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의 생각으로는 20세기의 가장 중대한 사건은 제1차 세계대전이다. 전쟁 자체의 참화도 이루 다 말할 수 없지만 전쟁의 여파가 그 후 100년 동안 세계를 뒤흔들었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 여파는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부처가 세르비아 민족주의자 비밀조직 흑수단(Black Hand)에 의해 암살되었다.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호헨베르크 여공작 조피(Sophie)
저격 현장 - 사라예보 라틴 브리지
저격 현장 - 암살 사건 박물관 앞 차량이 주차된 골목 입구
사라예보 사건의 여파로 7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함으로써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였다. 전쟁의 시간표는 다음과 같다.
6. 28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부처 피살
7. 28 11시 오스트리아 헝가리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
7. 31 러시아가 총동원령 발령
8. 1 독일이 러시아에 선전포고 / 프랑스가 총동원령 발령
8. 2 독일군 룩셈부르크 침입, 룩셈부르크는 저항 포기
8. 2 저녁 독일 대사가 벨기에 외무장관에게 통과 요구 최후 통첩
8. 3 아침 벨기에가 독일의 요구를 거부
8. 3 18시 독일이 프랑스에 선전포고
8. 4 08시 독일군이 벨기에 침입
8. 4 영국이 당일 자정까지 독일군의 벨기에 철수 요구 최후통첩
8. 4 23시 영국이 독일에 선전포고
역사에서는 교전 쌍방을 동맹국과 연합국으로 구분하는데 동맹국은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투르크, 불가리아이며, 연합국은 영국, 프랑스, 러시아 외에 벨기에, 이탈리아, 세르비아, 루마니아, 그리스, 포르투갈, 일본, 미국이었다.
1918년 11월 11일에 독일과 연합국 간에 휴전협정이 체결된데 이어 강화조약 협상을 위한 회담이 1919년 1월 18일부터 파리에서 열렸다. 원래 강화회담이란 교전 쌍방이 참석하여 강화 조건에 관해 협상하는 것을 말하는데 파리회의에는 연합국만 참석해서 연합국끼리 협상했다. 교전 상대국들은 강화회의에 초대받지 못하고 연합국이 일방적으로 결정한 조건에 서명을 강요당했다. 이렇듯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 처리는 출발부터 잘못된 것이었다.
이리하여 4개국과의 강화조약이 순차적으로 체결되었다. 역사에서는 독일과 체결한 베르사유 조약만을 중시하여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후의 체제를 흔히 베르사유 체제라고 부르지만 베르사유 체제에는 아래의 5개 강화조약이 모두 포함된다.
독일 : 베르사유 조약 1919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 : 생제르망 조약 1919년 9월 10일
불가리아 : 느이(Neuilly)조약 1919년 11월 27일
헝가리 : 트리아농 조약 1920년 6월 4일
투르크 : 세브르 조약 1920년 8월 20일
영국, 프랑스, 미국이 주도한 베르사유 체제는 패전국에 대한 철저한 응징을 목표로 했다. 그에 따라 첫째 독일의 무력화, 둘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해체, 셋째 투르크 제국의 식민지화가 실현되었다. 그 결과 인류는 또다시 엄청난 재앙을 겪게 되었다.
독일 무력화 정책은 독일 국민의 반발로 히틀러의 집권을 초래하여 종전 후 20년 만에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해체는 중부유럽에서 격심한 민족 분쟁을 일으켜 제2차 세계대전으로 가는 길을 열었고 20년 후 세르비아 민족 50만 명이 학살당하는 원인이 되었다. 70년 후 1990년대에 유고슬라비아에서 벌어진 처참한 유혈 내전도 베르사유 체제에서 유래하였다. 또한 1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중동지역의 전란이 투르크 제국의 식민지화에서 싹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합국의 입장만을 대변하는 주류역사는 베르사유 체제가 마치 신성불가침의 계율이라도 되는 것처럼 옹호해 왔다. 베르사유 체제를 뒤엎은 히틀러에게 제2차 세계대전 발발의 모든 책임을 전가하고 히틀러는 원래 파괴적인 전쟁을 추구한 정신병자였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제정신을 가지고 역사를 살피면 히틀러의 대외 정책은 침략이 아니라 유린당한 독일의 주권을 회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은 강대국의 지위를 회복하려는 독일과 이를 저지하려는 연합국 사이의 충돌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에 관해서는 이미 상세하게 기술한바 있으므로 두 번째와 세 번째에 관해서 살펴보기로 하겠다.
연합국은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을 해체하고 제국내의 소수민족들을 분리했다. 헝가리에서는 슬로바키아, 루테니아, 크로아티아, 트란실바니아를 분리시켰고 오스트리아에서는 체코, 갈리치아, 부코비나, 슬로베니아, 달마티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분리했다. 동맹국을 배신하고 연합국에 가담한 이탈리아는 티롤과 이스트라를 넘겨받았다. 유럽에서 가장 유서 깊은 합스부르크 제국은 이렇게 산산조각나고 말았다.
합스부르크 제국(1914년)
행정구역
민족분포
통치영역 - 청색은 공동통치
제국 분할
연합국은 오스트리아 - 헝가리를 해체함과 동시에 주변 국가들을 강화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역사와 문화가 전혀 다른 민족들을 한데 묶어 인위적인 국가를 창설했으며 민족별 거주 지역을 무시하고 멋대로 국경선을 설정했다. 체코와 슬로바키아, 루테니아를 통합해서 체코슬로바키아를 창설하고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달마티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세르비아와 통합하여 유고슬라비아를 창설했다. 폴란드인이 거주하는 갈리치아는 신생국 폴란드에게 넘기고 트란실바니아와 부코비나는 루마니아에게 넘겼다.
헝가리의 분할
연합국은 헝가리에서 트란실바니아를 분리하면서 헝가리인이 거주하는 지역까지 루마니아에 넘겨주었다. 더구나 트란실바니아의 북부지방은 헝가리인이 다수를 차지함에도 연합국은 그 지역 전부를 루마니아에 넘겼다. 슬로바키아를 분리하면서도 접경지대의 헝가리인 거주 지역을 슬로바키아에 편입시켰다. 아마도 이들 나라 사이에 반목을 조장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1938년 9월 30일의 뮌헨협정으로 체코슬로바키아의 독일인과 헝가리인 거주 지역이 두 나라에 반환되었다. 주류역사는 이것을 독일과 헝가리의 침략이라고 기술하면서 이를 허용한 체임벌린 수상을 비겁한 유화주의자의 표본이라고 입을 모아 비난한다. 하지만 부당하게 빼앗긴 영토와 국민을 되찾은 일이 어찌 침략일 수 있겠는가?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0년 8월 31일 헝가리는 독일의 지원으로 트란실바니아의 헝가리인 거주 지역을 수복했다. 헝가리가 이렇게 되찾은 영토는 1945년에 패전한 뒤 되돌려주어야 했다.
한편 루마니아는 러시아의 내전을 틈타 러시아 영토인 베사라비아를 합병했다. 베사라비아는 로마제국 시대에 로마인들이 정착한 곳으로서 루마니아인이 거주했으나 19세기에 러시아가 차지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후 1940년 6월 28일 소련은 루마니아로부터 베사라비아를 돌려받고 우크라이나인이 거주하는 부코비나의 북부를 빼앗았다. 1941년 6월 22일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 루마니아는 6월 27일 소련에 선전포고하고 스탈린그라드까지 진격했다.
부다페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