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 극복기
연초에 친척 어른의 부고를 받았다. 1월의 어느 날 그는 아무도 없는 집안에서 뇌출혈로 쓰러진 채로 장시간 있었다가 외출 후 집에 온 아내가 발견하고는 급하게 응급조치를 취했지만 안타깝게도 여든넷의 삶을 마감했다. 2024년 기준 우리나라 남성의 평균 수명은 82.8세, 여성은 88.2세에 비하면 평균 수명은 넘겼다 하지만 평생 마라톤으로 건강을 유지하였고 70대 후반에도 단거리 마라톤을 완주할 정도의 노익장을 생각하면 그의 죽음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런데 그의 죽음이 아쉬운 이유는 또 있다. 그가 구원받았을 지가 확신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는 할머니의 신앙에 따라서 아주 어릴 적부터 믿음의 삶을 살았다. 그러다가 50대에 들어와서 신앙생활을 접고는 30여 년 동안 한 번도 예배에 출석하지 않았다. 명절에 인사차 찾아뵐 때마다 할머니의 신앙을 회복해야 한다고 권면하지만 그때마다 그는 알겠다고 대답만 했을 뿐 정작 교회와는 무관하게 살았다.
그는 부모에게 물려받은 재산이 일전 한 푼도 없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경험도 전무한 목축업으로 인생 밑바닥부터 시작하여 자수성가한 입지전적 인물이다. 당시 농가에서는 농사용으로 한두 마리의 소는 키웠지만 육축사업으로 큰 농장을 경영하는 사업가는 없었다. 수없는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소를 키우면서 일등급 육질의 소를 사육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 분야에서 선풍을 불러일으키며 지역에서는 희망의 신사업으로 떠올랐다. 결국 그는 성공한 사업가로 지역에서 명망 있는 유력 인사가 되었다. 목축업 전문 경영인으로 발돋움하기 위하여 대학 진학을 꿈꾸며 58세 때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늦깎이 공부를 시작하고 대학과 대학원까지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그의 인생 스토리는 누구에게든지 좌절의 바닥에서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2001년 회갑 기념으로 출판한 자신의 인생 성공 이야기를 담은 자서전 「늘 푸른 소나무처럼」이 세인들의 관심을 끌었고 한 방송국에서는 그의 일생을 다큐멘터리로 제작하여 방송하기도 했다. 그러던 그가 아버지 품을 떠나 끝내 돌아오지 않은 탕자로 살다가 인생의 끝을 맞이했으니 사업의 성공자는 되었어도 신앙의 실패자로 남게 된 것이 두고두고 아쉬움이었다.
그가 50여 년 동안 믿음 안에서 살다가 그 밖으로 나간 후 결국 돌아오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출석하던 교회에서 대립과 갈등으로 분쟁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장로들은 담임자의 목회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서 불평이 많아졌다. 담임자는 이런 상황을 목회에 대한 지나친 간섭과 도전으로 인식하였다. 둘은 접점을 찾지 못하다가 마침내 수면 위로 표출되면서 회복불능의 지경까지 발전되었다. 자연히 교회는 네 편 내편이 형성되었고 갈등의 골은 깊어지고 하나 됨의 모습을 상실하고 말았다. 그 과정에서 교인들이 받은 상처와 아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교회를 옮기거나 아예 신앙을 저버리는 사람도 있었다. 그는 교회의 실상을 경험하면서 심한 회의(懷疑)를 품고 점점 교회와 멀어지기 시작했다. 어느새 30년이 된 것이다. 입으로는 믿음을 말하지만 마음으로는 믿음과 무관하였다. 불쑥불쑥 내뱉는 한 마디에는 여전히 교회에 대해서 부정적 인식이 남았다. 그 영향을 받은 그의 아내는 기독교식의 장례일정을 거부하고 유교식 제사상을 차려 놓고 조문객을 맞이했다. 이렇게 오랫동안 믿음 밖에 있던 그가 진정 구원받았을까? 쉽게 판단할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확신하기 또한 어려운 상황이다.
빌립보교회는 내적 갈등이 심했다. 유오디아와 순두게라는 두 여인의 갈등으로 인해 교회는 내홍을 겪고 있었다(빌 4:2). 사도 바울은 이런 교회가 끼치는 영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 감방에서 편지를 보내면서 싸우지 말고 겸손하게 남을 낫게 여길 것(빌 2:3)을 간곡하게 부탁했다. 사실 교회는 남을 낮게 여기며 대립하고 갈등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신앙공동체다. 높고자 하면 낮아져야 하는 주님의 가르침을 실천해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게 중에는 자기 우월감에 빠져 남을 자기보다 천히 여기는 사람이 있다. 이것이 대립의 시작이고 갈등으로 비화되어 분열의 길을 걷게 한다. 그 과정에서 선량한 교인들은 상처를 받고 심하면 신앙의 길까지 이탈하며 먼 타국에서 탕자처럼 살다가 생을 마감하는 경우가 비일비재(非一非再)하다. 마케도니아의 첫 번째 빌립보교회는 그 지역의 모 교회 역할을 해야 했지만 갈등과 다툼으로 교회의 역할이 중단될 위기에 처했으니 이를 바라보는 사도의 마음은 오죽했을까? 영생의 최후 보루요 땅의 마지막 소망이 그 빛을 상실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가 바로 서지 못하면 영생이 망가진다. 짧은 인생도 잘 살아야 하는데 하물며 영혼이 영원한 멸망의 길로 들어서면 더욱 안 될 일이다. 하나님은 구원을 위하여 독생자를 보내셨다. 한 영혼을 살리는데 너무 엄청나게 투자하셨다. 그래서 그의 몸 된 교회는 한 영혼을 멸망의 길로 이끄는 실수를 범하면 안 된다. 교회는 무조건 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교회가 세상에 업적을 쌓았다는 것보다 더 중한 것은 진정 하나 됨을 유지하는 일이다. 이 갈등의 싹을 잘라내기 위해서 무엇보다 교회는 예수님처럼 겸손으로 중무장해야 한다. 그것이 십자가의 정신이다. 죄악으로 어두워진 이 땅을 밝히는 그 십자가가 우뚝 서야 교회가 세상에 영생을 선물할 수 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립보서 2:5).
죄악으로 어두워진 세상에 우뚝 선 십자가
어둠을 밝히는 보름달과 십자가의 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