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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레이션: 1972년 2월 21일,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중국의 베이징에 모습을 드러냈다. 마오쩌둥을 만나기 위한 전격 방중이었다. 닉슨과 마오쩌둥, 이들의 갑작스러운 만남은 세계를 놀라게 했다. 미중회담 이후 요동치게 된 국제정세, 그 중심엔 대만이 있었다.
최원정/KBS 아나운서: 379번째 역사저널 그날 입니다. 대만은 왜 동북아의 화약고가 됐나? 그 역사적 기법과 해법을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오고 있는데요. 오늘은 닉슨과 마오쩌둥이 만난 그날을 살펴 보겠습니다.
허준/방송인: 아니 2주 동안 쭉 배워오기로는 아무리 미우니 고우니 해도 미국은 언제나 나의 편, 이게 대만의 생각이었잖아요.
김지훈/한양대학교 사학과 겸임교수: 오늘 중국하고 대만이 왜 국가간의 관계가 아니고 양안관계 라고 부르게 되는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최원정: 우리가 역사를 통해서 오늘의 국제정세를 이해하는 귀한 시간을 갖고 있지 않겠습니까? 오늘 특별히 前국립외교원장이셨던 국제정치학자 김준형 교수님을 모셨습니다.
김준형/한동대학교 교수: 벌써 9년이나 지났습니다.
----------------풋풋한 9년 前MC/최원정: (2013.12.14, 8회<찹쌀떡 장수, 외부대신 되던 날>편) 왜 미국이 조선을 선택했을까요? 김준형 교수님,
김준형: 안녕하십니까? 그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에 미국의 외교를 알아볼 필요가 있는데요. 특히 러시아가 조선에 대한 관심이 남하정책에 대해서 미국이 어떤 역할을 해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이런 기대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최원정: 그런 또 속사정이 있었다는 것 귀에 쏙쏙 들어왔습니다. 잠시 후에 궁금한 거 또 여쭈어 볼게요. 감사합니다. (9년 만에 재회)
최태성/한국사 강사: 두 분은 9년이 지났는데 그대로 세요.
최원정: 아니 교수님이 그대로 세요.
이시원/배우: 얼마나 설명을 잘 해 주셨으면 귀에 쏙쏙 들어왔다고 하셨어요?
최원정: 진짜 역사와 국제정세를 너무 이해하기 쉽게 풀이해 주셔서 오늘도 기대가 돼요.
김준형: 좀 부담되는데~
최원정: 근데 오늘 다룰 그날이 국제정치에서는 굉장히 중요한 날이죠.
김준형: 엄청나게 중요한 날이죠. 심지어 어떤 말이 나왔느냐 하면 Nixon goes to China(닉슨이 중국에 간다) 라는 말이 적대적인 관계에 있는 나라가 극적으로 화해한다든지 정책이 극적으로 변하는 것에 관용구가 될 정도였어요. 왜냐면 낙슨은 강경한 반공주의자이거든요. 뼈 속까지~그런데, 중국을 갔단 말이에요. 그래서 닉슨 쇼크라는 말까지 유행했었습니다.
최원정: Nixon in China 라는 오페라 까지 만들어졌다니까 (오페라 닉슨 인 차이나Nixon in China-1987년 미국 초연 뒤 세계 여러 나라에서 성공리에 공연 *조수미가 마오쩌둥 아내역을 맏기도 했음), 그 정도로 뭔가 충격적인 사건이었다고 봐야 되는 거죠.
최태성/한국사 강사: 그런데 중요한 건 뭐냐면 그 사건이 우리한테 대단한 영향을 미치거든요. 닉슨이 중국을 방문한 해가 1972년 이잖아요. 그 1972년에 우리나라에도 중요한 사건이 있었거든요. 그게 뭐냐면 바로 박정희 정부의 1972년 10월 유신입니다. 이 유신선포가 바로 닉슨의 중국방문과도 연결이 됩니다.
허준: 왜요?
최태성: 허준씨가 이래서 세계사를 배워야지~영상을 한 번 보겠습니다.
