왠쪽 끝 문창재. 건너 편. 구대열교수, 김승웅, 이형균, 김호준. 2017년 4월 인사동.
官婢 마리아 정난주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을 실감하였다.
유배의 섬 제주를 쓰면서 정난주(丁蘭珠)라는 인물을 처음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수많은 유배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여기고 넘어갔다.
그러다가 소설 한 권을 읽고부터 생각이 달라졌다. 알수록 깊이 빠져들었다.
^올해 4·3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된 김소윤의 <난주>는
160년 전 제주에서 생을 마감한 정난주 마리아의 향기로운 삶을 되살려내는 데 성공하였다.
그에 대한 앎은 황사영 백서 사건의 주인공 황사영의 부인이었고,
양반집 딸이었으며, 관비가 되었다가
제주유지 김석구의 집에서 유모로 살다 죽은 사람 정도였다.
^이런 역사적 사실 하나에 매달려 작가는 기구했으나
값진 한 조선여성의 인생을 되살려내는 데 성공하였다.
이달 초 제주에서 열린 4·3문학상 수상기념 인터뷰에서 작가는
“역사에 이름 없는 이들의 삶이 지금의 우리가 되었다”고 말했다.
이름 없이 스러졌던 이들의 의미 있는 삶을 조명해 냄으로써
역사를 만들어낸 문학적 창조를 말함이다.
^유배인들 삶이 기구한 것이야 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지만,
정난주는 너무도 달랐다. 국사범에 연루된 사람이어서 중죄인 중의 중죄인으로 살아야 했지만,
제주 땅에 짙은 향기를 남겼다. 간난신고 속에서도 불쌍한 이웃을 돕고
보살피는 데 몸을 아끼지 않았고, 가톨릭 교리를 알리기에 일생을 바친 것이다.
‘한양 할망’이라는 호칭이 말해주듯, 주민들의 존경과 사랑을 누린 일생이었다.
^수많은 제주유배객 가운데 이름이 뜨르르한 사람은 많지만
여자 이름은 흔하지 않다. <제주통사>에 나오는 많은 유배객 이름 가운데
여자는 정난주가 유일하다. 정경부인 될 사람이 관비가 되었던 사람 정도로 알려졌던
그의 이름은 <난주>의 탄생으로 제주유배사의 샛별이 되었다.
^그의 불행은 유명한 천주교 탄압사건 신유(辛酉)사옥에서 비롯되었다.
세상을 발칵 뒤집은 황사영백서(黃嗣永帛書)사건이 터져 황사영은 참형을 당하였다.
서른이 안 된 새파란 나이였다. 어머니는 거제도, 아내는 제주도,
아들은 추자도 유배형으로 집안이 산산조각이 났다.
^두 살배기 어린아이에게까지 유배형을 내릴 정도로 백서사건의 충격은 컸다.
그가 제천 봉양면 배론(舟論) 마을 토굴 속에 숨어 살면서
천주교 북경교구장에게 보낸 편지에 군함 수백 척에 5~6만 병력을 태우고 와서
선교의 승인을 요구하도록 해달라는 등 4개항은
역모로 몰릴 수밖에 없는 과격한 내용이었다.
^흰 비단 폭에 쓴 그 편지를 지니고 중국에 들어가려던 동지들까지 극형을 당하였다.
소설에서는 추자도를 지날 때 난주가 호송나졸에게 뇌물을 주어
추자도 갯바위에 아기를 내려놓고 떠난 것으로 돼 있다. 서른 미만의 새댁 시절이었다.
두 살 배기 아들(경헌)이 노비로 살게 될 것을 염려한 일이었다.
“양반도 천출도 아닌, 이 땅을 살아가는 보통의 양인이 되어···아무것에도
얽매이지 말거라.” 이런 염원을 담았다 하였다.
^제주목 관아의 세답비(洗踏婢)가 되어 튼 손등에 피가 마를 날이 없고,
허리가 부러질 것 같은 고통도 자식을 버린 죄책감에는 미치지 못 하였다.
