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희(金正喜 1786~1856)
자는 원춘. 호는 완당, 추사 등 수백가지에 이른다.
조선 후기인 1786년 충청남도 예산에서
병조 판서 김노경의 아들로 태어나 스물네살 되던 해에
청나라 연경(燕京)에 가서 당시 이름난 학자인 완원,
옹방강 등에게 금석학과 실학을 배우고 돌아왔다.
박제가의 제자이기도 한 그는
한때 규장각 시교·성균관 대사성을 거쳐 병조참판에까지
이르렀으나, 말년에는 옥사에 연루되어 제주도와 함경도
북청에서 12년 동안 귀양살이를 했다.
유배지에서 만난 선승들과의 교류를 통해 선불교에도
조예를 쌓았으며, 학문에서는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주
장하였고, 서예에서는 독특한 추사체(秋史體)를 대성시
켰으며, 특히 예서 ·행서에 새 경지를 이룩하였다.
또한 문인화는 당대 최고의 성취로 평가받아 그림 가운데
아래 작품 '세한도(歲寒圖)'는 현재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세한도'는 김정희가 59세 때인 1844년 제주도 유배 당시
지위와 권력을 잃어버렸는데도 사제간의 의리를 저버리지
않고 그를 찾아온 제자인 역관 이상적(李尙迪, 1804-1865)
의 인품을 소나무와 잣나무에 비유하여 그려준 것이다.
'날이 차가워진 다음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는 <논어>의 한 구절을 빌어 '세한도(歲寒圖)'
라는 말을 쓰게 된 것이다.
1844년 완당(추사) 나이 59세 때 제주도에
유배온 지 5년이 되었을 때 완당의 생애 최
고의 명작으로 꼽히는 [세한도]를 그렸다.
[세한도]는 화제에 씌어 있듯이 완당이 그
의 제자인 우선 이상적에게 그려준 것이다.
이상적은 스승 완당이 유배되어 있는 동안
정성을 다해 연경에서 구해온 책을 보내 드렸다.
완당이 [세한도]를 그려 이상적의 따뜻한 뜻과 정에
답하게된 결정적인 계기는 제주도 생활 4년째인
1843년에 이상적이 계복桂馥의 <만학집晩學集>과
운경운의 <대운산방문고大雲山房文>를 북경
에서 구해 제주도로 보내준 것이었다.
<만학집>의 저자인 계복은 완당이 옹방강,
완원과 교류할 때 익히 알고 그의 학예를 흠모해온
터였다.운경에 대해서도 완당은 일찍부터 알고 있
었지만 이번에 처음으로 그의 글을 대하게 된 것이
었다. 이것만으로도 절해고도에서 큰 위안이 되고도
남음이 있었다.그런데 이듬해(1844)에 이상적은 또
하우경賀?耕이 편찬한 <황조경세문편皇朝
經世文編>이라는 책을 보내주었다.이 책은 자그마
치 총 120권, 79책이었으니 양으로도 방대했다.
이상적의 이런 정성에 완당은 감격하고 또 감격했다.
그리하여 완당은 이상적의 변함없는 사제간의 정에
감사하는 뜻으로 <세한도>를 그리고 그
발문에 이렇게 적었다.
지난해에는 <만학>과 <대운> 두 문집을
보내주더니 올해에는 우경의 <문편>을 보내왔도다.
이는 모두 세상에 흔히 있는 것도 아니고 천만리 먼
곳으로부터 사와야 하며 그것도 여러 해가 걸려야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쉽게 단번에 손에 넣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세상은 흐르는 물살
처럼 오로지 권세와 이익에만 수없이 찾아가서 부
탁하는 것이 상례인데 그대는 많은 고생을 하여
겨우 손에 넣은 그 책들을 권세가에게 기증하지
않고 바다 바깥에있는 초췌하고 초라한
나에게 보내주었도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날이 차가워 다른 나무들이 시든 뒤에야 비로소
소나무[松柏]가 여전히 푸르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고 했는데... 지금 그대와 나의 관계는 전이라고 더한
것도 아니요 후라고 줄어든 것도 아니다...
