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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문(祭文)
박효술(朴孝述) 홍경(弘慶)에 대한 제문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아, 그대여. 성품이 고졸(古拙)하고 마음이 순하며 모양이 공손하고 말이 어눌하니 타고난 자품이 아름답지 않은 것도 아니며, 선조께서 대대로 선을 쌓은 뒤에 태어나 일찍 가정 교훈을 받았으니 복을 터전함이 깊지 않은 것도 아닌데 어찌하여 갑자기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나이 사십이 되어 성균관에 오름은 그대에게 어찌 경사가 될 수 있겠는가. 오십이 되기 전에 세상을 버렸으니 또 어찌 장수했다고 말하겠는가. 명경당(明鏡堂)을 뒤이어 건축하고 용수암(龍岫庵)을 중수하는 일을 그대는 어찌 갑자기 그만두는가.
내가 매번 선산(善山)의 우거에 왕래할 때마다 그대는 반드시 효려(孝閭)의 아랫길로 나와서 술을 따뜻이 데워 반가이 맞이하고 혹 머물러 유숙할 것을 청하여 닭을 잡고 기장밥을 지어 대접하였으며, 또 모름지기 따라와서 멀리 교외에서 송별한 것이 햇수로 모두 몇 번이었는가. 이후 효려 앞을 지나게 되면 내 차마 마음을 가눌 수 있겠는가.
이제 나는 늙고 병들어 칩거하고 있어 그대의 장례가 내일로 임박했다는 말을 들었으나 몸소 상여 옆에서 곡하지 못하고 제물을 보내어 대신 술을 올리니 평소의 의리를 저버린 것이 부끄럽소. 신은 돌아보고 흠향해 주기 바라오. 아, 슬프오.
祭朴孝述 弘慶 文
嗚呼惟君。性拙心順。貌恭言訥。稟質非不好也。累世積善之餘。早受家庭之訓。基福非不深也。而胡遽至此歟。年四十之上庠。在君何足爲慶乎。未五十之棄世。又何足爲壽乎。明鏡堂之肯構。龍岫庵之重修。君何遽輟其事歟。嗚呼。每我有善寓之往來。君必出孝閭下之路。煖酒相迎。或請止宿。以設鷄黍之供。又須追隨。送別于郊之外者。歲凡幾時也。此後行過于閭前。其忍爲懷耶。今我老病疚蟄。聞君卽遠在明。而不得躬哭于轝傍。送奠代酌。愧負平生。神其顧歆耶。嗚呼哀哉。
권강재(權强哉) 극립(克立) 에 대한 제문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아, 공의 상이 이미 기년을 넘었습니다. 나의 옴이 해가 지나 묵은 풀이 된 뒤이니 지금 비록 감히 곡하지는 못하오나 슬픈 정을 어찌 스스로 억제할 수 있겠습니까.
아, 옛날 내 처음 입암(立巖)을 구경할 적에 공이 실로 주인이 되어 나를 대접하였습니다. 내 가만히 보니 용모는 질박하고 고졸하였으나 마음 속에 간직한 것은 충신의 덕이었고 말은 부족하고 어눌하였으나 지킨 것은 정고한 지조였으니 돌 속에 옥을 감추고 무명옷 속에 비단옷을 입은 분이라고 할 만하였습니다.
공은 입암의 아래 마을이 바위가 기이하고 시냇물이 깨끗하며 골짝이 깊고 경치가 아늑한 것을 좋아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왜적이 물러간 뒤에도 또한 산 밖으로 돌아가지 않고 언제나 나와 함께 집을 짓고 살 것을 청하였습니다. 나는 고을이 멀고 형세가 막혀 비록 공의 요청에 부응하지 못하였으나 마음은 실로 주인의 착한 마음씨와 천석(泉石)의 아름다운 경치를 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해마다 반드시 한 번씩 가서 놀곤 하였습니다. 공은 언제나 기꺼이 서로 맞이하여 날마다 그 사이에서 한가로이 거닐어 숲마다 가보지 않은 곳이 없고 돌마다 앉아 보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동쪽 봉우리에 달이 떠오르는 밤과 남쪽 이랑에 비 갠 날 아침에 취하여 이야기를 나누고 혹 노래하여 날을 마치고 밤을 샌 것이 모두 몇 번의 춘추입니까. 함께 노년을 보내자던 약속을 이루지 못하고 공이 갑자기 이 지경에 이를 줄을 어찌 생각하였겠습니까.
