쌓기는 어렵지만 허무는 일은 한 순간 / 양선례
최근 안과 치료를 받고 있다. 눈 안쪽에 염증이 생겨서 병원에 갔더니 안구 건조증이 심하다고 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레이저 치료를 받았다. 주로 모니터를 보며 일하고, 잠자기 전에는 종이신문이나 책 읽는 일을 오래 해 왔다. 낮에 못 본 포털창의 기사 읽기나 인터넷 쇼핑은 저녁에 휴대폰으로 했다. 그렇게 눈을 혹사했으니 탈이 난 건 당연한 결과였다. 휴대폰 보는 시간을 줄이고 책도 덮었다. 맛깔나게 소설을 읽어주는 유튜버 영상을 켜 놓고 잠이 들었다. 멍하게 텔레비전 보는 시간만 늘었다.
아름다운 바닷가 마을을 배경으로 선남선녀가 자잘한 갈등을 겪다가 행복해지는 드라마를 재미있게 보았다. 여자 주인공이야 주연을 여러 번 했기에 익숙한 얼굴이었으나 남자 주인공은 그렇지 않았다. 그런데도 여주인공과 잘 어울리며 자연스럽게 극에 녹아 들었다. 알고 보니 십 년 이상을 연극판에서 활동하다 와서 연기 내공이 상당하다 했다. 잘 생긴 데다 웃을 때면 보조개가 쏙 들어가서 선량한 느낌을 주었다. 드라마가 끝나면 언제 벌써 찍었는지 그가 모델로 등장하는 광고가 줄을 이었다. 전 세계가 열광하는 <오징어 게임>을 제치고 한국 넷플릭스에서 1위로 순항중인 작품이 바로 내가 보는 <갯마을 차차차>라고 했다. 착한 이미지의 남자 주인공은 광고 한 편당 7억이나 받는 인기배우가 되었다는 연예 기사가 매일 쏟아졌다.
그런데 기다렸다는 듯이 드라마가 끝나자마자 추문이 쏟아졌다. 선량한 이미지라 타격은 더 컸다. 사랑도, 이별도 청춘 남녀 사이에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개인의 사생활일 뿐이지만 여론은 그렇지 않았다. 인기 예능 프로그램 하차는 물론이고 찍어둔 광고의 위약금까지 물어야 할지도 모른단다. 무명 시절 십 년을 거쳐 인기 최정상에 올랐다가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진 그를 보면서 ‘오징어 게임 속 말’일 뿐이라고 했던 곽모 국회의원의 아들이 떠올랐다. 한류 열풍을 타고 한국을 넘어 세계적인 배우로 우뚝 설 수도 있는 인기를 허무는 데는 하룻밤이면 충분했다.
몇 년 전 전임지에서의 일이다. 학교는 교육부에서 일 년에 한 번씩 주관하는 ‘100대 교육과정’ 준비로 바빴다. 보고서를 써서 도교육청의 실사를 받고 통과하면, 다시 수정하여 이번에는 교육부에서 온 분들의 실사를 받아야했다. 특색 있는 교육과정을 문서로 잘 엮어내는 게 승부의 관건이었다. 연일 초과근무가 이어졌다. 낮에는 평소처럼 아이들을 가르치고 학교 인근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는 다시 교무실에 모였다. 단 20쪽에 학교가 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가독성 있게 정리해 넣느라고 밤마다 머리를 쥐어뜯었다. 일찍 퇴근해야 9시였다. 한두 달 만에 끝나는 일도 아니었다. 건강이 안 좋았던 나는 더는 버티지 못하고 나중에는 책상 뒤 바닥에 요가 매트를 깔고 쪽잠을 자기도 했다.
