1월 2월 3월이 됐습니다. 조급해집니다. 위축되어집니다. 이대로 지나가면 그냥 1년을 그대로 가야 됩니다. 다시 연말이 돼야지 사역지가 10월부터 나올 수 있습니다.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게 3월달 어느 날 차를 몰고 기도하러 또 가는데 나의 스펙, 나의 모든 그런 재능들, 내가 했던 여태까지의 교회마다 다녀면서 했던 영어 예배를 셋업하고 그런 모든 사역들을 만들어냈던 것들, 그런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만이 하나님만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근데 문득 눈을 들어서 저쪽 길 건너편을 봤는데 길 건너편에 간판이 있는데 어떤 간판이냐 하면 소유주라는 간판을 봤습니다. 그 간판을 보는 순간 그 단어가 내 마음속에 쫙 들어오는 겁니다. 그러면서 깨달음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왜 걱정을 하고 있지 내가 왜 조급해하고 있지 내가 왜 이렇게 위축되어 있지 주님께서 나를 불러주셨고 너는 내 거야 라고 해주셨고, 주님이 나의 소유주이신데 왜 그걸 믿지 못하고 내가 이러고 있지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부터 생각이 바뀝니다. 기도가 바뀝니다. 그래서 가서 걱정이 그때부터 되지 않습니다. 근데 하나님께서 하실 거야. 그래서 기도를 하고 내려오는 길에 아주 은혜가 충만해서 그 간판을 다시 한 번 보고 싶어 나에게 은혜를 준 증표. 그래서 반대편으로 이제 오면서 그 간판을 찾으면서 그쯤에 와서 그 간판을 보는데 그 간판이 무슨 간판이냐 하면 주유소 그러니까 뒷배경이 없이 그냥 글자만 찍어놓은 간판이었던 건데 반대편에서 보니까 소유주였던 거예요.
그러면서 하나님은 별걸 다 포기하시네. 그건 나한테는 큰 증표거든요. 하나님이 나의 소유주이심을, 하나님이 나의 주권자이심을 인정하는 순간 내 생각으로 내 계획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 3월이 지나면서 100일이 되는 때에 신림동에 있는 제일 성도교회라는 곳에서 연락이 오고 거기서 사역을 하게 됐는데 들어가 보니까 내가 100일 동안 기도를 해야만 했던 이유가 다 있었던 거예요. 그 사역지가 너무 좋은 사역지긴 하지만 문제가 있어서 청빙 문제가 있어서 내가 그냥 들어가면 힘들 수밖에 없는 사역지, 내가 기도로 무장을 하고 준비되어져서 들어가야 사역을 할 수 있는 사역지였던 것을 나중에 깨닫게 되는 것이죠.
하나님께서는 이유 없는 일은 나에게 주시지 않는다는 거죠.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에서 마른 뼈가 다시 살아나게 되어지는 것의 핵심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그것을 인정할 때 우리의 메마른 심령이 생기로 가득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생명으로 채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살아 숨쉬는 생명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청년부들이 나와서 찬양을 할 때에 그 찬양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이 준비하는 과정을 통해서 또 이 찬양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일하시기 시작하셨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 청년들이 마른 뼈들이 살아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하나님의 주인 되심을, 하나님이 이 세상의 주관자이심을 선포하며 세상적인 기준과 세상적인 세계관에 눌려 사는 저희들이 아닌 세상을 다스리며 이기며 나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살아갈 것입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더 보기를 원합니다. 우리 청년들이 하나님을 만나게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소유주이심을, 주관자이심을 선포하고 인정하며 나아가는 저희 청년들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