아, 시내와 바위는 옛날 모양 그대로이고 숲과 골짝은 옛날 그대로의 정취인데, 일찍이 함께 놀던 오직 그 분만 없어 묵은 자취가 쓸쓸하고 음성과 용모만이 완연하니, 죽지 않은 자의 회포를 어찌 차마 말할 수 있겠습니까.
졸렬한 이 몸은 어제 임고서원(臨皐書院)으로부터 와서 서원의 부엌에서 술과 닭을 빌려다가 한 잔 술을 올려 옛 의리를 간략히 펴옵니다.
祭權強哉 克立 文
嗚呼。公之喪已逾朞矣。我之來也。在宿草之後。則哭雖不敢。情豈能自抑耶。嗚呼。昔我初見立巖也。公實爲之主而待我焉。我竊觀之。其容則樸拙。而所懷者忠信之德。其言則短訥。而所守者貞固之操。可謂璞中藏玉。絅裏衣錦者也。公愛巖下之村。石奇溪潔。谷邃境幽。旣在寇退之日。亦不返于山外。每請我共栖而同老。我以鄕遠勢礙。雖不能副公之請。其心則實不忘乎主人之良。泉石之勝。故歲必一至而遊焉。公每欣然相迓。日維徜徉其間。無林不跡。無石不坐。東峯月吐之夜。南畔雨霽之朝。醉晤或歌。終日竟夕者。凡幾春秋也。豈料同老之約未就。而公奄至於此也。嗚呼。溪巖舊樣。林壑昔趣。而所嘗與之共遊者。獨無其人。陳迹蕭然。音容宛然。則未死者之爲懷。其可忍耶。拙蹤昨過林皐來。敢借酒鷄於院廚。就奠一酌。略伸舊義。
정 도사(鄭都事) 장(樟)에 대한 제문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옛날 내가 처음 공을 만나보니 공이 그 때 열두 살이었는데 어린 총각으로 뜰에서 왔다 갔다 하였습니다. 얼마 안 있다가 관례를 하고 관례한 다음 장가를 들고 또 얼마 안 있다가 벼슬을 하였는데, 벼슬하여 고을을 맡은 것이 두 번이었으며 말년에는 또 과거에 급제하여 청운의 길이 이미 열리니 공은 복을 원대히 누리리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아침 이슬이 갑자기 재촉함이 이미 이 지경에 이르니 아, 슬프옵니다.
내가 처음 만나본 뒤로 이제 겨우 삼십오 년이 지났는데 공의 인생살이 갑자기 끝났으니 세상을 사는 것이 어쩌면 이리도 짧습니까.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요절하는 자 그 누가 불행이 아니겠습니까마는 요절하는 중에도 부모보다 먼저 죽는 것이 더욱 불행입니다. 특별히 심한 불행이 마침내 공의 몸에 돌아갈 줄을 어찌 알았겠습니까. 하물며 공은 독신으로 형제가 없는데 이겠습니까.
다행스러운 것은 공에게 세 아들이 있으니 이는 위로 사랑하는 어버이의 마음을 위로할 수 있을 것입니다. 덕을 쌓은 뒤에 공이 효도를 끝마치지 못하였으니 짐작건대 남은 경사의 나타남이 후손에게 있을 것입니다.
술잔을 올려 슬픈 마음을 펴오니 말로 정을 다하지 못하옵니다. 아, 슬픕니다.
