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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올레 12코스는
무릉리 농산물 유통, 판매시설 무릉외갓집에서 출발,
성 김대건신부 표착 기념관까지 이어지는 17.5킬로미터로
난이도는 '중'이다.
13코스 시작점 표지석에서
12코스 역방향으로 계속 걸음을 옮긴다
해안도로가 급하게 꺽어진다.
마치 얕은 바다에
사람 둘이 누워있는 형상이다.
'차귀도'와 '와도'다.
급커브를 돌아
앞에 독특한 건물이 보인다.
상륜부에 돌하르방을 얹고
원형전탑으로 단을 지어 입구 양쪽에 세워놓았다.
아직도 조성작업이 진행중 인듯
불도저같은 건설기계가 보인다.
내부 오른쪽에는
토목작업을 마친 공터도 보인다.
아무런 안내가 없다.
안으로 들어서면 지역적 특색이 묻어있는
화산 쇄석으로 건물형태를 만들었으나
외부 전망 옥상 2곳을 제외하고는 내부공간이 없다.
썩 큰 규모는 아니지만
인근을 지나는 이들에게는 또 다른 볼거리가 될 것 같다.
용수포구 방파제가 길게뻗어
파도를 가로막고 있다.
뒷쪽 전망 옥상에서 바라 본
내부 풍경이다.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여러 곳이다.
나무, 돌로 만들어진 벤치도 놓여있다.
남마메리카 고대 건축물같은 느낌이다.
건물 앞쪽 해안에 놓인
용수마을 방사탑 2호다.
예전 주민들이 고기를 잡으러 나갔다가 사고를 당하거나
신원을 알 수 없는 시신들이 자주 떠밀려 오자
이 탑을 세웠다고 한다.
잠시 해안도로를 따라가던 올레가
이내 해안으로 난 들길을 안내한다.
이번 여행 중 개인적으로 느낀
가장 환상적인 구간 중 한 곳이다.
당산봉 능선이 바다와 맞닿는 곳,
차귀도 유람선이 있는 고산마을 차귀도포구다.
화창한 날씨, 푸른 바다, 건너 길게 누운 섬이 있다.
완만하게 이어지는 들판과 해식 절벽 위 생이기정으로
시원한 바다전망 약 2킬로미터 이어진다.
절벽 위 벤치에
덩치 큰 골든리트리버와 동행한 남자가
절경에 취한 모습이다.
당산봉 일대 해안은
세계지질공원 제주도 수월봉지역에 속해있다.
지구과학적 특징과 아름다운 경관을 가진 지역을 보호하고,
교육과 관광에 활용하는 프로그램으로
유네스코에서 인증, 지정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제주도가
유일하게 세계지질공원으로 인증받았다.
4년 단위 재평가를 받도록 하고있는데
2019년 5월 인증에 성공하였다.
절벽 아래 구멍이 보인다.
바닥을 투영한 물빛이 시원하다.
해안으로 내려갈 수 있을까?
밑으로 향하는 길 흔적이 보여
크게 힘들이지 않고 내려선다.
바위에 난 구멍이 신기하다.
지속적인 화산활동이 만든 지층이다.
마그마가 물을 만나 폭발적으로 분출하며
화산재를 분출하는데
그 화산재가 켜켜이 쌓이며 층을 이루었다.
다시 올라와 들길을 따라간다.
지나온 길을 돌아본다.
여건이 된다면 자주 찾고 싶은 곳이다.
생이기정으로 올라선다.
'생이'는 '새'를,
'기정'은 '절벽'을 뜻하는 제주도 방언이다.
'새가 사는 절벽'을 의미한다.
겨울철새의 낙원으로
가마우지, 재갈매기, 갈매기가 떼지어 산다.
절벽 위 능선을 따라 간다.
오른쪽 차귀도와 왼쪽 와섬이
매번 다른 모습으로 눈길을 잡는다.
왼쪽 보이는 봉우리가 당산봉이다.
올레가 당산봉으로 이어지길 기대한다.
마치 하나처럼 보이던 섬이
몇 개씩 갈라져 부속섬 군을 드러낸다.
차귀도에는 1970년대 말까지 7가구가 살면서
보리, 콩, 참외, 수박 등 농사를 지었으나
현재는 무인도로 남아있다.
대나무가 많아 대섬, 죽도로 불리웠다.
옛날 중국 송나라 시대,
고려국의 지세를 보던 지관 호종단이
탐라에 걸출한 인물이 태어나 중국을 위협할 것으로 봤다.
