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의 보직 이야기
김도일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
승인 2023.10.04 15:03
◇ 2017년 경 대학원 수업에서: 외국인학생과 한국학생의 공동 수업
장로회신학대학교는 나에게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도록 소중한 기회의 문을 열어준 고마운 직장이다. 교수로서는 외국인학생지도교수, 학과장, 교육대학원장, 대외협력처장, 기획처장 등의 보직을 맡아 학생들과 즐겁게 동행할 수 있었고, 학교 밖에서는 상상하지 못했던 일들을 맡아 할 수 있도록 독려하여 주님 안에서 나의 역량을 십분 발휘할 수 있게 했다.
어느 날 김중은 총장은 나에게 외국인 학생들을 지도해 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해왔다. 그 제안을 넙죽 받아들이기엔 내 능력이 부족하다고 느꼈지만, 해외에서 이방인으로 살아본 경험이 꽤 쓸모 있게 작용할 것 같았다. 그리고 머나먼 타국에서 신학을 배우기 위해 한국에 온 학생들을 돕는 일은 매우 중요하게 생각되었다.
주로 제3세계에서 한국교회를 배우고 장신대에서 신학을 하기 위해 온 그들에게는 많은 난관과 필요가 상존했다.
막상 그들의 지도교수로 부임을 하고 보니, 그들이 호소하는 어려움과 필요는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대개 기후가 따뜻한 아프리카나 동남아시아에서 오는 외국 학생들은 익숙하지 않은 영어로 공부하는 게 힘든 일이었으나, 물리적인 필요도 적지 않았다. 요사이 여름이 점점 더 길어지는 한국이지만, 일단 가을바람이 솔솔 불어오고 낙엽이 지면, 문지방으로 스며드는 차가운 바람이 열대지방 학생들에게는 참기 어려운 추위였다.
대개 시월 중순 이후가 바로 그 계절이다. 특히 11월이 지나 가을이 깊어지면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찬바람이 몹시 견디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외국인 학생 중 한 사람이 대표로 찾아와 아직 히터가 작동되지 않아 추위를 참을 길이 없으니 대책을 마련해 주면 고맙겠다고 간청하며 돌아간 것이다.
방마다 개인 히터를 사다 틀어주기에는 만만치 않은 전기료를 감당하기 어려울 게 분명했다. 나는 주님께 이 문제를 앞에 두고 간절히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기도 끝에 영락교회와 소망교회 여전도회에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분들 중 몇몇은 후원금을 보내 주셨고 몇 분은 학교까지 일부러 찾아와 바비큐를 해주면서 타국에서 고생하는 학생들을 위로해 주었다. 그분들의 격려와 마음 씀씀이에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정성껏 보내주신 후원금을 보물처럼 품고서 나는 학생들에게 말했다. “여러분, 이제 저와 같이 마트로 가서 월동준비를 하겠습니다. 필요한 물건을 한 사람당 오만 원 이내로 구입할 수 있어요”라며 그들과 함께 마트로 갔다. 거기서 우리는 각자의 필요에 따라 틈새를 가릴 문풍지, 겨울 장갑, 오버코트, 목도리, 겨울모자 등을 사서 다가올 추위에 대한 만반의 준비를 했다.
돌아오는 길에는 단백질이 부족하다던 학생들을 위해 패밀리 레스토랑에 들려 스테이크를 실컷 먹였다. 외국인 학생들은 무척 신이 나서 나와 동료 학우들을 번갈아 쳐다보며 이루 말할 수 없는 행복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표정 하나에 나는 이미 봄이 온 듯 따스함을 느끼며 그동안의 고민이 눈 녹듯 사라지는 경험을 했다.
겨울 방학이 시작될 무렵엔 장신대에 재학 중인 기타리스트를 초청하고, 맛있는 음식 뷔페를 차려 놓고선 외국인 학생들과 “한 해를 보내며 … 콘서트”를 열기도 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나는 졸업하는 외국인 학생들과 함께 총장실로 찾아가 인사를 시키고 마음을 나누게 했다. 그동안 가르쳐 주시고 보살펴 주심에 감사하는 인사를 하며 그들이 앞으로 걸어갈 길을 함께 축복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때 총장님은 우리를 맛있는 식당으로 데리고 가서 음식을 사주시며 기쁨을 나눴던 기억이 있다. 이때가 아마도 2002년 정도였을 것이다. 그때 콘서트에서 애틋한 곡조로 기타를 쳐주시던 이 전도사님은 나중에 보니 충신교회의 부목사님이 되어 사역을 잘하고 있었다. 겨울을 따뜻하게 날 수 있도록 도와주신 영락, 소망교회의 여전도회원들께도 감사드리며, 외국인 학생들을 정성으로 보살펴 주신 총장님께도 감사를 전하고 싶다.
