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희가 도 군정청 민정장관으로 발탁되어 들어가자 신문사는 윤홍길 사장 체제로 되면서 사명을 또 다시 바꾸었다. 달구시보(時報)가 달구신보(新報)로. 창간한 지 불과 십오 개월만에 세 번째 사명을 바꾸는 셈이었다. 영문으로는 타임스(Times)에서 뉴스(Nwes)로 바뀌는 거였다. 달구신보/Dalgu News.
현준은 문식과 마주 앉아 윤홍길 사장이 요구하는 신년 축하 광고 얻는 문제를 놓고 성토했다.
윤홍길 사장은 투박한 사업가였다. 일본 강점기, 일본인이 경영하는 화장품의 반도(半島) 총판에서 영업 사원으로 잔뼈가 굵었었다. 그는 화장품을 들고 영남 지역 방방곡곡 다니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렇게 닦아놓은 거래처를 상대로 신문 보급에 전력투구했다.
일제 강점기 때부터 조선인은 거의 신문을 읽지 않았다. 그러므로 신문 독자는 일본인이 대종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광복하고 일본인들이 철수해버린 이 땅에 새로운 신문 독자 개발은 절체절명의 문제가 되었다. 우선은 손쉬운 각 기관을 상대로 판촉 했다. 그러니까 그 신문 시장은 지극히 미약할 만큼 협소하고 영세할 수밖에 없었다.
토착 독자를 중앙지로부터 지켜내는 것도 힘에 겨운 일이지만 지방 신문의 경쟁지와의 판매 경쟁은 그야말로 피탈이 날 일이었다. 거기에 좌익 언론과 좌익 활동가에 의한 방해 공작을 이겨내야 했다.
그런데도 홍길은 화장품으로 닦아놓은 거래처 - 곧 경북은 물론 경남 지역까지 소도시와 읍 소재지마다 화장품 판매상이나 화장품을 다루는 상점에는 그의 안면이 다 통했다고 장담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럭저럭 꾸려 나갔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한 화장품 관련 거래처에서는 광고 수입도 다른 신문사에 앞질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 판매 수익은 경쟁지인 남영일보에 훨씬 못 미치고 있었다. 홍길은 그것이 기본적으로 신문의 논조에 있다고 믿고 있었지만 신문지면 제작에는 일체 관여하지 않았다. 그것은 온전히 현준의 소관이었다.
홍길은 현준에게 당연히 상사였지만 실제 있어서 현준이 인정하는 상전은 ‘송 선생’으로 불렀던 사주 송채희 뿐이었다. 신문의 논조나 지면의 형성에 대한 것은 항상 정식 직함이 없는 그와 의논했고 그의 지시를 받았다. 그랬는데 그가 공직으로 나가자 그러한 채널이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말하자면 그의 배경 겸 머리가 없어져버린 것이다.
연말 이사들과 신문사 국장급 간부들의 연석회의 자리에서 홍길은 발행인으로서 사장 자격으로 느닷없는 제안을 했다. 물론 그 자리에는 송채희가 없었다.
사장은 현재 신문이 적자 누적으로 그동안 계속 투입되어 온 자본의 한계성을 말하면서 아직 한 달 반이나 남은 신년 축하 광고 문제를 들고 나온 것이다. 즉, 모든 이사와 간부들에게 축하 광고량을 금액으로 할당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