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8.16.연중 제20주일
이사56,1.6-7 로마11,13-15.29-32 마태15,21-28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신부님
믿음의 승리, 믿음의 전사
-사랑, 한결같고 항구한 기도와 믿음-
인간이 재앙이구나! 탄식처럼 흘러나온 말입니다. 작금의 현실에 웬지 모를 불길함을 느낍니다.
코로나19 펜데믹 감염병과 긴 장마와 홍수로 인한 피해 때문입니다. 이건 장마가 아니라 기후변화때문이라 합니다.
참으로 하나뿐인 공동의 집인 지구는 물로 인류생존의 위기의 시대요 신호처럼 생각됩니다.
말그대로 전대미문의 사태가 발생한 것입니다. 마스크를 항상 착용해야 하니 함께의 놀이도, 축제의 노래도, 운동도 사라졌습니다.
사제서품후 31년만에 이렇게 노래하지 않고 읽기는 처음입니다.
방금 읽은 화답송 후렴, “창생이 하느님을 높이 기리게 하소서” 노래할 때는 얼마나 흥겹고 고양되는 느낌이었는지 생각납니다.
인간은 재앙뿐인가! 아닙니다. 인간은 희망이요 선물이요 보물입니다.
우리 수도공동체의 수도형제들이 바로 그 생생한 증거입니다. 수도원의 반려견들을 잘 돌보는 수도형제에게 저는 지체없이 문보물이요 문천사요 반려견의 수호성인이라 극찬합니다.
아니 이 미사에 참석한 형제자매님들 한분한분 잘 들여다보면 모두가 희망이요 선물이요 보물입니다.
세상에 사람보다 귀한 희망도, 선물도, 보물도 없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희망처럼, 하느님의 선물처럼, 하느님의 보물처럼 살아야 합니다.
이래야 하느님의 참 자녀가, 참 사람이 되어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의 성소요 권리요 의무입니다. 이렇게 살라고 세상에 파견된 우리들입니다.
엊그제 저는 참 귀한 선물을 받았습니다. 부채를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를 살라 받은 손부채 선물입니다. 후에 보낸 분을 알고 더욱 반갑고 기뻤습니다.
부채에 제 졸저의 제목 캘리그래피 소박한 붓글씨체, “사랑밖엔 길이 없네-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가 명필이었습니다.
앞서 받은 자매의 메시지에 답글, 둘을 그대로 소개합니다.
-“신부님, 사랑밖엔 길이 없네 넘 악필惡筆이죠. 담엔 더 연습해서 멋지게 성공작 보여드릴게요.”
“아, 자매님이 선물한 부채네요! 소박한 필체가 명필名筆입니다. 적당한 때 만나요!”
제 눈엔 분명 악필이 아니라 명필이었습니다. 하여 집무실 벽 그림 위에 걸어 놓았습니다.
온통 프린터기로 출력한 인쇄체 활자들 속에 친필 글씨를 구경한지 참 오래 되었습니다.
정과 마음이 고스란히 살아 배어 있는 옛 친필 편지들을 대하면 각자 고유의 보물같은 친필의 글자들이 많이 보고 싶어집니다.
“군고구마 팝니다!” 라는 장사하는 분의 소박한 살아 있는 글씨체가 명필이라 찬탄했던 고 신영복 선생의 말도 생각납니다.
어떻게 하느님의 희망으로, 하느님의 선물로, 하느님의 보물로 살 수 있을까요?
믿음의 전사로, 주님의 전사로 사는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말마디이자 오늘 강론의 제목입니다. 죽어야 제대인 죽는 그날까지 평생 ‘영원한 현역’의 ‘믿음의 전사’로 사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께서 ‘가나안 여자의 믿음’의 예화를 통해,
제1독서 이사야 예언자가 ‘이방인들에게 내린 약속 말씀’을 통해,
또 제2독서의 바오로 사도가 ‘다른 민족들의 구원에 대한 말씀’이 답을 줍니다.
믿음의 전사로 영적 승리의 삶을 살기 위한 참 좋은 무기로 무장하여 영적 전쟁에 임하면 됩니다.
누구나 지닐 수 있고 지녀야 하는 세 가지 영적 무기, 사랑과 기도와 믿음을 소개합니다.
첫째,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 누구나 마음 깊은 중심에 심어주신 사랑입니다.
모든 인류가 깊이 보면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한 인류가족입니다. 끊임없이 성장 성숙해야 하는 사랑입니다.
무엇보다 우리를 지어내신 창조주 하느님께 대한 사랑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예수님처럼 하느님을 닮아 공정과 정의를 실천합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전인류에게 주시는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입니다.