이후 나는 기독교교육학과장, 기독교교육연구원장, 교육대학원장을 번갈아 맡으며 기독교교육사상사를 가르쳤다. 기독교교육과 학생들은 지구최강의 학생들이었다. 나는 미국에서 기독교교육학을 학부, 대학원, 박사과정에서 배우고 한두 과목은 박사과정 조교로 가르쳐도 보았다. 하지만 장신대 기독교교육과 학생들처럼 열정, 순수함, 비전이 뚜렷하게 넘쳐나는 학생들을 본 적이 없다. 또한 선후배 동료 교수들의 헌신도도 무척 높았다고 생각한다. 고용수, 사미자, 임창복, 양금희, 박상진, 장신근, 이규민, 고원석, 신형섭, 김성중, 류은정, 김희영, 유선희 교수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소중한 분들이다.
◇ 장신대 소양관 앞에서 교수 일동: 지금은 보이지 않는 분들이 다수 계신 것으로 보아 대략 2005년 경
처음 교수로 부임할 당시에는 서정운 총장이 나를 맞이했고, 이후 김중은, 고용수, 장영일, 김명용, 임성빈, 김운용 총장은 나의 20여 년 장신대 교수 시절을 함께해주며 교수로서의 사역을 잘 할 수 있도록 도와준 일종의 은인들이다. 외국인학생지도교수 이후에는 대외협력처장을 세 번이나 맡을 정도로 나는 그 보직에 제법 적응했던 것 같다.
상상하는 대로 대외협력처장은 무척 에너지가 많이 들어가는 보직이었다. 기획처장이 학교 내 살림을 하는 보직이라면 대협처장은 학교 외 살림을 하는 보직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단순하게 나눌 수 있는 성질은 아니지만 말이다. 특히 김명용 총장이 부탁하여 대협처장직을 수행할 때는 보직의 무게가 대단히 무겁게 느껴졌다. 왜냐하면 그 당시 10층짜리 영성생활관 건축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장영일 총장 당시 나는 기획처장으로 영성생활관 설계 및 건축 일부(5층까지)를 맡았고, 이후 김명용 총장 시절에는 대협처장으로 봉사했다.
하루는 온누리교회에 재정지원을 요청하려고 하용조 목사를 만나기 위해 갔다. 내 앞에는 나이가 지긋한 각 학교의 총장들을 비롯한 각 기관의 장들이 즐비하게 그를 만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건물의 조감도와 설계도를 들고 구석에 그냥 말없이 서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대기하고 있었는데 “김도일 교수님, 왜 거기 서 있어요?”하며 하 목사님이 나를 부르는 게 아닌가.
나는 “아, 예. 학교생활관을 건축하는 일이 있어서요”라고 했더니, 한번 보자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분 앞에 조감도를 활짝 펼치고 설명을 이어갔다. 그러자 하 목사님은 바로 “아, 이거 돈이 꽤 많이 드는 일일 텐데. 모교를 도와야지요. 연락드릴게요.” 하는 게 아닌가. 그 이후 얼마 되지 않아 온누리교회에서는 거액의 발전기금을 장신대로 입금했다.
미국에서부터 크고 작은 일로 함께 사역했던 하 목사님이 나를 기억해 내 말을 경청해주고, 학교의 사명을 받아 기약 없이 찾아간 나의 청을 들어준 일은 아직도 가슴에 생생한 감사로 남아 있다. 언젠가 하용조 목사의 투병 중에 찾아간 병실에서 그는 자신의 가슴에 난 수술 자리를 열어 보이며 “김 교수님, 몇 번이나 당신을 청빙해서 같이 일하고자 했는데 성사되지 않았어요. 그게 못내 안타깝네” 그리고 “이제 다음 해부터 협동목사로라도 같이 하면 어떨까?” 하셨고, 나는 “좋습니다. 그렇게 하지요”라고 답했다. 이후 한 달 만에 그는 모든 안타까움을 뒤로하고 하늘나라 본향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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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일은 장신대 기독교교육학과 교수로 한국기독교교육학회 회장을 역임하며 다음 세대를 세우고, 가정교회마을연구소 공동소장으로 이 땅 위에 하나님나라를 확장시키는 일에 힘쓰고 있다. 이 지면을 통해 삶 속에 구체적으로 역사하시며 이끌어 오신 그분의 발자취를 독자들과 나누고자 한다.
김도일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 cnews1970@naver.com
출처 : 주간기독교(http://www.cnews.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