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중
세 가지 변화에 대하여
우리의 정신은 처음에는 낙타처럼 견디고, 그 다음에는 사자처럼 강해지며, 마지막에는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고 자유롭게 변하게 된다. 이렇게 세 가지 정신적인 변화를 통해 우리는 점점 더 멋진 사람이 되어간다.
니체의 정신의 3가지 변화
첫째는 낙타다.무거운 짐을 짊어진 자. 나는 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한다.순종, 수동적, 인내
낙타는 가장 무거운 짐(관습, 규범)을 지고 뚜벅뚜벅 뜨겁고 고독한 사막으로 걸어간다. 체념과 경외로 자신의 삶을 숙명처럼 받아들이고 살아간다.
두 번째는 사자다.자유, 자의.나는 소망한다.
자유의지를 가지고 원치 않는 일에는 언제든지 NO라고 외친다.
새로운 창조를 위해 자유를 창조하고 새로운 가치를 위해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해, 원죄와 관습, 규범에서 벗어나기 위해 분투한다.
세 번째는 어린아이다.새로운 가치의 창조라는 긍정,
자기 극복 의지
나체는 어린아이의 상태를 정신 변화의 최고점으로 낙점한다.아이는 순진무구함이며 망각이고, 새로운 출발, 놀이,스스로 도는 수레바퀴, 최초의 움직임이며, 성스러운 긍정이 아닌가.천진무구 그 자체인 아이는 잘 잊어버리고 새로운 놀이에 집중한다.바닷가에서 놀고 있는 아이는 모래성을 쌓고 또 쌓는다. 파도가 허물어뜨려도 개의치 않고 다시 모래성을 쌓으며 즐거워한다.
이처럼 아이는 이미 지나간 일에 연연해 하지 않고 현실과 금방 화해하고 무슨 일이든 마음에 담아놓지 않는다. 신성한 긍정의 힘이다.
짜라투스트라의 설교 제1부
-세 가지 변화에 대하여
나는 그대들에게 정신의 세 가지 변화에 대하여 설명하겠다. 정신이 어떻게 해서 낙타가 되고, 낙타가 어떻게 해서 사자가 되며, 마지막으로 어떻게 해서 어린아이가 되는가를 차례로 설명하였다.
내부에 외경을 간직하고 있는, 중력을 견디어 내는 정신은 많은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 이 정신의 강함은 무거운 짐, 가장 무거운 짐을 갈망한다.
무엇이 무겁고 곤란한가? 중력을 견디어 내는 정신은 이렇게 묻고는 낙타처럼 무릎을 꿇고 앉아 아주 무거운 짐이 실려지기를 원한다.
그대 영웅들이여, 어깨에 메고서 자신의 강함을 즐길 수 있을 정도로 무거운 것은 무엇인가? 중력을 견디어 내는 정신은 이렇게 묻는다.
가장 무거운 것은 그대의 자랑에 고통을 주기 위해 그대 스스로를 낮추는 것이 아닌가? 그대의 지혜를 조롱하기 위해 그대의 어리석음을 겉으로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아니면 자신이 의도했던 바가 성취되어 그 승리를 자축하고 있을 때, 그 일로부터 떠나는 것인가. 유혹하는 자를 유혹하기 위하여 높은 산으로 올라가는 것인가?
아니면 지식의 도토리와 지식을 풀을 먹으며 진리를 위해 영혼의 굶주림을 참고 견디는 것인가? 아니면 병들어 있는 그대를 위로하러 온 자들을 돌려보내고 그대가 바라는 것을 조금도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와 사귀는 것인가?
아니면 진리의 물이라면 더러운 물속에서라도 서슴없이 들어가 차가운 개구리든 뜨거운 두꺼비든 경멸하지 않은 것인가?
아니면 우리를 경멸하는 자들을 사랑하고, 우리를 놀라게 해 주려고 하는 유령에게 악수를 청하는 것인가?
이와 같이 중력을 견디어 내는 정신은 이들 가장 무거운 것 모두를 짊어지고자 한다. 그리하여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사막으로 들어가는 낙타처럼, 정신은 자신의 사막으로 서둘러 가는 것이다.
그러나 한없이 고독한 이 사막에서 두 번째 변화가 일어난다. 여기서 정신은 사자가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자는 자유를 쟁취하려고 하고 그 사막의 주인이 되려고 한다.
그는 여기서 자신을 최후로 지배할 자를 찾아 헤맨다. 그러나 그는 이 최후의 지배자, 자신의 최후의 신에 대적하려고 한다. 그는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그 거대한 용과 필사적으로 싸우는 것이다.
정신이 더 이상 주인이나 신으로 섬기기를 원치 않는 그 거대한 용의 이름은 무엇인가? 그 거대한 용은 “그대는 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자인 정신은 “나는 소망한다”라고 말한다.
“그대는 해야 한다”라는 용은, 사자인 이 정신이 가는 길을 가로막고 누워 있다. 그것은 비늘 달린 한 마리 짐승으로, 하나하나의 비늘에서는 “그대는 해야 한다.”라는 글자가 금빛으로 번쩍이고 있다.
천 년 동안 거쳐 온 모든 가치가 비늘에서 번쩍이며, 모든 용 중에서 가장 힘쎈 이 용은 “모든 사물의 일체의 가치, 그것은 내 몸에서 번쩍이고 있다”라고.
“모든 가치는 이미 창조되었으며, 창조된 그 모든 가치는 내 속에 있다. ‘나는 소망한다’는 이제 더 이상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용은 말한다.
나의 형제들이여. 정신의 사자가 왜 필요한가? 체념과 경외로 가득 찬 채 무거운 짐을 진 낙타로는 왜 만족하지 못하는가?
새로운 가치의 창조, 그것은 사자조차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새로운 창조를 위한 자유의 창조, 그것은 사자의 힘으로도 가능한 것이다.
스스로 자유를 창조하고, 의무에 대해서까지도 신성한 부정을 하기 위해 사자가 필요한 것이다. 나의 형제들이여!
새로운 모든 가치에 대한 권리의 획득, 그것은 중력에 견디며 경의로 가득 찬 정신에게 있어서는 극히 두려운 행이이다. 이러한 정신에게는 그것은 강탈이며, 맹수가 먹이를 낚아채는 행위와 같다.
이 정신은 일찍이 “그대는 해야 한다.”를 자신의 가장 신성한 것으로 사랑했다. 그러나 이제 이 정신은 자신의 사랑으로부터 자유를 강탈하기 위해 가장 신성한 것 속에서까지도 환상과 교만한 마음을 찾아야 한다. 이 강탈을 위해 사자가 필요하다. 그러나 말해보라. 나의 형제들이여. 사자는 할 수 없는 것을 어린아이가 능히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약탈하는 사자가 다시 어린아이가 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어린아이는 친진무구 그 자체이며 망각이다. 하나의 새로운 시작이며, 쾌락이다. 스스로 굴러가는 바퀴이며, 시원의 운동이고 신성한 긍정이다.
그렇다. 나의 형제들이여. 창조라는 쾌락을 위해서는 신성한 긍정이 필요하다. 이제 정신은 자신의 의지를 욕구하며 세계로부터 격리된 정신은 자신의 세계를 획득한다.
나는 그대들에게 정신의 세 가지 변화를 설명하였다. 정신이 어떻게 해서 낙타가 되고, 낙타가 어떻게 해서 사자가 되며, 끝으로 사자가 어떻게 해서 어린아이가 되는지를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그때 그는 ‘얼룩소’라고 하는 마을에 머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