---------------한-미유대 계속강화: (동영상)-------------
방송: 닉슨 미국 대통령의 특사 자격으로 우리나라에 온 마샬 그린 미국무부 차관보는 이번 닉슨 미국 대통령의 중공방문에서 한반도에 관한 어떤 비밀 흥정도 없었으며 미국은 한국을 계속 강력하게 지원할 방침임을 알렸다고 김성진 청와대 대변인이 발표했습니다.
최태성: 박대통령 표정 한 번 보세요. 굉장히 못마땅한 표정인데~닉슨 방문 이후에 동맹국을 달래려고 온 거예요.
허준: (화면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표정을 보면 끝까지 손을 딱 모우고 굳은 자세로 안 움직이다가 나중에 한 숨까지 쉬는 느낌이 있었거든요.
이시원/배우: 굉장히 방어적이에요.
허준: 그만큼 기분이 언짢다.
최태성: 맞습니다. 그 시대가 어떤 시대입니까. 무찌르자 공산당! 이런 시대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우리의 동맹이었던 미국 대통령이 중공을 갔다? 뭐야 이거 미국이 아시아의 공산화를 방치하는 거 아냐? 이런 생각이 들 수 있잖아요. 이런 과정 속에서 박정희 정부는 이 상황을 대처해야 된다 라는 명분을 내놓으면서 10월유신을 선포하는 거예요. 10월유신 특별선언문 초고문에 사실은 닉슨이 중공을 방문했기 때문에 이런 특별조치를 한다는 문구가 들어가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물론 미국이 강력하게 반발을 해서 삭제는 되었지만~
최원정: 유신이 얼마나 중요한 명분이 있는건데 그걸 꼭 밝히고 싶었을텐데~삭제를 해서 아쉬웠을텐데~
최태성: 미국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김준형: 사실 많이 안알려졌는데요. 북한도 엄청난 충격을 받았겠죠. 그래서 우리는 10월이잖아요. 북한은 2개월 후인 1972년 12월에 헌법을 바꾸어요. 원래 건국헌법을 1948년에 제정했는데 그걸 사회주의 헌법이란 이름으로 헌법을 통째로 바꾸고요. 우리 유신처럼 일인 지배체제를 확고히 합니다. 주석직을 처음으로 불리게 되고요. 중국의 배신에 대한 대내적 결합이 북한에도 똑같이 갑니다.
최태성: 우리는 미국 때문에 놀랐고 북한은 중공 때문에 놀란 거예요.
허준: 저는 세번 놀랐어요. 뭐냐하면 북한에 헌법이 있었다는 사실에 놀랐어요. 두번째는 이것이 이런 변화를 일으켰다는 것에 놀랐고 마지막은 이전 까지는 그러면 종신 독재체제가 아니었다는 얘기잖아요.
최원정: 닉슨의 방중이 한반도에 나쁜 영향을~ 우리 피해자이네
이시원: 듣고 보니 그러네~ 하여튼 미국과 중국의 화해를 계기로 또 핑계로 두 독재자께서 권력을 공고히 하셨네요.
허준: 전 세계를 봐도 두 독재세력이 양쪽으로 딱 나뉘어져 있잖아요. 무찌르자 공산당! 반미! 자유진영의 노예들! 이렇게 싸우고 있는데 갑자기 화면에 하~하~하~ 하고 있는 모습 보니까
최원정: 정말 지구를 들썩이게 한 사건입니다. 거기에는 작은 공 하나가 있었습니다.
------------(동영상) 86년 아시안 게임 남자탁구 단체전, 대중공전 9월 24일, 사실상의 결승전에서 최강국 중국과 맞붙은 한국, 4:4 동점인 가운데 마지막 단식 경기만 남았다. 모두가 숨 죽여~
허준: 저 때 모든 캐스터들이 중국을 이기면 만리장성을 넘어간다고 했어요.
이시원: 저 때는 중국 탁구가 압도적이었잖아요.