祭鄭都事 樟 文
昔我初見公。公時十二歲。以童丱進退于庭矣。未幾而冠。冠而室。又未幾而仕。仕而宰縣者再。晚又登第。雲路旣拓。謂公福享應遠矣。朝露遽催。已至於斯。嗚呼哀哉。自我始見。今纔三十有五歲。而公之人事。奄然已矣。其爲世也。何其促哉。人生於世。短折者誰非不幸。而短折之中。先親而歿。爲尤不幸。孰謂不幸之尤。乃歸於公之身也哉。況公獨身無兄弟乎。所幸者。公有三胤在焉。此可以上慰慈衷矣。積德之下。公不能終孝。意者。餘慶之發。其在於後與。酌以敍哀。辭不盡情。嗚呼哀哉。
신응순(申應純)에 대한 제문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공이 태어난 세상은 진대(晉代)의 건곤(乾坤)이 아닌데 공은 어찌하여 죽림(竹林)의 남은 자취를 사모했습니까. 말세가 시끄럽게 떠들어 부앙(俯仰)할 수 없으므로 일생 동안 취한 가운데 의탁하여 광음(光陰)을 보내며 즐거워하니 일찍이 어찌 인간의 슬픔과 즐거움을 알았겠습니까. 예법을 지키는 집안에서는 혹 공을 시비하는 자가 있으나 공은 이미 남의 옳고 그름을 알지 못하였으니 또 어찌 남이 나의 잘잘못을 시비함을 알았겠습니까.
아, 사람들은 모두 공이 몸을 검속하지 않음을 허물하나 나는 홀로 공이 남을 해칠 마음이 없음을 취하였으니 남을 해칠 마음이 없는 자는 지금 세상에 또한 지극한 덕입니다. 사는 것이 공에게 즐거움이 아니었으니 죽는 것이 공의 슬픔이 될 수 없습니다. 애오라지 한 잔 술로 위로하옵니다.
祭申應純文
公之生非晉代之乾坤。公何慕竹林之遺迹。末世譊譊兮。不可以俯仰。故一生醉鄕乎是託。送了光陰兮。陶陶兀兀。曾豈知夫人間悲樂。禮法之家。或有是非公者。旣不知人之是非。又焉知人之是非我得失。嗚呼。人皆咎公之莫念乎檢身。我獨取公之無心於害物。能無害物之心者。在今世其亦至德。生非公樂兮。死不足爲公悲。聊以慰乎一酌。
최중길(崔仲吉) 철(喆)에 대한 제문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아, 슬프오. 중길과 같은 사람을 어찌 쉽게 얻을 수 있겠소. 그런데 이제 갑자기 잃었으니 서로 사랑하는 정의 애통함이 어떠하겠소.
타고난 재주가 뛰어나지 않은 것이 아니요 역량이 많지 않은 것이 아니어서 정밀하고 심오한 학문에 나아갈 수 있었고 원대한 사업을 이룰 수 있었으니, 애당초 성취를 기대함이 어찌 일찍이 가볍고 얕았겠소.
그런데 어이하여 조물주의 시기를 자초하여 생명을 빨리 소모하여 마침내 이 운수에 이르렀단 말이오.
아, 슬프오. 다시 무슨 말을 하겠소. 군이 살아 생전에 하찮은 일을 모두 떨어버려 가슴속에 남겨두려고 하지 않았으니, 내 어찌 지나간 일을 모두 말하여 영령의 귀를 시끄럽게 할 것이 있겠소.
아, 슬프오. 그대의 병이 심하다는 말을 들었으나 내 마침 몸을 움직일 수 없는 병이 있어 가서 문병하지 못하였으며, 이제 장례가 임박하였다는 말을 들었으나 또 가서 곡하지 못하니, 나의 이 회포를 그대가 어찌 어두운 가운데서 스스로 알지 못하겠소.
한 잔 술을 멀리 권하고 몇 줄의 글로 영결을 하니 아, 슬프오.