황제의 명을 받아 탐라에 도착한 호종단은
제주도 전역을 다니며 혈을 끊는다.
임무를 마치고 중국으로 돌아가던 배가
한라산신의 노여움으로
이 곳에서 풍랑을 만나 침몰해 결국 돌아가지 못했다.
'돌아가는 것을 차단했다',하여 차귀도라고 불렀다.
고려조 호종단이라는 귀화한 송나라 사람 기록이 있다.
'송나라 복주사람으로 태학에 입학하여 상사생이 되고,
뒤에 저장성에 있다가 상선을 타고 고려에 들어와 귀화하였다.
예종의 후대를 받아 한림원에 발탁되고, 좌정언을 거쳐,
기거랑으로 『서경』의 무일편을 강독하였다
보문각대제를 거쳐 기거사인으로 궁궐에 난입한
척준경의 군사를 타일러 무기를 버리게 하였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차귀도는 세계지질공원 수월봉지구에 속하며
무인도지만 현재 유람선이 왕복하여 관람 가능한 섬이다.
다시 능선을 따라간다.
생이기정 제일 높은 봉우리에
쉼터, 의자가 놓여있다.
차귀도포구 방파제가
와섬으로 길게 뻗다가 멈췄다.
또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바다로 길게 뻗은 수월봉이 보인다.
봉우리를 내려간다.
당산봉 봉수대터 인근 갈림길이다.
왼쪽으로 당산봉 올라가는 길이 보인다.
당산봉 원래 이름은 당오름이었다.
옛날 뱀을 신으로 모시던 신당이 있었는데
뱀신을 사귀라고 불렀다.
이후 사귀가 와전되어 차귀가 되면서
차귀오름이라고도 불렀다.
아쉽게도 올레는
언덕 너머로 방향을 표시하고 있다.
언덕을 내려간다.
차귀도가 얌전해졌다.
방금 올랐다 내려온 생이기정이다.
1977년 영화 '이어도'를 촬영한 곳,
표지동판이다.
두 섬이 하나가 되었다.
수월봉 가는 길이다.
엉알길이라는 이름이 있다.
'엉'은 '절벽'을,
'알'은 '아래를 뜻하는 제주도 사투리로
절벽 아래 길이라는 뜻이란다.
낙석위험이 있어
탐방로와 낙석주의길로 나뉘어졌다.
하지만 오가는 사람들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
주상절리 상부 모습을 보이는 해안이다.
액체 상태인 뜨거운 용암이
고체 암석으로 굳으면서 부피가 줄어들면서 형성된다.
육각형 형태로 갈라진 모양이
거북등을 닮았다하여 거북등절리라고 한다.
수월봉 화산재 지층이 곳곳에 드러나있다.
화산재 지층 사이로 물이 떨어진다.
해언절벽을 통과한 빗물이
화산재 지층 아래 불투수성 진흙을 통과하지 못하고
흘러내리는 것이다.
전설에 의하면
어머니 병치유를 위해 약초를 찾아 절벽을 오르다
누이 수월이가 떨어져 죽자
동생 녹고도 슬픔에 열 이레동안 눈물을 흘리다 죽고 만다.
그 후 사람들은 수월봉 절벽에서 떨어지는 물을
'녹고의 눈물'이라고 불렀고
남매의 효심을 기려 '녹고물오름' 혹은 '수월봉'이라 불렀다.
전기자전거를 탄 사람들이
가끔 오간다.
수월봉 가는 길에 전기자전거 대여소가 있다.
태평양전쟁 당시 제주도 전역에 만들어진 군사시설 중
갱도진지가 있던 곳이다.
지금이야 막아놓았지만
백 이십여 곳에 만들어진 갱도와 연결되었을 게다.
연합군이 진입해 올 경우
바다로 직접 발진하여 적군 전함에 부딪히는 자살특공용 보트,
탄약이 보관되어 있던 곳이다.
수월봉 화산재 지층이 잘 드러나 있다.
약 일만 팔천년 전, 화산활동에 의해
뜨거운 마그마가 차가운 물을 만나면서 폭발적으로 분출한 화산재가
떨어져 쌓이면서 만든 화산재 층이다.
수월봉 일대를 뒤덮었던 화산재는
딱딱한 용암에 비해 식물 생육환경에 좋은 기름진 토양이 되었고
신석기인들이 정착할 수 있는 터전이 되었다.
수월봉이 양쪽으로 끊어졌다.
일부러 길을 내지는 않았고
끊어진 곳을 포장한 것으로 보인다.