위안이라면 그때 함께 노력했던 선생님들과 끈끈한 사이가 되었다는 거다. 공통의 과제를 해결하는 동안 정이 많이 들었다. ‘건강을 잃은 대신 사람을 얻었다’고 공공연하게 이야기할 정도로 학교를 옮기고 나서도 젊은 선생님들과 교류했다. 이 선생님도 그 중 한 사람이다. 타고난 ‘선생’이었다. 말썽꾸러기, 부진아, 가정적으로 열악한 아이를 내 아이처럼 따뜻하게 챙겼다. 한 달에 한 번씩 아이와 함께 순천에 있는 병원에 가서 약을 타오던 일을 학년이 바뀌어서 담임이 아닌데도 계속했다. 선행을 다른 사람이 아는 것도 불편해했다. 병원 진료가 끝나면 다시 아이를 집에까지 데려다 주고 순천 집으로 돌아갔다. 측은지심이 없다면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런데 그 선생님이 고소당했다. 학교를 옮긴 첫 해, 순간의 화를 참지 못하고 아이를 때린 것이다. 아이는 닳고 닳은 아이로, 집에서도 내 논 아이였다. 아이가 어렸을 때 엄마는 집을 나가서 아버지가 홀로 키웠다. 담임이 되자마자 아이에게 정성을 다했다. 아이가 좋아하는 축구를 맘껏 할 수 있게 휴일이면 옆 학교 축구클럽에 데려가서 같이 놀았다. 가정에서도 집에서도 사랑받지 못하는 아이의 처지를 딱하게 여겼다. 아이는 서서히 마음을 열고 잘 지냈다. 담임하고만 그랬다.
교담 선생님 시간에는 장난을 쳤다. 사건이 일어난 그 날은 ‘지우개 던지고 받기 놀이’를 영어시간 내내 했다. 교담 선생님은 이미 퇴직하고 다시 기간제 교사로- 전남의 벽지나 농어촌학교는 기간제 교사를 구하기가 어려워서 2차 공고까지 했는데도 지원자가 없으면 퇴직자를 쓸 수 있다. - 들어온 터라 나이가 많았다. 대놓고 장난치는 아이지만 아동학대법 때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수업을 방해하는 아이를 야단쳐도, 교실 뒤에 세워두어도, 복도로 쫒아내도 다 아동학대다. 벌이나 체벌을 주는 직접적인 게 아닌 표정이나 몸짓을 문제삼기도 한다.
화를 삭이지 못해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된 기간제 선생님을 복도에서 만난 이 선생님은 저간의 사정을 듣고 폭발하고 말았다. 미우나 고우나 내 자식이 옆집 사람에게 욕먹는 걸 기분 좋게 받아들일 부모는 없을 테니까. 학급 아이들이 급식 먹는 사이 장난친 두 아이를 빈 교실로 데리고 가서 체벌을 하고 만 것이다. 그 날은 ‘머피의 법칙’이 제대로 적용된 날이다. 몇 년 전에 집을 나간 엄마가 집에 와 있었다. 화가 난 엄마가 학교로 여러 번 전화했으나 하필 전화는 고장나있었다. 관리자는 그 일을 너무 늦게 알았다. 불이 났으나 초동대처에 실패한 것이다.
사건이 발생하면 결과로만 이야기한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격이라 ‘욱’해서 그랬다는 말은 타당한 이유가 되지 않는다. 아이를 사람 만들려고 애쓴 노력도 물거품이 된다. 그는 그 일로 꽤 오래 교단을 떠나 있었다. 아이들이 무섭다고 했다. 그간 선생님의 따뜻한 모습을 기억하는 많은 제자, 학부모, 동료 교사가 자발적인 구명운동에 나섰다. 탄원서를 쓰고 백방으로 선생님을 구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은 한 편의 드라마였다. 자칫 교단을 떠날 수도 있는 처지였다. 아직은 창창한 30대 중반인데 남은 날이 길었다. 무엇보다 그는 놓치기 아까운 ‘참 교사’였다.
사람들은 특히 성직자나 교사에게 높은 도덕성을 요구한다. <갯마을 차차차>의 남주인공도 그가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남녀 간의 치정 문제로 끝났을 것이다. 대중들의 사랑과 인기를 먹고 사는 공인이었기에 책임져야 할 부분이 있는 것이다. 이 선생님도 마찬가지다. 어떤 이유로든 폭력은 용납되지 않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백 번 잘해도 한 번 잘못하면 치명적이다. 명예는 쌓기도 어렵지만 허무는 일도 한 순간이다. 한 번의 큰 파도를 넘기고 어렵게 교단에 선 이 선생님의 남은 교직 생활이 순풍에 돛 단 듯 순항하기를 빈다.
첫댓글 막차를 놓치지 않으려고 애를 썼네요? 명예는 한 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인기 드라마 주인공과 아끼는 교직 후배를 잘 연결하여 재미있게 쓰셨네요. 독자에게 전하려는 얘기도 좋구요.
네. 맞아요 교장선생님!
낮에는 열심히 놀고 밤에야 글을 몰아서 쓰니 늘 막차네요.