김준형: 지금도 압도적이에요
-----------방송: 5시간 20분의 혈투 끝낸 회심의 일격, 승리의 기쁨에 들어 누운 선수들 위로 동료 선수들과 코치진이 한데 엉겼다. 탁구채를 놓치않은 그날의 스타, 대한민국 안재형 선수였다!
----------한국 탁구 레전드 안재형 선수가 그날에서 탁구를 치고 있다/상대는 이광용 아나운서
최원정: 계속 탁구만 치실 건 가요? 두 분~
------------안재형의 강력한 스매싱~86년, 그날의 감동을 연상시키는 강력한 드라이브로 마무리-
일동: 안녕하세요
안재형/前탁구 국가대표: 現프로탁구리그 위원장을 맡고 있구요. 前탁구국가대표 안재형입니다.
최원정: 그런데 위원장님, 이광용 아나운서와 탁구 쳐보니까 어때요?
안재형: 많이 쳐보지는 않았지만 잘 치시네요. 근데 성격이 조금 급하신 거 같애요.
이광용: 탁구를 안친지가 오래 돼서~ 잠깐의 랠리로도 저를 다 파악하고,
안재형: 탁구는 내가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상대를 파악하고 대처하는 능력이 중요하거든요. 몇번 치면서 느끼고 상대의 움직임을 보고 또 성격과 의도를 파악하고~
이시원: (이광용을 향해) 성격이 급하셔~
이광용: 사실 우리 안재형 위원장은 본인도 전설이지만 아주 가까운 분 중에 탁구전설이 있습니다. 여자 세계랭킹 1위 자오즈민~
최태성: 지금 오셨어요?
안재형: 지금 손주 보러 미국 가 있어요.
허준: 손주요.
안재형: 네, 둘째를 가져가지고 미국 가서 도와 주려고 가 있고
최원정: 할아버지 시라고~
이광용: 아드님이 미국 PGA 투어에서 활동하는 안병훈 프로잖아요.
이시원: 가족이 모두 구기에 DNA가 있으셔 가지고~
허준: 작은 공을 좋아하는 가족이네
안재형: 제가 정말 재미있게 보고 좋아하는 이 프로인데 같이 나왔으면 좋았을텐데 아쉽습니다.
이시원: 그러면 부부탁구 국가대표 출신인데 두 분이 서로 가끔 치시나요?
안재형: (선수 때 많이 쳐서) 방송이나 행사 외에는 거의 친 적이 없습니다.
이광용: 부부 싸움 하시다가 최고로 흥분했을 때 탁구로 승부내기?
안재형: 그런 상상을 많이 하시는데 그런 상황은 없어요.
허준: 붙으면 누가 이겨요?
안재형: 공식대회 혼합복식에서는 두 번 다 제가 졌어요.
------------(동영상) 84년 10월 이슬라마바드 아시아 탁구 선수권 대회: 탁구선수들에겐 경기 중 서브를 기다릴 때가 가장 긴장되는 순간이다. 서브를 기다리는 중국 여자선수가 있습니다. 중국대표-자오즈민, 한국대표-안재형,
이광용: 이게 지금 혼합복식 맞대결?
안재형: 세계대회 준결승에서 붙은 거예요.
내레이션: 그때 마다 자오즈민이
최원정: 저 때는 안 사귀고 있었나요?
이광용: 사귀고 있었지
내레이션: 어딘가를 지그시 바라보는 자오즈민 선수~ 그 시선이 머무는 곳에~안재형 선수가 있었다.
이광용: 두 분의 표정을 보시면 서로를 향한~
안재형: 그 정도는 아니고요. 큰 경기를 하다 보면 전부 한 경기장에서 진행되는 관계로 대회에 몇번 나가면 선수들을 알게 되고 정이 들고~ 그렇죠.
