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고후5:1)
1. 집으로....
몇 년전 7살의 손자와 77세의 할머니의 이야기를 다룬 [집으로..]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이 영화는 제39회 대종상영화제에서 3개 부분(최우수작품상, 기획상, 각본상)을 수상했습니다. 이 영화의 내용은 대충 이렇습니다.
"기차를 타고, 버스를 타고, 먼지 풀풀 날리는 시골길을 한참 걸어 엄마와 7살 상우가 할머니의 집으로 가고 있다. 형편이 어려워진 상우 엄마는 잠시 , 상우를 외할머니 댁에 맡기기로 한다. 말도 못하고 글도 못 읽는 외할머니가 혼자 살고 계신 시골 외딴집에 남겨진 상우.....(중략)... 같이 보낸 시간이 늘어날수록 상우의 할머니 괴롭히기도 늘어만 간다.... 그러던 어느 날, 후라이드 치킨이 먹고 싶은 상우는 온갖 손짓발짓으로 외할머니에게 닭을 설명하는 데 성공한다. 드디어 커뮤니케이션이 시작되는가 싶지만, 할머니가 장에서 사온 닭으로 요리한 것은 '물에 빠트린' 닭. 백숙이었다."(http://www.thewayhome.co.kr/main.htm)
집은 영혼의 모태이며, 영원한 고향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집을 그리워하고, 집으로 갑니다. 이 시간에는 추석 명절을 앞두고, 집에 관한 말씀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2. 세 종류의 집이 있는데...
집에는 몇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 종류의 집은 이 세상의 집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집이란 단순한 건물만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가족, 어머니의 품 그리고 어린시절의 추억이 있는 집입니다. 우리들이 집에 가고 싶은 이유는 거기에 가족의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집으로]라는 영화가 왜 우리들에게 그렇게 잔잔한 감동을 줍니까? 바로 손자의 짖굿은 장난까지도 다 이해하고 사랑으로 받아주는 할머니의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집으로 가고 싶어하고, 어린시절의 어머니의 품을 그리워하고, 할 수만 있다면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서 어리광도 부려보고 싶은 것입니다. 명절이 되면 밀리는 차량행렬 속에서도 기를 쓰고, 고향에 가려는 숨은 내면의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동일한 원리로 사람에 따라서 집에 들어가기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외형적인 집 건물 보다도, 내면적으로 가족의 따스함을 상실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어에서도 단순히 건물만을 의미하는 House와 가족을 의미하는 Home 또는 Household라는 단어가 구분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주변에서 보면 너무도 많은 경우에 하숙집같은 House는 있지만, 따스한 Home은 없습니다.
사랑하는 고등부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들의 가정은 어떻습니까? 고등학교 시절에 차칫하면 시험과 공부라는 이유로 우리들의 집이 하숙집 정도로 전략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가족 안에서 사랑과 끈끈한 정이 약해지지 않도록, 마음의 관심을 갖도록 힘쓰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 종류의 집으로는 교회가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3:15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15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딤전3:15)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며, 진리의 기둥과 터입니다. 천국의 모형입니다. 이 교회는 여러분들의 신앙의 고향입니다. 따라서 찬송가 246장의 가사처럼 '주 계신 성전과 피흘려 사신 교회를 늘 사랑하고, 이 교회를 위해서 눈물과 기도로 섬기시기 바랍니다.
마지막 세 번째 집은 천국입니다. 고린도후서 5:1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1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고후5:1)
성경은 분명하게 이 세상의 집이 무너지면(우리의 생명이 다하면), 하나님이 지으신 영원한 집이 하늘에 있다고 했습니다. 바로 천국입니다. 천국은 하나님이 믿는 성도들인 우리들을 위해서 지으신 영원한 집입니다. 이 땅의 집은 영원하지 못하지만, 하늘에 있는 집은 영원합니다. 이 땅의 집은 수해가 나면, 없어질 수도 있습니다. 테러에 공격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지으신 천국의 집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3. 생명의 길 되신 예수 그리스도
공항이 있으면, 공항가는 길이 있고, 학교가 있으면, 학교 가는 길이 있듯이, 모든 집에는 그 집으로 갈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천국의 집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친히 하늘에 영원한 천국집을 만드셨고, 그곳에 갈 수 있는 길도 만드셨습니다. 그 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요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1-6)
하나님은 십자가라는 하나님만의 특수공법(?)을 사용하여, 하나님이 만드신 천국집과 우리들 사이에 길을 뚫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요, 가족이 됩니다. 인천공항에 가는 길로 들어서면, 인천공항으로 직행하듯이,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만 하면, 이미 그 사람은 천국에 가는 길에 들어선 것입니다. 사단은 사람들을 현혹해서 천국에 갈 수 있는 다른 길이 있는 것처럼 꾸밉니다. 그러나 다른 길은 없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주변에서 보면 해마다 추석명절이 가까워 오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가운데에서도 부모님과 함께 지방에 다녀오실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이 명절에 다시 한 번 우리에게 가정과 교회와 천국의 집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천국에 가는 길되신 예수님의 은혜를 깊이 되새기는 기간이 되기 바랍니다.
*추신 : "재연아, 아래에 있는 내용은 설교는 아니지만, 주보에 함께 올리기 바란다. 주보가 조금 두꺼워 지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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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추석명절을 앞두고)
명절이 되면 제기되는 질문들과 기독교 입장
김상수목사
추석 명절을 앞두고 조상숭배와 추모예배(또는 추도예배)의 차이점등 자주 제기되는 질문을 살펴보고, 그에 대한 기독교의 입장을 정리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기 바랍니다.
1. 명절이 되면 제기되는 질문들과 기독교 입장
(질문1) "왜 기독교는 조상을 숭배하지 않는가? 불효하는 종교가 아닌가?"