祭崔重吉 喆 文
嗚呼哀哉。重吉爲人。豈可易得哉。而今遽失焉。相愛之痛。爲如何哉。才稟非不長矣。力量非不多矣。學可以造精深。業可以致遠大也。初所望於成就者。何嘗輕且淺哉。胡自爲造物者所祟。促耗其性命。遂至於斯。數也耶。嗚呼哀哉。復何言哉。君之在世。脫略細故。不欲滯介於胸中。我何必說盡往事。以撓冥聽哉。嗚呼哀哉。聞君疾劇。我適有莫動之恙。旣不得往問。今聞就窆在邇。而又不得往哭。我之此懷。君豈不自知於冥中哉。一爵遙侑。數行永訣。嗚呼哀哉。
토신(土神)에 대한 제문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현광(顯光)은 병란의 때를 만나 옛 고향을 잃고 동ㆍ서ㆍ남ㆍ북으로 떠돌아 다녀 일정한 처소가 없은 지가 이제 10여 년이 되었습니다. 가만히 보건대 이 언덕이 뒤에는 높은 산이 있고 앞에는 긴 강이 흘러 적막한 물가가 되고 넓은 들이 되었음을 사랑하여 마침내 깃들여 살 만한 한 곳을 만들려 하였습니다.
이에 세 칸의 집을 세워 이미 그 위에 기와를 이고 다시 옆에 초가를 지어 장차 가솔(家率)들을 두려고 하옵니다. 만일 신(神)의 도움을 입어 깊고 긴 맥(脈)을 이끌고 순후한 기운을 쌓아, 보호하여 길러주는 융성함을 온전히 하고 재앙이 일어남을 길이 끊어 주신다면 용렬한 이 늙은 몸이 거의 어린 아이들을 이끌고 마음대로 고기잡고 나무하며 한가로이 눕고 쉬면서 이후의 세월을 보낼 것이오니, 이 어찌 족히 함홍광대(含弘光大)한 아름다움이 아니겠습니까. 이에 맑은 술과 제철의 음식으로 공경히 진설하여 올리고 아뢰옵니다.
[주]함홍광대(含弘光大) : 함(含)은 포용하는 것이고 홍(弘)은 도량이 넓은 것이며, 광(光)은 빛나는 것이고 대(大)는 큰 것으로 《주역(周易)》 곤괘(坤卦) 상전(象傳)에 보이는 바, 곤(坤)은 곧 땅이므로 땅의 덕을 들어 말한 것이다.
祭土神文
顯光遭時兵亂。流失舊土。東西南北。靡有處所者。于今十有餘歲矣。竊愛此阜。後高山前長江。爲濱寂寞。爲野寬閒。乃思以爲栖息之一所。爰立三間。旣瓦其上。復欲結茅傍便。將有以置接家累焉。如蒙神佑。引脈深長。儲氣淳厚。克全護育之隆。永絶災沴之作。則庸老一物。庶幾携率童兒。任情漁樵。優游偃仰。送了此後之歲月。何莫非含弘光大之餘休哉。玆以淸酌時羞。敬伸薦吿。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에 대한 인조대왕 치제문 (仁祖大王 致祭文)
숭정10년 정축년(인조15 1637) 11월에 국왕은 홍문관 수찬 유철(兪撤)을 보내어 돌아가신 우참찬 장현광의 영령에 제사를 올리게 하오.
아! 영령은 금오산과 낙동강의 빼어난 정기를 받아 오백년에 한 번씩 태어나는 우리나라의 위대한 인물이었소. 어린 시절부터 벌써 도덕을 닦는 데에 뜻을 두어 삼분오전(三墳五典)의 옛글을 널리 고찰하여 마음 깊이 탐구하고 연마해서 마침내는 이를 집대성하여 오묘하고 정밀한 경지에 묵묵(黙黙)히 도달하였소.
