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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의 추억
黃源甲 <소설가, 역사연구가>
명산을 많이 찾아보았지만 정작 정상까지 오른 적이 드물었다. 산행을 위해서 간 것이 아니라 대체로 답사를 하러 찾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명산들은 모두가 뜻 깊은 역사의 현장이다. 경관이 빼어날 뿐 아니라 봉우리와 골짜기마다 갖가지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유서 깊은 고찰(古刹)을 품은 명산도 있고, 그 언저리에 역사를 바꾼 전쟁터가 펼쳐진 산도 있다. 그래서 나는 관광객의 눈으로 경치를 보지 않고 순례자의 눈으로 역사를 읽으려고 애쓴다.
백두산(白頭山)과 금강산(金剛山)은 우리나라 명산 중의 명산이다. 젊은 시절부터 가보고 싶었지만 중국과는 국교가 없고, 북한과도 왕래가 없었기에 그런 기회는 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마침내 백두산을 처음 찾은 것이 21년 전. 광복 50주년이던 1995년 7월이었는데, 그해에 내 나이도 50세였다. 그때 어느 대학원 사학과 답사반과 동행하여 15일간 고구려와 발해 유적을 답사하는 기회에 백두산에 올랐던 것이다. 그렇게 겨레의 어머니 산 백두산에 올라보고, 또 2002년 봄에는 금강산도 찾아가봤으니 이는 내 한 생(生)의 행운이며 보람이라고 생각한다.
광복둥이인 이 사람이 백두산을 더욱 그리워한 까닭은 1945년 8.15해방의 감격과 환희도 잠깐, 그동안 외세에 의해 국토가 양단된 채 광복의 기쁨을 씨줄 삼고 분단의 아픔을 날줄 삼아 현대사 반세기를 교직(交織)해 왔기 때문이었다. 그 동안 이루지 못한 통일의 원망(願望)이 우리네 가슴마다 얼마나 뜨거운 응어리로 맺혀 있었던가.
우리가 그 동안 민족의 영산(靈山) 백두산을 더욱 그리워하고,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의 옛 조상들이 용장(勇壯)한 기상을 드날리던 만주 벌판을 찾아가고 싶어 하던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그 곳이 바로 우리 민족에게는 영원한 정신의 고향이요 빛나는 역사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또한 분단 70년이 넘도록 아직도 이루지 못한 통일의 비원(悲願)이 겨레의 가슴과 가슴마다 뜨거운 응어리로 맺혀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토록 그리워하던 백두산이 거기에 있었다. 어느 애인인들 이처럼 지극한 정을 쏟아 그리워했던가. 개국신화가 서린 민족의 성산(聖山), 겨레의 위대한 어머니 산이 거기에 우뚝 서서 지금은 남의 땅을 거쳐 찾아온 못난 자손들을 반겨주고 있었다. 자애로운 품을 한껏 벌린 채.
광복 50주년을 맞아 찾아간 백두산은 장엄한 대자연의 일대 서사시였다. 무엇보다도 필자는 운이 좋았다. 열 번 올라야 한두 차례밖에는 백두산 정상부와 천지(天地)의 장관을 볼 수 없다는데 하루에 잇달아 두 차례나 올라서 두 번 모두 눈이 시리도록 아름답고 광장(廣壯)한 백두산과 천지의 황홀경에 빠져들 수 있었으니 말이다.
필자가 겨레의 어머니 산 백두산을 찾은 것은 광복 50주년이 되던 1885년 7월이었다. 7월 3일 밤 9시 10분에 통화역(通化驛)을 출발한 장백산호(長白産號) 야간열차는 이튿날 새벽 5시 20분에 종착역이며 중국 쪽 백두산 등정의 들머리인 해발 600m 지대의 이도백하역(二道白河驛)에 도착했다. 이도백하에서는 마이크로버스로 갈아타고 1시간쯤 달려 80㎞ 떨어진 백두산 밑자락의 백산대주점(白山大酒店)으로 향했다. 백산대주점은 백두산 등정을 마친 뒤 그 날 밤을 묵은 호텔이었다.