“너희는 공정을 지키고 정의를 실천하여라. 나의 구원이 가까이 왔고 나의 의로움이 곧 드러나리라.”
“주님을 섬기고 주님의 이름을 사랑하며 주님의 종이 되려고 주님을 따르는 이방인들,
나의 계약을 준수하는 모든 이들, 나는 그들을 나의 거룩한 산으로 인도하고 나에게 기도하는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하리라.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리리라.”
참 놀랍게도 가톨릭 교회를 통해, 또 오늘 하느님의 거룩한 산 불암산 기슭에 위치한 기도의 집 요셉 수도원 성전 미사를 통해 그대로 실현된 예언입니다.
바로 이런 하느님 사랑의 생생한 증거가 오늘 미사에 참석한 형제자매들이요, 복음의 이교인 가나안 여자입니다.
주님께 간청하는 가나안 여자의 마음 깊이에는 하느님 사랑이 불타고 있음을 봅니다.
둘째, 한결같고 항구한 기도와 믿음입니다.
기도와 믿음은 함께 갑니다. 가나안 여자의 기도는 그대로 믿음의 표현입니다. 하느님 사랑은 기도로 표출되기 마련입니다.
바로 기도는 테크닉이 아니라 하느님과 사랑의 소통입니다. 기도해야 삽니다.
말씀이 영혼의 밥이라면 기도는 영혼의 호흡입니다.
밥먹고 숨쉰다 하여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실천하고 기도할 때 참으로 살아있다 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자기와의 싸움이자 주님과의 싸움입니다. 우리는 기도의 전사이기도 합니다.
가나안 여자야 말로 기도의 전사, 믿음의 전사의 모범입니다. 참으로 탄력좋은, 백절불굴의 기도와 믿음입니다.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가난한 우리가 마지막으로 바칠 꼭 하나의 기도를 꼽으라면 자비송 하나뿐입니다.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이 기도 하나만 끊임없이 바쳐도 구원입니다. 이에 근거한 ‘예수님 이름을 부르는 기도’입니다.
제자들의 냉대와 예수님의 거절에도 결코 포기할 줄 모르는 가나안 여자의 거듭된 기도입니다.
“주님, 저를 도와 주십시오.”
참 좋은 기도입니다. 사정이 절실하고 간절하면 군더더기 말들은 사라지고 기도는 짧고 순수해집니다. 예수님의 반응은 충격적이고 모욕적입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주는 것은 좋지 않다.”
자존심이 상해 포기했다면 가나안 여자는 자기와의 싸움에 지는 것인데 그는 유혹에 빠지지 않고 즉시 자기비움의 절정의 겸손한 기도로 되받아 칩니다.
다음 문답은 영원히 기억되어야 할 참 감동적인 오늘 복음의 절정입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님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정말 가나안 여자의 탄력좋은 기도요 믿음입니다. 여자는 약해도 어머니는 얼마나 강한지 깨닫습니다.
얼마나 마음 깊이 주님께 희망을 두고 주님을 사랑하고 신뢰한 가나안 여자였던지 깨닫습니다.
탓할 것은 주님이 아니라 내 기도와 믿음 부족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주님께 깊이 뿌리내린 신망애信望愛의 가나안 여자의 영혼이었기에 지칠줄 모르는 탄력좋은 기도와 믿음임을 깨닫습니다.
마치 누르면 즉시 튀어나오는 탄력좋은 용수철을 연상케 하는 기도와 믿음입니다.
몸의 탄력은 떨어져도 마음의 탄력이,
육신의 탄력이 떨어져도 영혼의 탄력이,
믿음의 탄력이 떨어져선 안됩니다.
하여 수도자들이 날마다, 평생, 규칙적으로 끊임없이 바치는 하느님 찬미와 감사의 시편과 미사의 공동전례기도입니다.
이렇게 기도하니 수도원은 ‘늪의 수렁’이 되지 않고 ‘숲의 쉼터’가 되는 것입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습니다. 예수님을 감동시킨 믿음과 더불어 치유의 구원입니다.
예수님과의 영적전투에서 가나안 여자의 KO승입니다. 마치 예수님의 기쁨에 넘친 항복선언처럼 들립니다.
가나안 여자는 자기와의 싸움에 이겼고 주님과의 싸움에 이겼습니다.
참으로 가나안 여자의 유쾌하고 상쾌하고 통쾌한 기도의 승리, 믿음의 승리입니다.
흡사 믿음의 여장군처럼 느껴지는 가나안 여자입니다.
사실 저는 제 주변에서 가나안 여자에 필적하는 믿음의 여장군같은 자매들을 자주 만나면서 감동할 때가 한 두번이 아닙니다.
하여 때로 이분들의 모습을 사진에 담아 나누기도 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