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대기의 변신 / 이임순
부러운 사람이 있다. 흥겹게 노래 부르고 춤 잘 추는 사람을 보면 그에게 사로잡힌다. 어쩌면 저렇게 흥이 날까 싶다가도 덜컹 겁이 나기도 했다. 그런 날은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한다. 그 두려움으로 회식이나 모임 후 가는 노래방은 되도록 참석하지 않는다. 그런데 흥겨운 자리가 먼저 펼쳐지기도 한다. 그냥 즐기기만 하면 부담이 없는데 그 무대에 서게 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 낯빛이 변한 적도 있다.
십여 년 전쯤 동문인의 밤 행사에 참석했다. 본 진행에 앞서 분위기를 띄우느라 임시사회자가 구수한 입담으로 흥을 불러넣었다. 한참 어깨춤이 들썩거리고 콧노래가 어우러져 무르익어 가던 중 지목을 했다. 맨 끝 테이블의 빨간 외투 입은 사람 앞으로 나오라는 것이다. 우리 기수가 앉은 자리다. 고개를 좌우로 돌려가며 살피는데 지금 옆을 보는 사람이라고 한다. 분명 나였다. 엉거주춤 서 있는데 왜 안 나오냐고 재촉이다.
쭈빗거리며 무대로 나갔다.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서 있는데 사회자가 한번 놀아 보라고 한다. 음악이 흐른다. 빨리 내려가고 싶은데 그대로 있으면 시간만 흐를 뿐 계속 서 있을 것 같다. 그때 누군가가 용기 한번 내보라고 외쳤다. 모두의 눈이 내게로 쏠린다. 눈을 질끔 감았다. 어디서 용기가 났는지 몸을 좌우로 흔들며 음악의 흐름에 젖어 들었다. 사회자가 손을 번쩍 든다. 음악이 멈춘다. 딴에는 열심히 했는데 나무막대처럼 움직였나 보다. 같이 흥에 취할 사람을 한 명 데려오라 한다. 사방에서 웃음보가 터진다. 춤깨나 추는 동문에게 손을 내밀었다. 손사래 치는 그의 손을 잡고 무대에 올랐다. 한 번 제대로 판을 벌이자고 한다. 물 만난 고기처럼 무대를 누비며 흔들어 대는 그를 따라 나도 미친 듯이 꼬고 비틀고 찌르며 깐족거렸다. 이왕 팔린 얼굴 체면 차릴 필요가 뭐 있나 싶었다. 박수와 웃음소리가 장내를 가득 메웠다. 팔을 쭉 뻗었다 내리는 사회자의 몸짓에 음악이 뚝 그친다. 진행자가 나한테로 다가온다. 이렇게 흥이 있는 줄 몰랐다면서 즐겁게 해준 대가로 경품 두 개를 고르라 했다. 큰 것과 중간 크기를 포개 들었다. 큰 것은 무대를 휘저은 동문에게 줄 요량이었다. 그런데 그에게도 선택권을 주며 하나를 가지라 한다. 춤은 같이 추었는데 왜 하나만 주느냐고 따지니 당신은 보조니 하나라고 것이다. 화끈거리는 얼굴로 자리에 돌아오니 그런 끼를 어떻게 감추고 있었느냐며 앞으로는 내숭 떨지 말라고 했다.
몇 해가 지나고 어느 세미나에서 말쑥하게 차려입은 사람이 내게 알은체했다. 어리둥절 해하니 본인을 소개했다. 그는 동문인의 밤 행사장으로 들어가는 것을 본 순간 예감이 들었단다. 단상에 서 있는데 옷이 눈에 띄어 지목했다는 것이다. 나도 몰랐던 내 끼를 그가 어떻게 보았을까? 그 수수께끼는 아직도 여전하다.
작년 여름 문학모임이 대구에서 있었다. 세미나가 시작되기 전 저녁 식사를 마치고 지역별 장기자랑이 있다고 공지를 했다. 서울, 부산, 경남, 인천에서는 버스를 대절하여 참석하였고, 서너 팀은 열차로 오기도 했다. 광주·전남은 몇 사람만이 참석했다. 일당백으로 뛰어야 할 판이다. 다행스럽게도 끼가 넘치는 현직 선생님 두 사람 있었다. 현장에서의 경험을 급조했다. 호텔 방의 커튼을 떼었다. 그런데 주름진 부분이 마땅치 않아 이불장의 이불로 바다의 수면 위를 연출하기로 했다. 두 사람이 잡고 있으면 한 사람이 김추자 가수의 노래 파도를 부른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은 온갖 방법으로 바다의 풍경을 몸으로 나타내는 토막연극이다. 호텔 방에서 두어 번 연습했으나 웃느라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나마 한 사람은 웃음을 참을 수 없어 연기를 못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불 잡을 사람이 어차피 있어야 하니 한 명 섭외하여 같이 동참하기로 했다.