그래서 우주의 큰 법칙과 성명의 오묘한 이치를 깊이 연구하여 이를 체인(體認)해서 환하게 깨달았으며, 옳게 알고 실제로 터득한 것이 한치의 오차도 없었소. 나이 겨우 약관 때에 학문의 큰 틀이 이미 갖추어져서 여러 선배 선생에게 무엇을 물어보면 모두들 대답을 못해 두 손을 움츠리며 그 자리를 피했지요. 아쉬운 마음으로 늘 겸손을 하며 스스로 만족하지 않고 위편삼절(韋編三絶)이 되도록 공부를 해서 복희(伏犧)의 역리에 정통하여서 복잡한 역학의 상수(象數)를 손금 보듯이 하였고, 모든 사물이 모이고 흩어지며 움추리고 펼쳐지는 이치와 사라지며 다시 자라나고 꽉 차면 다시 이지러지는 법칙을 정적(靜的)인 세계에서는 이를 탐구하고 동적(動的)인 세계에서는 이를 관찰하여, 마치 종이를 말았다가 폈다하듯이 하였으며, 이치의 세계에 유영(遊泳)을 하면서 조화와 더불어 동화(同化)가 되었는데, 그러한 기상이 온몸에 배어서 넘치고 있었으며, 도덕(道德)이 풍만(豊滿)하여 일거일동의 그 어떤 것들도 여기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 없었소.
옛날 선왕조(선조)때에 이미 학(鶴)의 울음소리가 하늘에까지 통하여 백옥(白屋)으로 발탁되니 유인(遊刃)을 자유자재로 하여 그동안의 황폐했던 것을 재기(再起)시키고 고사(枯死) 상태였던 것을 소생(蘇生)시켰었소. 지난날의 혼란했을 때에는 우자(愚者)처럼 처신하면서 산림(山林)에 은퇴(隱退)하여 세상일에는 초연(超然) 했었소. 내가 왕위에 오르고서는 여러번 초빙(招聘)을 하였으나 그대는 세상에 나올 뜻이 없어 나이가 많다고 사양하였는데, 지난 갑자년(인조2 1624)의 변란을 만나 피난했을 적에는 그대가 병든 몸으로 어려운 일에 참여하여 만나볼 수가 있었소. 덕스러운 그 품위가 참으로 내 마음의 위로가 되었으며, 말은 간략하였으나 깊은 뜻이 담겨 있어 교훈이 될 말이 가슴에 와 닿았소. 나라에 그대 같은 원로(元老)가 있어 함께 조회(朝會)에 참석하게 되니 무척이나 기뻐서 여러 날을 지내는 동안 마치 시들은 싹들이 싱싱하게 소생하는 듯하였소.
그런데 그대는 조금도 머물지 않고 훌쩍 떠나갔었소, 그래서 세월이 지나면 나를 찾아 주리라 생각하고 기대하면서 그대가 마음을 바꾸어 준다면 이 나라의 큰 다행으로 생각하였으나 돌이켜보면 나는 부덕한 몸으로 치의(緇衣)을 대하기가 부끄러웠으며 한편으로는 연로 한 그대를 번거롭게 할 수 없어 끝까지 만류하지 못하였으나 내가 그리워하는 생각은 끊임이 없었오. 저 멀리 산림에 가 있어도 주척처럼 의지가 되고 마음 든든하였으며 머지 않아 정승으로 모셔 모든 대신(大臣)들의 본보기가 되게 하려고 하였는데, 하늘이 그대를 남겨두지 않고 나라의 원로를 떠나게 하였소. 조정이나 시골에서 모두가 놀라고 사림(士林)들은 창자가 미어지듯 애통해 하고 있소. 나라에 어려움이 많은 이때 그대 같은 원로를 잃었으니, 나의 괴로운 이 심정을 누구와 나눈단 말이오.
사물을 진정시키는 아량과 세상을 경영하는 자혜를 그대로 두고서 펴보지 못하게 했으니, 이 모두가 나의 탓이라오. 나라에 걱정스러운 일이 많고 영남 까지 길이 멀어 병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지 못해 약도 보내지 못했으니 어진이를 우대하고 덕이 있는 이를 존경하지 못한 내가 참으로 부끄럽소. 이에 유신(儒臣)을 보내어 술 한 잔 드리게 하니 밝은 영령은 흠향하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