올레가 수월봉 정상부로 올라간다.
전망대에 올라보지만 특별한 경관은 없다.
언덕을 오르며 걸어왔던 길을 돌아본다.
차귀도와 와섬이 온전히 한 몸이 되었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리고
소형 비행체가 절벽위를 날아다닌다.
마침 차에서 기기를 꺼내는 이가 있어
모형을 담는다.
'무동력 헹글라이더'라고 했던가?
날씬한 생김만큼 공기의 저항이 없는지
바닷바람에 제법 거셌는데도 자유자재로 비행한다.
해발 77미터 수월봉 정상에 있는 정자와
오른쪽으로 고산기상대 기상레이져가 보인다.
제주도(지역), 국가, 세계지질공원을 증명하는
동판이 나란히 세워져 있다.
해안 절벽을 따라 잘 드러난
화산쇄설암 층에서 관찰되는 다양한 화산퇴적구조는
화산학 연구의 교과서 역할을 하고 있단다.
수월봉 정상에서 기념 사진 한 잔을 담는다.
고산 기상대 기상 레이더가 보인다.
정상 아래 '수월봉 영산비'를 세워놓았다.
기상청 고산기상대 건물과 구형 레이더가 보인다.
고산기상대 앞으로 언덕을 내려간다.
높지 않은 봉우리,
이내 해안도로에 닿는다.
바다풍경을 보면서 한동안 해안도로를 따라간다.
올레길 이정표가 한동안 안보여
스마트폰 지도를 확인하니 접어드는 길을 지나쳤다.
돌아갈까 하다가 지나친 거리가 짧지않아
해안도로를 벗어나 안쪽으로 접어든다.
다시 올레길과 합류한다.
뒤돌아 지나온 길을 돌아본다.
갈림길에서 오른쪽 시멘트 포장도로로 걸어왔다.
수월봉 기상레이더가 아득하게 보인다.
계속 아스팔트 포장도로를 따라간다.
깨끗하지는 않지만 천에
흐르는 물을 모아놓은 저수지가 있다.
오른쪽으로 빠져
들판을 지나 마을길로 접어든다.
올레는 다시 해안도로로 올라선다.
신도포구 옆 공원이다.
정자 양쪽으로 돌탑이 서있는데
왼쪽이 '현수상'이고 오른쪽이 '순덕상'이다.
여기에는 전해오는 전설이 있다.
신도2리 해안가에 돌로 만든 큰 함지박(도구리) 1개와
작은 함지박 3개가 있었다.
이 해안가 하늘의 선녀가 연회에 쓸 해산물을 잡아 넣어 둘 곳을 찾다가
돌함지박 네 개를 발견하고
큰함지박은 해산물을 넣어두고 작은 함지박에서는 목욕을 하였다 한다.
이 마을 사는 효심깊은 순덕은
병석에 누운 아버지를 위해 끼니를 준비하다 선녀 함지박 근처로 온다.
큰 함지박에 거북이 세 마리가 갇혀있어,
'거북아 거북아, 미안하지만 아버지가 아프시니
너후들을 약으로 써야겠다.' 하였다.
그러자 거북이 말하기를 '저희는 본디 거북이가 아니라
옥황상제와 서왕모, 동해용왕의 아들들 입니다.
보름달이 뜨는 날에만 도력을 발휘할 수 있는데
밤새 놀다 보니 달이 지고 물이 빠져 갇혔습니다.
저희들을 작은 함지박에 하나씩 풀어 주시면
집으로 돌아 갈 수 있으니 소원 한가지씩 들어드리겠습니다.'한다.
그러자 순덕이 첫번째 거북이를 함지박에 풀어주며
아버지의 완쾌와 무병장수를 소원한다.
그러자 하늘에서 목소리가 들린다.
'내가 너희 마을 해안가 모래밭에 물이 솟아나게 할 것이니
그 물을 떠다 아버지께 드려라.'하는 것 이었다.
이어 순덕이가 두번째, 세번째 거북이를
함지박에 각각 풀어주면서 말한다.
'너희들도 집으로 돌아가서 잘 살아라.
나는 아버지 병만 남는다면 더 바랄게 없어.'
그러자 두번째 거북이가,
'저는 서왕모의 아들 현수입니다.
당신의 후덕한 마음에 은혜를 갚으려 합니다.
일 년 후 성인이 되어 다시 돌아 와
그대의 지아비가 되어 평생 지켜드리겠습니다.'하고 돌아갔다.
세번째 거북이도 소원을 말해달라 한다.