기독교는 조상숭배가 아니고, 조상추모이다. 숭배(崇拜)란 신(神)으로 섬기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조상숭배는 조상을 신으로 숭배하는 것을 말하며, 제사는 바로 그 조상에 대한 숭배예식이다. 기독교는 조상숭배를 거부한다. 왜냐하면 예배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 한 분만으로 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추모(追慕)란 죽은 자의 뜻과 삶을 기념하는 것을 말한다. 교회에서도 추모예배를 드린다. 그러나 교회에서의 추모예배는 단지 조상의 삶과 뜻을 기념하는 것으로만 끝나지 않고, 후손들이 더욱 신앙적인 삶을 살겠다는 의미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다. 이 추모예배를 통해서 '우리 집안의 주인은 하나님'이심을 드러내는 것이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조상에게 제사를 드리는 것을 가지고 기독교를 불효의 종교다! 아니다!라고 규정하는 것은 이미 접근 방법부터가 틀린 것이라는 것이다. 기독교는 조상을 신(神)으로 숭배하는 것을 반대한다. 그렇기 때문에 마치 조상을 신으로 숭배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불효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기독교는 조상의 뜻을 추모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서 온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 아버지께 예배드리는 효도 중에 최고의 효도를 하는 종교이다.
(질문2) "존경의 표시로 절할 수 있지 않은가?"
가끔 절하는 것에 대해서 "그냥 존경의 표시일 뿐이지 내가 그 죽은 조상을 믿어서 그러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설령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항변해도, 이미 절하는 것은 그 자체가 존경하는 의미 이상의 것이다. 절하는 것은 그 자체가 이미 귀신에 대한 예식(禮式)의 일부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절하는 것은 자신의 본뜻과는 관계없이 이미 귀신숭배 예식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리고 존경의 표시로 절한다면, 이미 추모예배 자체가 그 존경의 의미를 내포하기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질문3) "정말 죽은 자가 와서 제사를 받는가?"
죽은 자는 다시 돌아와서 제사를 받을 수 없다. 죽은 조상이 와서 제사를 받는 다는 말이 아니다. 죽은 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히9:27), 천국과 지옥에 간다(부자와 나사로의 비유). 그리고 다시 이땅에 돌아올 수도 없다. 그럼 누가 그 제사를 받는가? 오늘 본문은 그것이 귀신이라고 했다. 그럼 귀신은 무엇인가? 귀신은 일반적으로 천사장 루시퍼와 함께 저주를 받아 쫒겨난 타락한 천사들의 무리를 의미한다. 이들이 많은 사람들을 속이고, 마치 죽은 조상인 것처럼 속이고 나타난다. 마귀의 처음부터 거짓말쟁이 였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분명히 경고하기를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고전10:20)"라고 했다.
2. 왜 사람들이 어리석은 행동을 하는가?
이처럼 마귀에게 속으면서도 속는 줄을 모르고 행동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이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은 영적으로 죽어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영적으로 죽게된 계기는 아담과 하와의 범죄하여 하나님을 떠난데 그 기원이 있다. 영적으로 죽은 사람은 무엇이 참된 것이고 무엇이 거짓된 것인지를 분별하지 못한다. 불교에서 인간의 본성을 진여자성(眞如自性) 즉 인간의 본래 마음은 깨끗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비유로서 연못을 실례로 든다. 물에 비친 세상의 모습이 추악하다해도 그것은 자세히 보면 연못에 비친 세상이 추악한 것이지, 연못자체가 더러운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연못 속이 중요하다. 지난 봄에 비가 온 다음에 중랑천에서 수 백마리의 물고기들이 죽은 적이 있다. 그 원인에 대해서 조사했더니, 놀랍게도 이미 강바닥에 쌓여있던 많은 오염 물질들이 비가 오면서 흐르는 물과 뒤섞여지면서 물고기들이 죽게되었다는 것이다.
무슨말인가? 인간의 마음은 언뜻보면 깨끗한 것같지만(또는 수행을 통해서 깨끗해지는 것같지만), 그 근본심령 밑바닥에는 온갖 추잡한 더러운 죄성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이것이 어느 정도로 행동에 많이 드러나고 있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조금만 충동질을 하고, 문제가 생기면 금방 흙탕물로 변한다. 예쁘게 보이는 여학생들의 범죄를 보라. 어린아이들의 범죄하는 모습들을 보라 이것이 하나님을 떠나서 영적으로 죽어있는 인간의 마음상태이다. 마귀는 바로 마음을 휘저어 놓는 존재이다. 그래서 죄악의 흙탕물 속에서 그것이 죄인지도 모르면서 마귀에게 속으면서 몸부림치다고 죽어가는 것이다.
3. 하나님이 주신 유일한 방법 : 예수 그리스도
인간은 이러한 죄악 가운데서 스스로를 깨끗게할 자정(自淨) 능력이 없다. 그리고 이처럼 더러운 심령의 상태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이것은 아무리 수행을 많이해서 겉으로는 깨끗한 것처럼 보이는 수도자(修道者)라해도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완전하게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죄악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뿐 아니라, 또 다시 죄를 짓게 만드는 마귀(魔鬼)까지도 이길 방법을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는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의 모든 죄악을 깨끗게해 주셨을 뿐 아니라, 부활로서 마귀를 이기셨다. 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가 천국백성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을 보내주셔서 계속적으로 이기면 살아갈 수있도록 해주셨다. 십자가는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다. 죄인을 의인되게 하고, 더러운 심령을 깨끗하게 만든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만히 하실 수 있는 십자가 보혈의 능력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할 때 비로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무엇이 참된 것이고, 거짓된 것인지를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고, 참다운 효도가 무엇인지를 알게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