이광용: 친구되고~ 정도 들고~ 그러다 애인도~ 뭐 그런 거 아니겠어요, 그런데 저는 궁금한 게 사랑에 빠질 수는 있어요. 근데 한 사람은 대한민국이고 한 사람은 중공이야 결혼까지 골인하는 건 그건 사실 엄두가 안 나는 일이었을 것 같은데~
안재형: 과정을 다 이야기 하기가 너무 어려워서 선수생활하는데 연애기사가 많이 나거나 부담이 되어서 세계대회 기간 중에 집사람이 인터뷰를 했어요. 자오즈민이 아니다 헤어졌다 그리고 그 뒤에도 편지는 계속 주고 받고 그렇게 연애하다가~
이광용: 겉으로만 이별했다 라고 하고~
안재형: 그리고 1989년 중립국 스웨덴에서 혼인신고 하고~
최원정: 스웨덴에서 결혼하셨어요.
이광용: 두 분의 결혼생활이 얼마나 알콩달콩 했을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영상을 준비했습니다.
---------------(동영상) 며느리 삼국지(1996년 作): 해장국집 창수옥에 시집온 한-중-일 며느리 이야기를 그린 드라마, 둘째 며느리役으로 등장했던 자오즈민
홍학표/극중 집안의 사고뭉치 둘째아들役: 자으즈민, 내가 솔직하게 다 얘기해 줄게, 먹기 싫은 술도 마시고, 만나기 싫은 여자도 만나고,
자오즈민: (둘째 아들 따귀를 때림) 아버지 말이 다 맞아! 사기꾼이야! 내 앞에서 영영 없어지라고 해!
둘째 아들: 아직 한 말 남았다
자오즈민: (시모를 향해) 상태씨 나한테 주세요!
김용림/시모役: (그 적극성으로) 둘째 아들(홍학표분)을 쟁취한(?) 차오칭, 나한테는 안성맞춤의 배필이야 (그렇게 며느리 삼국지의 중국 며느리가 된 차오칭),
이광용: 그 드라마가 생생하게 기억나시죠?
안재형: 기억나죠, 반은 제가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한국말을 제대로 못할 때니까 대본을 제대로 볼 줄도 모르고~ 제가 방송국에 왔다갔다 하면서 대본 다 읽어주고 통역도 해주고 했으니까
이광용: 매니저이셨어요. 왼손잡이 탁구선수였던 자오즈민씨가 왼손으로 따귀를 때렸어요. 저 드라마는 언제 방영되었느냐면 한중수교가 1992년이었어요. 그로부터 4년뒤 1996년에 방영된 일일드라마 며느리 삼국지 3국간에 화해와 어울림이 기획의도였는데 또 한편으로는 그만큼 갈등이 있었다 그런 방증이 아닐까 싶기도 하구요. 그런 역경을 넘어 실질 커플이 바로 제 옆에 안재형 위원장과 자으즈민씨 커플입니다.
이시원: 이거는 국경을 뛰어넘는 사람이 아니라 국제정세를 뛰어넘은 사랑아닌가요?
최태성: 사랑이 죄인가요?
허준: 지금이야 우리가 이러지만 사실 80년도 하면 저희 어렸을 때 반공포스터 그리고 웅변대회하고 공상당이라고 표현하며 이런 단어를 요즘은 안 쓰지만 빨갱이 라고 표현하던 시절이었어요. 근데 중국인과의 만남 자체가 부담이 되었어요.
최태성: 심지어 한중수교도 안된 상태~
이광용: 핑퐁 외교, 정말 선구자 산증인 아니겠습니까?
안재형: 그런 얘기들을 많이 해주시는데 진짜 핑퐁외교는 미중 핑퐁외교가 아닌가 생각하구요. 탁구가 이뤄낸 엄청난 사건이잖아요?
이광용: 제가 조금만 다 설명을 드리면 일본 나고야에서 세계 탁구선수권 대회가 열립니다 1971년 3월 28일~4월 7일, 일본이 세계 최강인 중국을 초청했구요. 대회가 끝날 무렵 누군가 미국과 중국 선수단의 상호교류를 제안합니다. 그리고 1971년 4월 10일 미국 탁구선수단과 기자가 중국의 베이징을 공식방문합니다. 그렇게 적대국가였던 미국과 중국 사이에 화해의 분위기가 조금씩 만들어집니다.