7월 1일에 심양(瀋陽) 교외 도선국제공항을 통해 중국에 입국한 뒤 쉴 새 없이 유적 답사를 위해 강행군을 한데다가 밤새 기차 여행에 시달렸으므로 피곤하기도 했지만 온몸에서 땀 냄새가 나는 등 꼴이 말이 아니었었다. 이런 몸으로야 어떻게 성스러운 겨레의 어머니 산에 안길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한두 해도 아니고 수십 년을 두고 벼르며 기다려 왔던 백두산과의 만남인 것을. 아니, 광복의 그 해. 분단의 그 해에 태어났으니 50년을 두고 기다려 왔다고 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옷을 갈아입고 그토록 고대하던 백두산 등정을 시작했다. 산문(山門)을 들어서자마자 먼발치로 눈에 차는 백두산 정상부의 영이(靈異)로운 자태가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날씨마저 맑아서 마치 못난 자식이 중국 땅을 거쳐 찾아오기는 했지만 어머니의 무한한 자애로 용서하면서 반겨주는 듯했다.
해발 2750m의 백두산 정상부는 1년 중 7월부터 9월까지 3개월간을 재외하고 약 270일이 대체로 흰 눈에 뒤덮이고 천지는 얼어붙어 좀처럼 등산로를 찾기 어려우므로 올라가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또한 한여름의 멀쩡하게 맑은 날이라도 갑자기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안개와 구름이 사방에서 자욱하게 몰려오고 비바람 모래바람 우박이 사납게 몰아치는 등 기상 상태가 예측 불허요 천변만화한 까닭에 가까스로 정상부를 올랐다고 해도 천지와 그 주변의 온전하고 맑은 장관을 보기란 참으로 어렵고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일평생을 주유천하한 방랑시인 김삿갓도‘금강산은 여러 번 올랐고 묘향산도 두 번이나 올랐지만 백두산은 멀리서만 보았지 단 한 차례도 오르지 못했다’고 자작시「작북유록 탄불견백두산(作北遊錄 歎不見白頭山)」을 통해 탄식했는지 모른다.
뿐만 아니다. 일제강점기인 1926년에 백두산에 오른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은「백두산근참기」에서 이렇게 고백하기도 했다.
‘바람이 냅다 분다…… 모래와 돌이 날려 와 때려서 얼굴을 내어놓을 수가 없다. 비마저 온다. 대번에 퍼부어서 눈코를 뜨지 못하게 한다. 눈보다 차고 우박보다 아픈 비가 폭포수처럼 쏟아진다. 오는 것이 아니라 내리쏟는 것이다. 비는 뭇매질을 하고 바람은 칼부림을 한다……. 아무리 생각하여도 그저 풍우는 아니다. 분명히 너희의 소행을 생각해 보라 하시는 백두산 어머니의 눈물의 채찍이다…….’
육당은 왜 백두산 어머니가 눈물의 채찍질을 했다고 생각했을까. 그것은 넓디넓은 조상의 옛 땅 만주벌판을 죄다 중국에게 빼앗기고 압록강과 두만강 이남으로 비좁아진 나라마저 일본에게 송두리째 먹혀 버린 못난 후손의 자책감과 자괴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국토 양단과 혈육 이산의 아픈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도 빠짐없이 어머니 백두산으로부터 눈물의 채찍질을 당해야 마땅하리라.
국토의 조종(祖宗)인 백두산은 분단 조국을 살아가며 통일을 염원하는 우리에게 희망의 영산이요, 통일의 비원을 안고 남녘 끝 한라산까지 내려 달리는 백두대간(白頭大幹)의 머리 산이다.
‘백두산에 높이 앉아 앞 뒤뜰 굽어보니 / 남북 만일에 옛 생각 새로워라 / 가신 님 정녕 계시면 눈물질까 하노라.’
이 시조는 1876년(고종 13)에 박효관(朴孝寬)과 안민영(安玟英)이 편찬한『가곡원류(歌曲源流)』에 실려 있는 작품이다. 지은이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그 역시 백두산에 올라 빼앗겨 버린 조상의 옛 땅을 그리워하며 어지러운 현실을 한탄했던 모양이다.