팀마다 특색있게 꾸며 무대에 올랐다. 몸빼바지 차림의 독도 지킴이, 각설이에 태극기 부대, 가면으로 꾸민 팀, 합창에 이중창, 정가도 불렀다. 우리 팀 차례가 되었다. 허리에 두른 보자기를 풀어 무대 밖으로 날리며 입장을 하는데 난데없는 지원군이 나타났다. 양쪽 볼이며 콧등에 빨간 점을 찍은 듬직한 남자였다. 그이는 연습도 하지 않았는데 가운데 서서 곁눈질을 해가며 잘 따라 했다. 무대 바닥에 드러누워 다리를 상하좌우로 휘저으며 파도가 밀려왔다 부딪치는 장면, 돌고래가 뛰는 모습, 고기가 헤엄치는 바다의 풍경 등을 연출했다. 웃음에 빠져 정신을 차리지 못하면서도 서서 할 때는 이불을 올리고 눕거나 앉아서 하면 이불을 내리며 물 높이를 조절한다. 우리 팀은 등장할 때부터 웃음이 쏟아졌다. 출연자는 적어도 아이처럼 하며 관객도 출연진도 웃음의 도가니에 홀라당 빠졌다. 가수 못지않은 노래 실력이며 표정 연기에 우스꽝스러운 몸짓 어느 것 하나 웃음이 묻어나지 않은 것이 없다. 노래가 끝남과 동시에 무대 막이 내렸다. 그러나 터진 웃음보는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장기자랑이 끝났다. 어떻게 몇 명 안되는 인원으로 그런 발상을 하였느냐며 극찬이 이어졌다. 광주·전남은 일당백을 하는 사람들이라며 엄지손가락을 추켜 올렸다. 다방면에 유능한 선생님 덕분에 상금으로 두툼한 봉투를 받았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산다고 한다. 장기자랑 무대가 더 빛났던 것은 어설프기 짝이 없던 나의 몸놀림도 한몫했다.
동문인들 사이에서 춤 못 춘다고 뒤로 빼면 어떻게 하는 것인지 나한테 물어보라고 한다는 말에 웃은 적이 있다. 춤을 추면 막대기가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런 내가 분위기를 타면 흥겨운 자리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몸짓으로 알았다.
첫댓글 선생님의 숨겨진 끼를 발견한 시간이었네요. 용기내시길 잘 했어요.
그때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얼굴이 화끈거립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경험하셨네요.
재밌게 즐기시길 바랍니다.
그래도 여전히 막대기인데 변신은 새로운 도전이더군요. 감사합니다.
이제는 춤꾼이시네요. 춤을 배우면 일상이 더 풍요로울 것 같아요.
아직도 어리버리합니다. 춤꾼이 되고 싶을 따름입니다. 감사합니다.
멋지십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멋지고 싶은데 어렵습니다. 용기내 보겠습니다.
선생님은 연출을 하면 더 잘하겠어요.
감사합니다.잘 하기 보다 어울리려고 하는데 어렵습니다. 자신감을 가지고 연출해 보겠습니다.
대단하십니다. 멋져요.
부끄럽습니다. 용기를 더 낼 수 있도록 격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의 숨겨진 모습을 보니 정말 재밌어요. 반전 매력이네요.
부끄럽습니다.지금도 여전히 막대기처럼 춥니다.
재밌게 읽었습니다.
오! 멋지세요.
즐기는 것에 소질이 없어 더 실감나게 쓰지못했습니다.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하. 저도 글감 받고는 그 일을 쓸까도 생각했었습니다.
그랬더라면 겹칠 뻔했어요.
노래는 '파도'가 아니라 김추자의 '무인도'였습니다. 하하하하!
감사합니다. 마음은 여전히 삼십대인데 몸놀림은 나이와 동행합니다.
이렇게 노래에는 무관심입니다. 확실하게 기억시켜 주어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미안합니다. 더 실감나게 쓰지를 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