안재형: 그래서 작은 탁구공이 지구라는 큰 공을 움직였다 라고 하죠. 세상을 바꾸는 탁구, 한국 프로탁구리그도 많이 성원해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이광용: 탁구로 인생도 사랑도 확 휘어잡은 안재형 위원장이었습니다.
최태성: 미중 관계개선의 상징, 탁구가 정말 어렵다는 한중관계를 뛰어넘은 안재형-자오즈민 커플이 있었네요.
최원정: 스포츠 외교의 주인공 탁구, 남북탁구 단일팀의 감동도 갑자기 떠오르는데~
최태성: 탁구 대단한데요.
김지훈: 그런데요. 엄밀하게 얘기하면 미중관계의 개선은 그 이전부터 이미 추진되고 있었고 양쪽에서 서로 애정의 표현을 하고 서로 구애를 하고 있었고 우리 서로 관심 좀 가지자 하고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나고야 탁구대회를 통해 가지고 미국과 중국의 수뇌가 모두 협력하기로 했죠. 그래서 미중관계가 급속도로 진전이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김준형: 실제 출발은 조금 어려웠습니다. 그 뒤 진전이 되고 또 탁구로 넘어가는 데요. 닉슨이 언제 취임을 하느냐 하면 1969년 1월에 취임을 해요. 그런데 닉슨이 반공주의자였습니다. 반공주의자가 등장을 하니까 미중관계가 더 얼어 붙겠죠. 취임 1주일 후 기자회견을 하는데 기자들이 혹시 중국하고 관계를 개선할 마음이 있습니까? 이렇게 질문을 합니다. 중국의 적대적인 정책을 거론하면서 아주 단호한 어조로 저들이 변하기 전에 우리가 변할 일은 없다.
이시원: 굉장히 단호하게 보이는 데 잘 생각해 보면 니네가 변하면 우리도 변할 수 있다 그거잖아요.
최원정: 나 그냥 니가 싫어, 그냥 가! 하면 이거는 좋아질 여지가 없는데~ 나는 니 안경이 마음에 안들고 네 웃음 소리가 싫어! 하면 그 두개만 바꾸면 되는 거잖아요.
최태성: 지금 나 들으라는 소리요?
최원정: 국가간의 관계라는 게 실제로 남녀 사이 같지 않아요? 예민해서
이시원: 밀고 당기고 밀고 당기고
김준형: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밖으로는 그렇게 얘기했지만 당시에 미국이 엄청나게 골칫거리가 하나 있었는데 그것을 풀 열쇠를 가진 나라가 중국이었어요.
내레이션: (동영상), 1954년 베트남이 북위 17도선으로 분단된 후 내전이 일어났다. 미국은 베트남에 공산화를 막기 위해 남베트남 정부를 지원했고 곧 전쟁은 미국 대 북베트남의 전면전으로 확대됐다. 세계 최강을 자처하던 미국, 그러나 북베트남을 상대로 고전을 면치 못한다. 길어지는 전쟁으로 미군의 피해는 커져가고 국내 반전 여론까지 거세지는 상황, 닉슨은 타개책이 필요했다.
김준형: 닉슨이 대통령이 됐을 때 이미 베트남 전쟁이 한참 진행 중이었는데요 취임 3개월 후에는 자기가 반공주의자니까 뭘 보이고 싶어서 병력을 증파까지 합니다. 그런데 생각만큼 전쟁이 미국의 뜻대로 돌아가지를 않습니다. 사실 세계 최강이라는 미국이 그 명성이 무색하게 계속 패배를 하니까 미국이 생각한 것은 저렇게 어려운 것은 배후에 누가 있다. 특히 중국이 배후에 있다고 생각한 것이죠.