우리나라 강역이 압록강· 두만강 이남으로 축소된 것은 신라가 외세인 당(唐)을 끌어들여 동족의 나라인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킨 뒤부터이지만, 아직도 한국사의 영역이 압록강· 두만강 이남에 국한된다는 사대주의 식민사관에 민족 자존심과 주체성을 팔아먹은 얼빠진 사학자들이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개탄스럽기 그지없는 노릇이다. 학문에는 국경이 없지만 학자에게는 국적이 있다.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는 말할 나위도 없지만 그 뒤 만주를 벌판으로 일어난 거란의 요(遼), 여진의 금(金)과 청(淸)이 모두 고구려 옛 땅에서 살면서 백두산을 조상의 발상지로 성스럽게 우러러보던 고조선과 고구려· 발해의 후예들이니 만주의 역사는 누가 헛소리를 해도 당연히 우리 민족사의 일부분이다.
백두산 최고봉인 장군봉(백두봉 : 병사봉)의 높이도 2744m로 학교에서 배웠지만 이것도 틀렸다. 이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도쿄만(東京灣)을 해발 기준으로 측량한 결과요, 원산과 청진 앞바다를 기준으로 측량한 북한과 중국의 기록이 모두 2750m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백두산이 현재는 북한과 중국의 국경선이 천지 가운데를 지나가고 있지만 본래는 모두가 우리 영토였다. 이는 현재 중국 측 영토로 되어 있는 장백폭포(백두폭포 : 비룡폭포)나 소천지(小天池) 등에 우리에게 너무나도 친근한 견우와 직녀, 선녀와 나무꾼의 전설이 서려있는 사실을 보더라도 분명하다.
백두산은 유장한 역사를 이어온 우리 배달민족 한겨레의 정신적 고향이다. 단군왕검이 나라를 세우기 훨씬 전부터 우리 조상들이 삶의 터전으로 삼았던 민족의 발상지요 민족사의 요람이다.
천지는 백두산 서쪽 기슭으로 흘러내려 압록강을 이루고, 북쪽으로는 장백폭포와 이도백하를 거쳐 송화강 원류를 이룬다. 다만 두만강만은 옛 기록들과는 달리 천지에서 발원하지 않고, 함경북도 무산군 삼사면 도내리, 현재 북한 량강도 백암군 창곡리 북동계고 1470m 지점이 발원지라는 것이 강 연구가 이형석(李泂石) 씨의 주장이다. 어쨌든 이 세 줄기 큰 강의 언저리가 모두 고대에 우리 조상들이 개척한 고조선·부여· 발해의 고토인 것이다. 조상의 옛 땅을 빼앗기고 국토마저 분단되니 민족의 성산 백두산을 찾아가는 데에도 우리 땅으로 가지 못하고 최고봉에도 오르지 못하니 이 얼마나 부끄럽고 통탄스러운가.
백두산을 중국에서는 금나라 때부터 장백산(長白山)이라고 불렀다. 우리나라는 『삼국유사』 ‘고조선’ 조 단군설화에서 태백산(太白山)이라고 했고, 백두산이라고 부른 것은 삼국시대부터였다.
통일이 되면 평양을 거쳐 백두산도 오르고 묘향산도 오르련만 지금은 중국을 통해 갈 수밖에 없다. 백두산은 북한의 자강도 삼지연군과 중국의 연변 조선족자치주 내의 길림성 안도현 사이에 위치하며 전체 면적은 전라북도와 비슷한 8000㎢.
등반로의 입구인 산문 앞 매표소에서 입산료로 인민폐 120위안(元)을 내고 들어가면 곧 악화(嶽樺)삼거리. 여기서 길은 두 갈래로 갈라진다. 왼쪽 길은 천문봉(2650m)으로 오르는 자동차길이다. 대부분은 악화삼거리에서 1인당 100위안을 내고 중국인이 모는 6인승 지프로 흑풍구(黑風口)를 지나 천문봉 바로 아래 기상대까지 올라가는 데 20분도 채 안 걸린다. 차에서 내려 천문봉으로 올라가 천지를 둘러보는 데에도 10분 정도면 충분하니 이래서야 민족의 발상지요 성스러운 어머니 산인 백두산에 올랐다고 감히 말할 수가 없다. 그래서 지프를 타고 악화삼거리까지 되돌아 내려온 다음, 이번에는 제대로 된 백두산 등정을 시도했다. 악화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갈라진 천지길(장백폭포길)을 택해 걸어서 오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천지와 장백온천, 상가단지를 지나자 이내 가파른 너덜길이 시작되었다. 왼쪽으로 장백폭포에서 쏟아지는 송화강 원류 이도백하를 내려다보면 너덜길을 힘겹게 오른다. 길은 오른쪽으로 천인단애의 바위 절벽을 따라서 실낱같이 이어진 아슬아슬한 벼랑길이다.
