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월을 가르치다 보면
곽 재 구
정주 곽산 영변 이런 지명들이
강진 해남 마산 이런 지명들과 맞부딪칠 때면
그 속에는 어린 시절 봄 들판의
어느 아지랑이보다 뜨거운 현기가 숨어 있다
김소월을 가르치다 보면
아이들은 낯선 지명에도 눈빛이 빛나고
지금은 죽어 한 줌 진달래빛 흙가루나 되었을
한 병약한 북녘 시쟁이의 고향과 추억에
그들의 어린 귀와 가슴의 문을 열어 젖힌다
마른 북어처럼 어눌한 저들의 국어 선생이
맹렬히 침을 튀기며 눌변을 이을 때
아이들은 은빛의 몸을 퉁기며
압록강 상류를 거슬러 올라가는 은어떼가 된다
쏟아지는 햇살의 추억을 뚫고
뗏목 위에 우뚝 선 조선 사내의 가슴팍을 스치기도
하다가
달구지에 어린 것 헌 솥 이불짐 올려 두고
눈발 속을 떠나가는 일가족을 만나기도 하다가
늦핀 개마고원 참꽃 떼거리를 기웃거리기도 하다가
꽃잎 새로 배시시 웃는 젖통 큰 산가시내의 얼굴을
붉히게도 한다
김소월을 가르치다 보면
아이들의 추억과 따뜻한 피 속에는
따로 세워진 40개의 눈물기둥은 없다
만질 수 없는 시간의 벽과 증오와 절벽도 없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북녘 사내의 낡은 사진과
오래된 시구 속에서 남녘 아이들의 눈빛은 빛나고
아이들의 피는 쿵쿵 튀어 올라
약술에 취한 듯 저들의 어눌한 국어 선생은 오늘
기분이 좋다
_곽재구 시인
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사평역에서>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이후 시집 《사평역에서》, 《전장포 아리랑》, 《서울세노야》, 《참 맑은 물살》, 《꽃보다 먼저 마음을 주었네》 등과 기행 산문집 《내가 사랑한 사람 내가 사랑한 세상》, 동화집 《아기 참새 찌꾸》, 《낙타풀의 사랑》,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자장면》 등을 냈다. 오월시 동인으로 활동했고 제10회 신동엽창작기금과 제9회 동서문학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