김지훈: 우리는 지난 시간에 항미원조 전쟁, 한국전쟁에 대해서 얘기를 했었죠. 근데 이때 중국에서는 항미원월(抗美援越) (중국이 부르는 베트남 전쟁), 베트남을 지원하는 대규모 운동이 일어나고 실제로 군대를 파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1965년도부터 후방지원 부대를 중심으로 해서 파견이 시작되었구요. 1965년에는 거의 32만 병력을 투입해요. 그렇게 지원을 해주게 되니까 전쟁이 미국의 뜻대로 쉽게 끝날 수 없는 상황이었죠.
김준형: 거기에다 이유가 하나 더 있습니다. 뭐냐하면 역시 그 당시는 미소냉전이 격화되었던 시기였기 때문에 결국 소련의 적대관계인데 만약에 중국을 통해서 소련을 견제할 수 있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침 중국과 소련 사이에 틈이 생긴 것을 포착하게 됩니다.
최원정: 중국과 소련이 왜 틈이 벌어졌을까요? 사실 두 나라는 같은 공산주의 국가고 형님 동생하면서 사이가 좋았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는데~
김준형: 다들 그렇게 생각하는데 실질적으로 중국이 가장 긴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나라가 소련이잖아요. 우리는 아편전쟁으로 중국이 홍콩을 영국에만 뺏긴 것만 알고 있는데 (1839~1842년 제1차 아편전쟁 결과 청이 영국에 홍콩 할양) 실제로 19세기에 가장 중국 영토를 많이 가져간 나라가 러시아입니다. 연해주 그 다음에 하바로프스크 남부 해륭장성 그리고 중국의 서북부까지 150만평방킬로미터를 가져가 버린 나라가 러시아입니다. (제2차 아편전쟁 전후로 연해주 등 약150평방킬로미터를 러시아에 빼앗긴 중국),
최재성: 저 과정에서 한반도가 러시아와 영토를 마주하게 되어버린 거죠.
허준: 저 때 킹크랩을 러시아가 다 가져간 거네
최태성: 오래 전부터 중국과 소련은 갈등이 증대하고 있는 상황이었거든요. 1949년도에 중화인민 공화국이 수립이 되잖아요. 그 이후로 중국은 친소 일변도로 가는데 사실 과도기에 삐걱삐걱하는 모습이 보여지는데 그중에 이유의 하나가 뭐냐면 또 한국과 관련이 되어 있어요. 6.25 전쟁 때 소련이 지원해 주고 중국이 참전하잖아요. 지원해 준 게 무료가 아니에요. 전쟁 끝나고 지불을 해야 되는 데 중국은 막대한 지원금을 갚아야 되는 그런 상황이 계속 벌어지고 있었던 거예요. 소련으로부터 미그기라든지 고가 무기를 샀단 말예요. 예를 들면 시원씨가 나에게 필요한 게 있으면 싸게 줄 수도 있잖아요. 그럴 수가 있잖아요. 그런데 소련이 제3 세계에 팔았던 무기 보다 중국에는 더 비싸게 팔았던 거예요. 지금 중국이 기분 나쁘죠.
이시원: 나쁘죠.
최태성; 핵무기 기술 사실 중국도 핵을 갖고 싶었는데 소련이 미국과의 관계 때문에 핵무기 기술은 줄 수 없어 하고 거부합니다. 이런 상황이 싸이고 싸이면서 점점 더 커지게 되는 거죠.
김준형; 특히 1969년에 엄청난 사건이 일어납니다. 군사충돌이 일어납니다. 전바오다오(珍寶島) 라는 작은 섬이에요. (우수리강 중간에 있은 작은 섬) 0.74평방킬로미터 되는 섬인데요. 거기를 중소국경선이 지나갑니다. 그러니까 평소에 국경 수비대가 대치를 하고 있었지만 사건이 없어서 평화롭게 지내고 있었어요. 근데 홍수가 났어요. 그러면서 국경선이 약간 희미해집니다. 처음에는 거기 내 땅이야 밟지마 이런 식으로 신경전을 벌이고 장난 치기식으로 하다가 주먹질이 오가고 몽둥이가 등장했는데 이걸로 끝나지 않고 장갑차가 등장하고 대전차포가 등장하는 무력충돌로 이어졌습니다.