장백온천에서 겨우 1㎞밖에 떨어져 있지 않지만 길이 워낙 가파르고 험해서 장백폭포 옆을 지나는 데에도 1시간이나 걸렸다. 해발 2000m 지점에 위치한 높이 68m의 장백폭포는 견우와 직녀의 전설을 간직한 우량교라는 집채 만한 바위가 폭포수를 두 줄기로 갈라놓고 있다.
천지에서 흘러내리는 승사하(통천하)를 왼쪽으로 바라보며 비교적 평탄한 산기슭을 500m쯤 걸어 달문을 지나면 마침내 넓은 천지가 별유천지인 양 눈앞에 시원하게 펼쳐진다. 장백폭포에서 천지에 이르기까지 7월로 접어들었는데도 군데군데 눈이 쌓여 있었고 천지도 호수 가는 얼음이 그 때까지도 녹지 않았다.
해발 2184㎞ 지대에 위치한 천지는 평균수심이 204m, 최고수심이 373m, 면적은 10㎢, 옛날에는 용담(龍潭), 또는 용왕담(龍王潭)이라고 불렀다. 현재 천지는 북한과 중국의 비밀협정에 따라 양측 국경선이 한가운데를 가로지르고, 이에 따라 천지를 둘러싼 2500m이상 16개의 고봉 중 7개는 북한 측에, 9개는 중국 측에 속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천지 가에 엎드려 차고 맑은 천지수를 배가 부르도록 실컷 마셨다. 천지 생수는 중금속에 전혀 오염되지 않았고, 1리터당 2000㎎ 이상의 인체에 유익한 각종 성분이 함유된 최고 수질의 광천수요 약수로 알려졌다. 그런데 이따금 이곳을 찾은 한국인 가운데는 옷을 훌훌 벗고 알몸으로 천지에 뛰어들어 기념사진을 찍어대는 얼간이들이 있다고 한다.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보다가 어이없는 광경을 보았다. 돈이면 귀신도 부린다는 황금만능주의가 개방화의 거센 바람을 타고 이 성산 영지까지 몰아닥쳐 백두산과 천지를 밑천 삼아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업종(?)은 두 가지, 하나는 울긋불긋한 색동 치마저고리를 빨래처럼 널어놓고 사진을 찍어주는 것, 또 하나는 아예 천막을 치고 야영을 하며 북한 측에서 방류한 산천어를 그물로 몰래 잡아 관광객들을 상대로 술안주로 팔아먹는 장사였는데 모두가 한 핏줄인 조선족 동포들이어서 더욱 가슴이 쓰렸다.
“얼음이 다 풀리면 모터보트 뱃놀이로 돈벌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조선족자치주 수도인 연길(延吉)에서부터 안내를 맡아준 이민3세 동포 처녀 한옥희(韓玉喜) 양의 말이었다. 백두산은 남동부 일대를 북한이 명승지 제19호로 지정한 데에 이어 80년대에는 자연보호구로 지정했고, 중국정부도 60년대에 인간 및 생물권보호구로 지정했으며, 1980년에는 백두산 전역에 UN에 의해 국제생물보호구로 지정된 바 있다.
꼭 법률적으로 보호받지 않더라도 단군의 자손이라면 건국신화가 서린 민족의 성스러운 영산 백두산에 대해 외경심을 갖고 경건하게 참관함이 백번 천번 옳은 자세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모두가 그런 추태를 부리는 것은 물론 아니다. 연변에 사는 동포들은 대부분 조부모 때인 일제강점기에 조국을 등지고 만주 땅으로 흘러들어온 이들의 자손이다. 이들의 국적은 비록 중국이지만 정신만은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의 후예임을 잊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 우리말과 조상 전래의 풍습을 잃지 않고 있으며, 한결같이 백두산을 정신적 고향으로 여겨 특히 명절 때면 백두산에 오르고 천지 가에 모여 조선춤을 추고 조선노래를 부르며 조국을 향한 그리움을 달랜다고 한다.