이악스런 아전들 등살과 선임 관비들의 핍박에 울던 난주는 대정현 관비로 옮겨가서는
어진 유지 김석구 집 사노가 되어 젖어미로 살았다
. 그런 삶이면서도 돌림병 구휼사업을 펼친다.
^어린 관비의 몸에서 천하게 태어난 아비 없는 생명을 거두어 양녀로 삼아
지극정성 기르는 일로 아들 그리운 고통을 견디었다.
고통 받는 사람들을 돕고 벗해주는 일로 외로움을 물리치는 삶이었다.
그런 희생과 전교가 맺은 결실로 말년에는 추자도로 찾아가
장년이 된 아들 며느리 손주들과 함께 꿈같은 1년을 살고 죽었다.
^천주교 제주교구 프랑스인 신부 라루크는 1909년 추자도를 방문해
난주의 증손자 황우중을 만났다. 그는 선대로부터 전해오는 말을 인용하여
“증조모께서는 아주 편안한 임종을 맞았다”고 전했다 한다.
“흰머리 성성한 아들의 옷을 짓고 밥을 차렸으며,
조부께서는 아이처럼 춤추고 노래를 해드렸다지요.”
^라루크 신부는 그에게서 들은 모자의 이야기를 프랑스 <가톨릭 선교>지에 썼다.
그 때 인용했던 편지를 보관 중 4·3 사건 때 화마에 휩쓸려 없어졌다 한다.
^난주 이야기는 인간 황사영에 대한 궁금증을 몰고 왔다.
도서관에서 발견한 김길수 교수(대구 가톨릭대)의 강의록 <하늘가는 나그네>
가 그것을 풀었다.
^황사영은 비범한 사람이었다.
열일곱 살 때인 1790년 과거시험에서 시관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답안지를 써내어
수석으로 합격한 수재였다. 시관들이 올린 답안을 받아본 정조임금은
“이런 인재가 그동안 초야에 묻혀있었단 말인가” 하고 감탄하면서,
소년의 손을 잡고 집안과 나이를 물었다. 열일곱 살이라는 말에 놀란 임금은
“스무 살이 되면 높이 쓰겠다”는 약속과 함께,
그동안 학업에 정진하도록 급양비를 내렸다.
^급양비란 왕이 직접 내리는 장학금이다.
그보다 더한 영광은 임금이 그의 손을 잡은 일이었다.
그걸 ‘어무가 내렸다’고 하였다. 어무 내린 사람이 지나가면 사람들은 길을 비켜섰다.
무슨 짓을 해도 말리지 못 하였다.
^그런데 황사영은 학업 대신 엉뚱한 일을 하였다.
1797년부터 서울에 올라와 금기 중의 금기인 서학(천주학)을 전파하고 다닌 것이다.
이듬해 그 사실을 탐지한 포도청이 고민에 빠졌다. 잡아다 문초해야 할 중범죄인데
어무 내린 사람이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게 된 것이다.
고민 끝에 포도청은 승정원에 보고하고, 보고를 받은 삼정승이 임금에게 이 사실을 고하고
처단을 상주한다. 그래도 임금은 “벼슬을 가벼이 여기고 소신을 행하고 있으니
인품이 고결하지 않은가” 하고 두둔하였다.
그러다가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고, 뒤이어 황사영백서 사건이 터졌다.
^박해를 피해 제천 배론 마을 토굴에 숨어든 황사영은
너비 38cm 길이 62cm 크기의 비단 폭에 빽빽이 편지를 썼다.
중국의 베이징 교구장에게 조선의 실정을 알리는 고발장이었다.
한 행에 110글자, 121행이었으니 글자 수가 1만 3천자가 넘었다.
한 획 한 치도 어긋나거나 비뚠 데가 없는 이 비단편지는
사람의 손으로 썼다고 볼 수 없는 정교함의 극치다.
