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방은 가볍게 마음은 넉넉하게
박현옥
1)제주도행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는 커다란 굉음을 내며 힘겨운 도움닫기를 하더니 드디어 상공을 향해 날아올랐다. 조금씩 고도를 높이던 비행기가 구름층을 뚫고 올라서자, 발아래로 황홀한 구름바다가 펼쳐졌다. 흐리고 먹먹했던 지상과는 달리 찬란하고도 고요한 또 하나의 세상. 탐진치(貪瞋痴) 삼독을 벗어버리면 마주하게 되는 반야의 세계가 이러할까?
2)새벽 다섯 시, 어제 준비해 둔 김밥, 과일, 과자, 음료수 등을 챙기고 고요한 어둠을 뚫고 호텔을 나섰다. 이번 제주여행은 결혼 35주년 기념일을 맞아 정상을 한 번도 오르지 못한 남편을 위해 한라산 정복을 목표로 계획을 세웠다. 몇 번의 경험 덕분에 가벼운 옷차림을 한 나와는 달리 남편은 나의 잔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짧은 소매 옷부터 패딩 점프까지 가방 가득 옷을 넣었다. 경험자의 여유일까. 걱정과 설렘이 교차하는 그의 표정을 보며 웃음이 났다.
3)성판악 주차장은 이른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한라산 등산에 대한 기대감으로 활기가 넘쳤다. 입구 통제소에서 신분증을 보여주고 신원을 확인한 뒤 드디어 한라산 등반길에 올랐다. 진달래밭 대피소까지 가는 길은 트레킹 코스처럼 완만해 힘들지 않았다. 오히려 아침햇살이 내려앉은 등산로는 고요하고 평화롭기까지 했다. 길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아침 일찍 산책 나온 노루와 눈이 마주쳤다. 낯선 존재에도 당황하지 않고, 여유롭게 노니는 모습이 사람과의 공존에 이미 익숙해진 듯했다.
4)일주일 전 친구가 보내준 사진 속 진달래 대피소를 떠올리며 걸음을 재촉했다. 도착한 그곳에는 여전히 봄의 끝자락을 붙잡고 있는 진달래꽃이 반기고 있었다. 쉽게 올 수 없는 곳이기에, 시들기 시작한 꽃을 보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5)진달래밭 대피소를 지나 산으로 오르는 길은 돌길과 높은 계단으로 이어졌다. 틈틈이 시원한 물로 목도 축이고 간식을 먹으며 휴식도 취해보지만 굴곡 많은 우리네 인생처럼 정상에 오르기는 쉽지 않았다.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과 멀리 눈이 부시도록 푸른 하늘이 무거운 발걸음에 위로가 되어주었다. 수건과 옷이 다 젖도록 땀을 흘린 뒤에야 마침내 한라산 정상을 밟을 수 있었다.
6)백록담을 마주한 그 순간, 고단함보다 뭉클함이 먼저 밀려들었다.. 대기줄에 서서 한시간을 기다려 백록담 표지석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그 한 장의 사진은 단순히 아름다운 풍경을 담아낸다는 의미보다 서른 다섯 해 동안 두 사람이 함께 지켜온 시간의 증명처럼 여겨졌다.
7)한라산 정상에서 먹는 컵라면 맛은 또 하나의 감동이었다. 짭조름한 국물이 몸속 깊이 스며들고, 따뜻함이 피로를 녹여주었다. 해발 4,000미터가 넘는 스위스 융프라우 정상에서 먹던 라면과는 느낌이 달랐다. 융프라우에서 판매가의 10배가 넘는 비싼 가격을 지불하면서까지 먹은 라면이 한국인의 자부심이었다면, 한라산에서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보상 같았다.
8)고단한 몸을 달래기 위해 정상에 놓인 평상 위에 드러누웠다. 마치 방금 누군가 새로 채색해 놓은 듯, 구름 한 점 없는 깨끗한 하늘이 끝없이 펼쳐졌다. 푸른 지붕 아래 누워 있으니 온 세상을 품에 안은 듯 가슴이 벅차올랐다.
9) 통제 시간에 맞춰 하산해야 했기에 마냥 자연의 아름다움에 취해 여유를 부릴 수 만은 없었다. 커피 향과 함께 쌓인 피로를 날려 보내고, 한라산 등정인증서를 받을 기대감으로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출발할 때는 먹거리로 무거웠던 가방이 이제는 텅 비어 가벼워졌고, 발걸음도 덩달아 가벼워졌다.
10)무리가 되었던 걸까. 계단을 내려오던 중 남편이 발 통증을 호소했다. 불편한 걸음으로 걷다 보니 다른 사람들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졌다. 해가 기울고 하산하는 사람들의 발길마저 뜸해지니 불안한 마음이 올라왔다. 바위 위에서 귀여운 다람쥐가 보내는 응원의 시선도 외면한 채 두 사람은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남편의 사업이 어려움에 처했을때도 그랬다. 나는 그저 묵묵히 그의 곁을 지켜주기만 했었다.
11)시커먼 어둠이 산길을 덮기 시작할 무렵에야 우리는 겨우 입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발급기에서 두 사람의 이름이 적힌 한라산 등정 인증서를 받아 들었다. 작은 승리에 하루의 고단함이 눈 녹듯 사르르 녹아내렸다. 그 순간, 손목 워치의 초록색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40,000걸음 걷기 완료! 30.62km를 걸다니, 혹시 걸어서 전국 일주?”
디지털 시계가 전하는 위로에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12)서로의 걸음에 보폭을 맞추며 한라산을 무사히 완주했듯, 우리는 남은 인생길도 그렇게 걸어가게 될 것이다. 다만, 가방은 다시 꾸려야 하지 않을까. 욕심은 조금 내려놓고 대신 그 빈자리는 넉넉한 마음으로 채워 가벼운 여행길이 되도록 해야 하리라.
첫댓글 제주도 여행, 한라산 백록담까지 등반하셨다니 대단합니다. 4만 걸음 30여 km를 걸었다니, 놀라울 일입니다.
나는 아직 한라산 백록담 정상까지 못 올라갔습니다. 중턱까지 치로 여행갔지, 올라가지는 않았는데, 이 글을 보면서 한번 올라가 볼 마음은 나는데,실행은 힘들겠지요?
기회도 오기 힘들것익고, 설사 간다 하여도 이 나이에 30키로 이상을 걷기가 되겠는지요?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_()_
'무거운 가방과 발 통증, 그리고 그의 옆을 지켜주기만 하는 나.'
옛날 한라산 등정을 하던 때가 생각나네요.
잘 읽었습니다.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