아! 쓸쓸한 이 마음이여!
완당노인이 쓰다완당으로부터 뜻하지 않게 이 천하의 명작을
받은 이상적은, 연경으로 떠나려던 참에 이
<세한도>를 받고는 감격하여 완당에게 정
중하게 깊은 감사의 편지를 보냈다.
삼가 <세한도> 한폭을 받아 읽으니 눈물이
흘러내림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너무나 분
수에 넘치게 칭찬해주셨으며 감개가 진실되고
절절하였습니다. 아아! 제가 어떤 사람이기에
도도히 흐르는 세파 속에서 권세와 이익을 따
르지 않고 초연히 빠져나올수 있겠습니까?
다만 구구한 작은 마음으로 스스로 하지 않을
수없어 그렇게 했을 뿐입니다....
이번 걸음에 이 그림을 갖고 연경에 가서 표구하여 옛
지기분들에게 보이고 시문詩文을 청할까 하옵니다...
<세한도>는 실경산수화가 아닌 완당의 마음속의
이미지를 그린 것으로, 그림에 서려 있는 격조와 문
기文氣가 생명이다.구도만으로 본다면 집과 나무를
소략히 배치한 것은 전형적인 예찬의 법이다. 그러나
필치는 완당 특유의 예서 쓰는 법으로 고졸미를 한껏
풍기고 있음에 이 그림의 매력이 있다.여기에 [세한도]
라는 화제畵題 글씨와 <우선시상藕船是賞>이라는 낙관
이 그림의 구도에 무게와 안정감을 주고 있다. 그러나
이 그림에 붙은 아름답고 강인한 추사체의 발문과 소
산한 그림의 어울림이 감격적이다. 완당의 해서체의
대표작으로 에서의 기미가 남아 있는 듯한 이 글씨는
울림이 강하면서도 엄정한 질서를 유지하고 있어서
심금을 울리는 강도가 아주 진하다.
김정희(金正喜 1786~1856)
자는 원춘. 호는 완당, 추사 등 수백가지에 이른다.
조선 후기인 1786년 충청남도 예산에서
병조 판서 김노경의 아들로 태어나 스물네살 되던 해에
청나라 연경(燕京)에 가서 당시 이름난 학자인 완원,
옹방강 등에게 금석학과 실학을 배우고 돌아왔다.
박제가의 제자이기도 한 그는
한때 규장각 시교·성균관 대사성을 거쳐 병조참판에까지
이르렀으나, 말년에는 옥사에 연루되어 제주도와 함경도
북청에서 12년 동안 귀양살이를 했다.
유배지에서 만난 선승들과의 교류를 통해 선불교에도
조예를 쌓았으며, 학문에서는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주
장하였고, 서예에서는 독특한 추사체(秋史體)를 대성시
켰으며, 특히 예서 ·행서에 새 경지를 이룩하였다.
또한 문인화는 당대 최고의 성취로 평가받아 그림 가운데
아래 작품 '세한도(歲寒圖)'는 현재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세한도'는 김정희가 59세 때인 1844년 제주도 유배 당시
지위와 권력을 잃어버렸는데도 사제간의 의리를 저버리지
않고 그를 찾아온 제자인 역관 이상적(李尙迪, 1804-1865)
의 인품을 소나무와 잣나무에 비유하여 그려준 것이다.
'날이 차가워진 다음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는 <논어>의 한 구절을 빌어 '세한도(歲寒圖)'
라는 말을 쓰게 된 것이다.
1844년 완당(추사) 나이 59세 때 제주도에
유배온 지 5년이 되었을 때 완당의 생애 최
고의 명작으로 꼽히는 [세한도]를 그렸다.
[세한도]는 화제에 씌어 있듯이 완당이 그
의 제자인 우선 이상적에게 그려준 것이다.
이상적은 스승 완당이 유배되어 있는 동안
정성을 다해 연경에서 구해온 책을 보내 드렸다.