한 주 쉴까하는 유혹을 참고 그래도 글을 쓰는 저에게 스스로 점수를 줍니다.
이번 주제는 어려워서 글을 연결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답니다.
칭찬, 고맙습니다.
뜨거운 물수건을 눈에 얹고 자면 눈의 피로가 조금은 가시더라고요. 흑흑... 선생님.
네. 안그래도 전자렌지로 30초 돌린 뜨끈한 면포를 눈에 올려두고 잔답니다.
눈 좋을 때 더 많이 책 좀 읽을 걸, 후회하는 중입니다.
혹사당한 내 눈이 짠하지요.
그 선생님께서 끝까지 완주하셔서 명예롭게 퇴직하시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입니다. 그래도 많은 이들이 나서서 탄원해주셨으니 얼마나 다행인지요. 이름을 명예롭게 끝까지 지키기 위해 두렵고 떨림으로 조심조심 걸어야 할 것임을 생각했어요. 오늘도 좋은하루 되시어요.
아직 못 만나봤어요. 집과 떨어져 멀리 좌천되어 있거든요.
좋은 교사를 한순간에 잃을 뻔해서 얼마나 가슴졸였는지 몰라요.
다시 교단에 복귀한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지요.
전화위복으로 삼고 남은 교직이 꽃길이길 바라지요.
맞는 말입니다. 쌓기는 어려워도 무너지는 건 너무나 쉬운 일. 화 그리고 욱 정말 잘 다루어야 할 일입니다. 좋은 일 가득하시길 빕니다.
그러게요.
젊은 선생님이라서 그 혈기를 다스리지 못했나 봐요.
여러 가지가 그 선생님이 운이 나빴다는 걸 말해주었어요.
이렇게 옛말하며 응원할 정도가 되었으니 그나마 고마운 일이지요.
응원 고맙습니다.
이번 주 글감 '명예'와 너무나 잘 어우러진 내용입니다. 읽으면서 교장 선생님의 마음처럼 감정이입이 되었어요. 누구나 한 번의 실수는 있는 법이죠. 되풀이하지 않는 게 이성을 가진 사람의 도리고요. 서사가 풍부하고 깊이 있는 글 훈훈하게 마무리되어 참 다행입니다. 생의 정면에서 휘청거린 이 선생님 구명운동에 누구보다 앞장서 다시 교단에 서게 힘을 보태셨을 선생님 모습이 눈에 선하네요. 이 선생님도 젊은 혈기에 순간 욱했던 일을 계기로 내면의 혼란을 겪은 후 성찰의 눈이 깊어져 남은 교직 생활은 훌륭한 교사로서 소임을 다 하실 것 같아요. 응원해주시는 동료 선생님이 함께하기에.
네, 구명운동도 감동이었어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서로 써 주겠다고 줄을 섰지요.
그 분이 잘 살아온 결과지요.
살다 보면 누구나 허방에 빠지지요.
슬기롭게 잘 이겨내서 아이들 곁에서 행복하기만을 바란답니다.
긴 위로의 글 고맙습니다.
주제가 어려워서 고민을 오래 했습니다.
글쓰기 소재가 고갈되었는지, 교수님의 주제가 어려운 탓인지 갈수록 글을 정돈하여 쓰는 게 힘이 드네요.
하하.
아직도 해결이 안 되었네요? 일이 해결되드라도 정 떨어져서 근무하고 싶은 의욕도 없겠어요. 사람 하나 바보 만드는 건 너무 쉽네요.
그런 일 한 번이 얼마나 교사의 사기를 떨어지게 만드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지요. 복직은 했으나 겁쟁이 이 선생님이 되었더라고요. 가슴아팠습니다.
교장선생님의 글은 늘 공감 100입니다. 저도 '100대 교육과정' 했답니다. 그 모습도 비슷하네요. 우리 학교는 전국에서 2등인가 했고, 대한민국 행복교육 박람회에도 참가했답니다. 그 때 같이 고생했던 선생님들 모임도 있구요. 이토록 비슷한 교사들의 삶이라니.
소설이 아니기에 되도록 정직하게 쓰려고 하는데 '글' 자체가 주는 한계가 있더라고요. 공감 백이라고 하시기 기쁩니다. 우리 학교도 전국에서 2등, 최우수상 받았습니다. 경주 1박2일 발표회도 갔었구요. 저도 그때 같이 고생했던 젊은 선생님들과 간간이 모인답니다. 만나면 늘 행복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