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천면 덕평리에 있는 충효삼려입니다.충효삼려현판은 당시 지역국회의원을 지낸 동헌 김종호가 썼습니다.
덕평리에 위치한 충효삼문은 일단 찾기가 어렵다,
덕평교를 지나 10여미터 지난 후 우측으로 산으로 오르는 길(?)이 있다.
이 곳을 이용해야 하는데 그냥 지나치기가 쉽다.미리 장소를 위성사진등으로 확인하여 길을 나섰기를 망정이지 그렇치 않으면 찾을수가 없다.
충효삼문을 보고 산 정상으로 오르면 김시약장군과 두아들의 초혼묘를 볼수가 있다.
정려문에서 진입한곳으로 다시 돌아와 산으로 난길을 따라 올라가다보면 과수원이 나오며 과수원을 끼고 산으로 오르다 보면 김시약장군과 두아들의 초혼묘를 볼수가 있습니다
김시약장군과 두아들의 나라를 향한 마음을 각자한 현판이 걸려있습니다
김시약은 조선 후기 정묘호란 때 절개를 지킨(節臣) 사람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자(字)는 기오(箕吾)이고 청주 출신이다. 비안현감(比安縣監) 김인갑(金仁甲)의 아들이며, 진주목사(晋州牧使) 김시민(金時敏)의 종제이다.동부승지(同副承旨)를 역임하고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추증(追贈)되었다.
서애(西崖) 유성룡(柳成龍)의 천거로 훈련원(訓練院) 첨정(僉正)을 거쳐 만호(萬戶)·첨사(僉使) 등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 때는 1596년(선조 29) 괴산(槐山) 선봉장으로 창의병(倡義兵)을 거느리고 각지에서 왜적을 격파하고 관찰사(觀察使)의 천거를 받아 별장(別將)에 발탁되었다. 이듬해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관군과 의병을 인솔하고 창원, 옥천에서 왜군 24명을 사살하였다.
인조반정 후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고, 이듬해 1624년 의주부윤(義州府尹)이 되었다가 다시 창성부첨절제사(昌城府僉節制使)가 되었다. 1627년(인조 5)정묘호란에 성이 함락되고 그의 두 아들 김환(金桓), 김규(金糾)와 함께 적에게 사로잡혀 굴하지 않고 죽음을 당하였다.
충효삼려안에는 3개의 편액이 걸려있다.
편액에는 시충숙공위신봉상일충집심결단일숙 증가선대부병조참판행창성부사김시약장군충효절의정려(諡忠肅公危身奉上日忠執心決斷日肅 贈嘉善大夫兵曹參判行昌城府使金時若將軍忠孝節義旌閭)라고 쓰인 현판이 걸려있다.
어찌 오랑캐들이 나를 회유하려 하느냐?
김시약장군의 추상같은 호령이 적진안을 맴돌았다.
많은 회유와 협박에도 굴하지 않는 김시약장군은 육시를 당하고 두 아들또한 참형에 처해졌다고 하니 그 애통함이 하늘을 찔렀다.
증사재감첨정안동김공휘환효충열사정려(贈司宰監僉正安東金公諱桓孝忠烈士旌閭)라고 적혀있다.김환은 김시약의 아들입니다.
증군기사첨정안동김공휘규효충열사정려(贈軍器寺僉正安東金公諱糺孝忠烈士旌閭)라고 적혀있는 김시약의 아들 김규의 정려기가 걸려있습니다
정려기는 2003년 현양회장 이춘우와 유도회장 박온섭이 썼습니다.
정려문 옆으로는 근간에 세운 현충비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덕평리는 청천면의 북부에 위치한 농촌마을이다. 자연마을로는 명덕, 죽말, 새터 등이 있다. 명덕은 마을 뒷산이 신선이 춤을 추는 형상을 하고 있고 앞들이 넓어 신선의 덕을 받을수 있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죽말은 산수골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전에 대나무 숲이 있었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새터는 광복후 터가 좋다하여 한학자이며 지사인 이재동씨가 터를 잡은후 10여가구가 새집을 짓고 살았다 하여 붙은 이름으로, 신평이라고도 한다. 덕평이라는 명칭은 명덕과 신평의 이름을 따서 생겼다.
첫댓글 시험치는 역사공부는 종이만 들여다 보며 열심히 하고 시험안치는 역사공부는 눈으로 술술 따라 다니지만 그냥 좋습니다..ㅎㅎㅎ
많이 반갑습니다 송이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