^백서는 너무도 뜨거운 감자였다. 파리모기 같은 해충이기나 한 듯,
잡히는 족족 천주교도들 목을 쳐 죽인 일들이 낱낱이 폭로된 것이었다.
중국인 신부를 죽인 일까지 적혀 있으니 누가 보면 큰일 날세라,
원본은 꽁꽁 숨기고 가짜백서를 만들어 증거자료로 쓰고 중국에 보고하였다.
^가짜백서와 함께 중국에 보낸 토사주문이라는 국서도 웃긴다.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를 죽인 일이 미안하고 황송하여,
“조선 사람인 줄 알았다”고 소도 웃을 변명을 하고는
조선은 중국을 하늘처럼 모셔왔느니,
앞으로도 그렇게 모실 것이라느니 하며 아양을 떨었다.
^백서 진본은 1894년 갑오경장 후 옛 문서 정리 중 의금부 창고에서 발견되었다.
발견자가 천주교인에게 준 것이 교회에 전달되었고,
1925년 한국 순교자 79위 시복식 때 조선교구장 뮈텔신부에게 건너가
지금은 로마 교황청에 보관되어 있다. 이 편지는 동지사 편에 중국에 건너가기 직전
압록강 국경에서 발각되어 조선에 피바람을 몰고 왔다.
^그 내용은 그럴 만 하였다. 요악하면,
첫째 조선은 경제가 빈약하니 서양제국의 동정을 얻어
성교(聖敎)를 받들고 백성을 구제할 자본이 필요하다,
둘째 청나라 황제 동의를 얻어 서양인 신부를 보내주기 바라고,
셋째 청나라 왕실 공주와 조선왕이 결혼케 하여 조선을 청나라 부마나라로 만들어야 한다,
넷째 강병 5~6만을 파병하여 선교의 승인을 강력히 요구해 달라는 것이었다.
^황사영이 명문대가 출신이고, 정난주 역시 유명한 다산 정약용 가문의 재원이어서
이 사건은 여타 교난과는 성격을 달리한다.
황사영이 스승으로 모신 이가 다산 정약용(丁若鏞)의 형 정약종(丁若鍾)이었던 것이 사단이었다.
이런 인연으로 그는 스승의 맏형인 정약현(丁若鉉)의 장녀 정난주(본명 명연)와 혼인하는데,
그 때부터 학문보다는 천주교 교리에 탐닉하게 된다.
스승 정약종은 학자로서도 유명했지만 교리에 밝아 초대 명도회장을 지낸 사람이었다.
주문모 신부 주례로 혼인식을 올린 사실 하나로
그 집안과 천주교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신유사옥에 연루되었던 정약종의 형제 정약전(丁若銓)과 정약용이
흑산도와 강진에 유배되었던 사실은 우리가 익히 아는 일이다.
촉망받던 실학자 가문이 한 순간에 적몰하였으니 깜깜한 어둠 속에 파묻혔던 조선이
서양열강과 일본의 탐학을 피하지 못 한 일은 당연지사 아니었던가
.
대정읍 동이리 정난주의 무덤
^1848년 난주는 죽어 노비로 살았던 대정읍 동이리 야산에 묻혔다.
오래도록 그 유택조차 모르다가 1975년 가톨릭의 노력으로 무덤을 발견하게 되었고,
1990년 무덤 일대가 대정성지로 꾸며져
참배교인들 발걸음이 끊이지 않게 되었다.
대정성지에 선 정난주 마리아 모자상
제주시 외도동에는 정난주 마리아 성당도 생겨
해마다 의미 있는 행사가 열리고 있다.( 2018, 12, 11 )
<내일신문 논설고문, 제주大 고전문학아카데미 도우미/한국일보 논설실장, 편집局次長, 駐도쿄특파원,
외신부장 역임/저서: "證言", "나는 戰犯이 아니다"/양정고 문예반장~고대 국문학과 졸/정선 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