허준: 문제가 뭐냐 하면 야~ 거기 금 밟지바 넘어오면 내꺼야 서로가 감정분쟁부터 시작된 거잖아요.
이시원: 술자리 싸움도 그렇잖아요. 처음에는 뭘 보고 이렇게 시작했다가 니가 먼저 쳐다 봤잖아 이러면서 주먹다짐으로 번지고~
허준: 예전에는 소련이 이렇게 얘기하면 중국이 알았어 근데 우리 땅도 맞는데~ 이랬는데 이번에는 감정이 올라가면서 너희들이 뭔데 이래라 저래라 해 하면서 주먹다짐이 일어나고 하다가 특수부대 투입이 되고 큰 분쟁이 된 건데 사실은 전 세계적으로 이런 작은 불씨가 큰 전쟁이 된 경우가 많아요. 인도와 중국이 2020년에 주먹다짐으로 됐다가 국경분쟁을 일으켜 전 세계가 긴장했던 이유가 이게 큰 전쟁으로 번질 수가 있거든요.
최태성: 그러다가 스탈린 사망 이후에 흐루시쵸프가 등장하잖아요. 흐루시쵸프가 서방과 연결할려는 시도를 보일려고 하니까 마오쩌둥이 완전히 충격을 받은 거예요. 이러다가 우리만 고립되는 거 아니야 이거 어떻게 타개책을 우리가 강구하지 하는 고민을 합니다. 허준씨가 최대로 좋아하는 데서 아이디어를 얻습니다. 뭘까요?
이시원: 삼국지! 삼국지 팬이잖아요.
허준: 삼국지 라는 것은요. 전략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있는 거예요.
김지훈: 실제로 1969년에 마오가 국제 정세에 대해서 연구를 하고 그 결과를 보고하도록 지시를 해요. 그래서 당시에 미국과 소련과 중국과의 관계를 어떤 식으로 풀어나가야 될 것인가를 연구를 하는데 그 결과 미국이 중국을 공격할 건 아니다. 국경을 맞대고 있는 소련이 자신들의 안보에 직접적인 위협이 되고 있기 때문에 미국과 손을 잡을 필요가 있다. 이것은 마치 삼국시대에 제갈량이 융중(隆中) 대책을 내놔서 약한 촉나라가 오나라와 손을 잡고 북쪽 위 나라에 대항을 해야 한다 라는 이야기를 인용을 합니다.
이시원: 마오쩌둥이 손자병법이랑 삼국지를 엄청 좋아했다고 했잖아요. 거기서 힌트를 얻었네요.
최원정: 서로 손을 잡는게 답이라는 건 아는데 지금 미국도 그렇고 중국도 그래요. 그걸 어떻게 말해요? 먼저 말하는 순간 동맹국에게 비겁한 사람이 되잖아요.
이시원: 누가 먼저 손 내밀어야 하나?
최태성: 노래도 있어요. 갑돌이와 갑순이는 사랑을 했더래요. 이 노래 알아요?
이시원: 저 장말 처음 들어요.
허준: (갑돌이와 갑순이-구전 민요를 바탕으로 개사-편곡한 1960년대 가요) 정말 몰라요?
최태성: 갑순이와 갑돌이가 헤어져요. 웬지 알아요? 겉으로는 안 그런 척 했더래요.
이시원: 겉으로는 안 사랑한 척~
최태성: 서로 속 마음 얘기를 안해서~ 얘기를 해야지 서로 좋아하고 사랑하면 좋아해 해야지
김지훈: 중국을 방문했던 에드거 스노(1905~1972) 라는 중국의 붉은 별을 쓴 작가인데 마오쩌둥이 에드거를 만나서 노골적으로 얘기를 했대요. 나는 닉슨을 만나고 싶다. 닉슨이 대통령 신분이든 아니면 여행가의 신분으로 오든 나는 만날 의사가 있다 라는 걸 이야기를 합니다.
이시원: 이건 거의 라이트가 아니라 빔을 쏘았는데요.