완당이 [세한도]를 그려 이상적의 따뜻한 뜻과 정에
답하게된 결정적인 계기는 제주도 생활 4년째인
1843년에 이상적이 계복桂馥의 <만학집晩學集>과
운경운의 <대운산방문고大雲山房文>를 북경
에서 구해 제주도로 보내준 것이었다.
<만학집>의 저자인 계복은 완당이 옹방강,
완원과 교류할 때 익히 알고 그의 학예를 흠모해온
터였다.운경에 대해서도 완당은 일찍부터 알고 있
었지만 이번에 처음으로 그의 글을 대하게 된 것이
었다. 이것만으로도 절해고도에서 큰 위안이 되고도
남음이 있었다.그런데 이듬해(1844)에 이상적은 또
하우경賀?耕이 편찬한 <황조경세문편皇朝
經世文編>이라는 책을 보내주었다.이 책은 자그마
치 총 120권, 79책이었으니 양으로도 방대했다.
이상적의 이런 정성에 완당은 감격하고 또 감격했다.
그리하여 완당은 이상적의 변함없는 사제간의 정에
감사하는 뜻으로 <세한도>를 그리고 그
발문에 이렇게 적었다.
지난해에는 <만학>과 <대운> 두 문집을
보내주더니 올해에는 우경의 <문편>을 보내왔도다.
이는 모두 세상에 흔히 있는 것도 아니고 천만리 먼
곳으로부터 사와야 하며 그것도 여러 해가 걸려야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쉽게 단번에 손에 넣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세상은 흐르는 물살
처럼 오로지 권세와 이익에만 수없이 찾아가서 부
탁하는 것이 상례인데 그대는 많은 고생을 하여
겨우 손에 넣은 그 책들을 권세가에게 기증하지
않고 바다 바깥에있는 초췌하고 초라한
나에게 보내주었도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날이 차가워 다른 나무들이 시든 뒤에야 비로소
소나무[松柏]가 여전히 푸르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고 했는데... 지금 그대와 나의 관계는 전이라고 더한
것도 아니요 후라고 줄어든 것도 아니다...
아! 쓸쓸한 이 마음이여!
완당노인이 쓰다완당으로부터 뜻하지 않게 이 천하의 명작을
받은 이상적은, 연경으로 떠나려던 참에 이
<세한도>를 받고는 감격하여 완당에게 정
중하게 깊은 감사의 편지를 보냈다.
삼가 <세한도> 한폭을 받아 읽으니 눈물이
흘러내림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너무나 분
수에 넘치게 칭찬해주셨으며 감개가 진실되고
절절하였습니다. 아아! 제가 어떤 사람이기에
도도히 흐르는 세파 속에서 권세와 이익을 따
르지 않고 초연히 빠져나올수 있겠습니까?
다만 구구한 작은 마음으로 스스로 하지 않을
수없어 그렇게 했을 뿐입니다....
이번 걸음에 이 그림을 갖고 연경에 가서 표구하여 옛
지기분들에게 보이고 시문詩文을 청할까 하옵니다...
<세한도>는 실경산수화가 아닌 완당의 마음속의
이미지를 그린 것으로, 그림에 서려 있는 격조와 문
기文氣가 생명이다.구도만으로 본다면 집과 나무를
소략히 배치한 것은 전형적인 예찬의 법이다. 그러나
필치는 완당 특유의 예서 쓰는 법으로 고졸미를 한껏
풍기고 있음에 이 그림의 매력이 있다.여기에 [세한도]
라는 화제畵題 글씨와 <우선시상藕船是賞>이라는 낙관
이 그림의 구도에 무게와 안정감을 주고 있다. 그러나
이 그림에 붙은 아름답고 강인한 추사체의 발문과 소
산한 그림의 어울림이 감격적이다. 완당의 해서체의
대표작으로 에서의 기미가 남아 있는 듯한 이 글씨는
울림이 강하면서도 엄정한 질서를 유지하고 있어서
심금을 울리는 강도가 아주 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