천지와 천지를 감싼 연봉을 다시 한 번 둘러보고 하산하는 마음이 무거운 것은 무슨 까닭일까. 아직도 통일을 이루지 못해 우리 땅을 통해 선조들의 혼령이 깃든 민족의 영산을 찾지 못했고 최고봉인 장군봉 정상도 밟지 못한 아쉬움이 너무도 컸기 때문이리라.
또 하나 되풀이하여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 백두산 일대는 한 겨레의 발상지인 신시(神市)요 단군왕검의 개천(開天) 중심지이건만 아직도‘실증주의 사학’이라는 탈을 쓰고 식민사관의 정체를 감춘 얼빠진 사학자들이 많다는 점이다. 이들의 주장 가운데는“도대체‘고조선(古朝鮮)’이니 ‘단군조선(檀君朝鮮)’이라는 국명이 어느 역사책에 나오느냐?”는 헛소리까지 있는 형편이니, 참으로 이 나라의 역사교육, 나아가 나라의 앞날이 걱정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백두산 북쪽 절반과 우리 선조들이 개척한 간도 땅을 중국영토라고 인정하고 싶지 않다. 현재 중국 측 영토인 장백폭포와 소천지 등에 조상대대로 전해 내려온 견우와 직녀, 선녀와 나무꾼의 전설이 서려 있지 않은가. 간도는 일제(日帝)가 제멋대로 만주의 철도부설권과 맞바꾼 탓에 중국에 넘어갔으니 그 조약은 당연히 국제법상 무효인 것이다.
중국이 중국사의 상한선을 천년 이상 끌어올리는 역사개조작업인 단대공정(斷代工程)을 시작한 것은 내가 백두산과 만주 답사를 마치고 돌아온 뒤인 1996년부터, 고구려사와 발해사를 중국 변방사로 편입시키는 동북공정(東北工程)을 시작한 것은 2002년부터였다. 그런데 나는 만주를 답사하면서 곳곳에서 이미 그 조짐을 보았다. 고구려와 발해 유적지 안내판마다 ‘고구려와 발해는 중국의 지방 통치기구였다’느니, ‘고구려와 발해는 중국 북방의 소수민족’이라느니 하는 헛소리로 도배를 해놓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것도 모자라 최근 중국은 ‘백두산은 창바이산(長白山), 창바이산은 중국산’이라고 주장하며 우리 민족의 영산 백두산까지 빼앗아가려는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으니 참으로 속이 터진다. 중국은 ‘장백산공정’을 구체화하기 위해 창바이산 생수와 창바이산 인삼 브랜드를 개발하고, 최근에는 백두산 인근 지역의 학교마다 앞에 창바이산을 붙여 교명까지 바꿨다고 한다. 청소년들의 머릿속에서 백두산을 지워 없애는 대신 창바이산을 주입시키려는 고도의 교활 음흉한 교육방침이다.
중국이 이처럼 백두산을 창바이산으로 둔갑시키려는 저의 역시 동북공정과 마찬가지로 중화패권주의의 발로라고 할 수밖에 없다. 중국이 세상의 중심이고, 주변국들은 모두 오랑캐라는 오만무례한 중화제국주의 사상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한국사의 영역이 압록강 · 두만강 이남에 국한된다’느니, ‘한국사의 뿌리는 신라’라느니, ‘고구려사는 희미한 추억이고 발해는 말갈족의 역사’라는 터무니없는 소리를 하는 얼간망둥이 같은 사학자가 있으니 개탄스럽다. 심지어는 ‘고조선과 고구려사를 중국사 한국사 구분하지 말고 요동사로 부르자’는 덜 떨어진 자도 있다. 여전히 중화제국주의와 일제 식민사관의 마수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이다. 학문에는 국경이 없지만 학자에게는 국적이 있다.
고구려 ․ 발해사에 이어 고조선 ․ 부여사까지 빼앗기고 나면 우리 역사에 무엇이 남겠는가. 극단적인 국수주의는 경계해야 마땅하지만 국가적 자존심과 민족적 주체성까지 망각해서야 될 일인가. 통렬한 역사의 교훈을 잊어서는 안 된다. 국리민복과 부국강병은 외면하고, 역사교육을 홀대하면 망국의 위기는 언제든지 찾아오게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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