순덕이 '아버지 병을 나을 방법도 알았고
낭군도 구했으니 더 이상 소원이 없어.'대답했지만
소원을 말해야 편하게 바다로 돌아가겠다는 거북의 설득에,
'언젠가 나보다 더 힘들고 꼭 필요한 사람을 위해
마지막 소원을 남겨놓을 것이니 그 때 그 사람의 소원을 들어줘.'한다.
순덕이 돌아오는 길 해안가 모래밭에 물이 솟아
그 물을 떠다가 아버지에게 드리니 병이 씻은 듯 나아
건강하게 장수 하였다.
그 후 물이 솟아 나온 곳을 '모살물'이라고 부르며
마을 사람들이 식수와 생활용수로 사용하였다.
일 년 후 성인이 되어 돌아온 현수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남편을 위해 복숭아나무를 잔뜩 심었다.
그 나무들이 커서목숭아꽃이 만발하니 무릉도원과 같아서
현수를 만나러 왔던 신선들이 신도라고 불렀다 한다.
바위를 기대어 배치해 놓았다.
그 위에 다시 돌을 얹어 탑 모양을 만들었다.
그 양옆의 석탑은
순덕과 현수가 낳은 아이정도 되려나?
도로를 따라 조금 더 올라가니
관광버에서 내린 사람들이 한 곳에 모여
무언가 설명을 듣고있다.
'하멜일행 난파희생자 위령비'다.
네덜란드인이다.
나가사끼로 향하던 무역선이 풍랑에 난파되어
1653년 일행과 제주도에 표착한다.
이 후 13년 여 억류되었다가
8명이 탈출하여 귀국했다.
이 때의 억류생활과 느낀 점을 기록한 책이
'하멜표류기'다.
이 곳에 기념비를 세운 근거는
제주목사로 부임한 이익태의 지영록에 있다.
해안도로 변에 조각작품처럼
화산석을 올려놓았다.
다시 들길, 밭사이로 길이 지난다.
마늘을 수확중이다.
일꾼들 언어가 낳설다.
중국인으로 추정된다.
일주서로 신도 1교차로다.
강원도에는 싹이 올라와 한참 대궁을 키울 시기에
따뜻한 남쪽에서는 감자를 수확하고 있다.
다시 마을길을 지난다.
도로 건너 야산이 보인다.
녹남봉이다.
폐교된 신도초등학교 옛 건물 앞,
'배움의 옛터'라는 표지석이 짠하다.
1946년 개교하여
학교에 다닐 어린이가 줄어들어 1998년 문을 닫았다.
52년간 47회 졸업을 마지막으로
총 1,888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고 뒷면에 기록하고 있다.
녹남봉 올라가는 길이다.
녹나무가 많아서 '녹남봉'으로 불리웠다.
오름 정상에 분화구가 있다는데
농지가 개간된 때문인지 찾을수 없다.
분화구가 가마솥 모양으로 생긴 바닥때문에
'가매창(바닥)'으로 부른다.
'일본군 진지동'굴에 대한 안내도를 보고 오른 길이라
해당 장소를 찾아간다.
정상부 분화구 둘레를 한 바퀴 다 돌아도
마땅한 안내문을 찾을수 없다.
밭속으로 들어가 둘러보아도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다시 둘레길로 돌아가는 길이다.
작약이 예쁜 꽃을 피워 올렸다.
녹남봉을 내려간다.
녹남봉을 돌아본다.
'도원연못'이다.
물을 담고있던 때가 언제였던지
마른바닥에 풀이 무성하다.
연못 둔덕 위 풀밭이 말끔히 정리되었다.
너른 마늘밭에 미니버스가 서있다.
아마도 수확하는 일꾼들을 태우고 온 것 같다.
감귤나무 밑둥을 잘라
새로 나온 곁가지를 살려놓았다.
초가집이 보여 반가운 마음에 다가간다.
이상한 느낌에 가까이 가니
인위적인 재료로 만든 플라스틱 모형 지붕을 얹은것 같다.
'무릉도원 학당 건물'이다.
제주어교실, 체험 등 각종 합습장이다.
아무런 장식없는 꽃터널을 지난다.
무릉도원 표지석이다.
전설을 알고보는 표지석이 새롭게 다가온다.
좌기동 버스정류장이다.
하루 여정을 마친 시간이 4시 40분,
역시 6시가 넘어서야 숙소에 도착하며 마무리한다.
당일 지나쳤던 시작점 표지석이다.
5월 15일, 11코스를 정방향으로 돌며 담은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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