최원정: 정상회담을 위해서는 실무자들이 오고 가고 하면서 세부사항 다 정해 놓고 메뉴는 다 짜 놓은 다음에 나중에 정상들은 사인만 하는 상징적인 거~ 그렇다면 닉슨의 방중에도 누군가가 총괄했다는 얘긴데, 누구였을까요?
김준형: 미국에는 헨리 키신저였습니다. (헨리 키신저-당시 대통령 안보 보좌관 훗날 국무장관 역임, 1973년 노벨 평화상 수상), 대통령 안보 보좌관이었고 뒤에 국무장관이 돼죠,
최원정: 그러면 중국에서는 누가 있죠?
김지훈: 중국은 당시 국무원 총리였던 저우언라이(周恩來)가 외교부장과 외무장관을 했거든요. 그 사람이 중심이 되어 가지고 팀이 움직이게 됩니다.
최원정: 우리가 아는 주은래~저우언라이
최태성: 헨리 키신저와 저우언라이, 정말 쟁쟁한 2인자들인데 중요한 건 우린 딱 요 두 사람만 알고 있잖아요. 이 두 사람 사이에 또 다른 사람이 있어요.
---------------이광용/아나운서; (초상화) 누군지 아시겠어요?---------------
일동: 마르코 폴로입니다.
이광용: (마르코 폴로-아탈리아의 여행가 (1254~1324년) 700년 전 중국을 여행하고 동방견문록을 구술), 700년 전 중국을 여행한 이 사람의 이름을 딴 이름하여 폴로계획, 닉슨의 방중은 아주 극비리에 진행됐습니다. 얼마나 극비였나구요? 우리 편도 모르게, 1971년 7월 1일 헨리 키신저가 워싱턴을 출발합니다. 사이공-방콕-뉴델리를 거쳐서 최종 목적지인 파키스탄의 수도 이슬라마바드에 도착하죠. 키신저는 파키스탄 대통령 초청 만찬에 참석했는데요. 그런데 어이구 배야! 갑자기 배를 움켜쥐고 쓸어집니다. 세계 외교사에 길이 남을 명연기였어요. 마침 당시에 파키스탄에 이질이 유행했어요. 그래서 키신저도 이질에 걸렸냐 보다 사람들이 다 그렇게 생각하게 한 거죠. 파키스탄의 칸 대통령이 엄청나게 당황하면서 의사 불러~ 의사! 의사! 안절부절 못했습니다. 그런데 칸 대통령의 액션도 연기였어요.
일동: (놀람) 오~!
이광용: 왜냐~칸 대통령이 제3의 인물이었거든요. 이게 다 각본 안에 있었던 거예요. 주연배우: 헨리 키신저(미 안보보좌관) 야히아 칸(파키스탄 대통령) 저우언라이(중국 외무장관) 이 칸 대통령의 연기도 일품이었습니다. Are you okayed? I‘m sorry about your condition, 여기 이슬라바마드가 환경이 안좋기 때문에 산 좋고 물 좋은데 가셔서 요양을 하셔야겠습니다. 대통령 별장으로 가라고 합니다. 기자 여러분! 키신저는 우리 대통령궁으로 갑니다. 일방적으로 발표까지 해버립니다.
허준: 그러면 안 되는데 사실은 우리 편도 모르니까 경호원들은 뭔 소리야 미국의 중요 인사를 당신들이 데리고 가 이럴 것 아냐
이광용: 그러니까 경호원들도 따라갔을 것 아녜요. 산 좋고 물 좋은 대통령 별장 이라고 하는데 열악한 거예요. 이거 아니지 않습니까. 전화로 보고도 했는데 키신저가 경호원들에게 오지 말라고 거기 있으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파키스탄 쪽 경호원들이 미국 경호원들을 억류시켜 버립니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 4시에 일반 항공기 처럼 위장한 그 비행기를 타고 키신저가 베이징으로 극비리에 날아갑니다. 꾀병과 함께 사라졌던 키신저, 단 두명의 수행원과 함께 베이징에 나타나서 자는 시간 빼고 17시간 동안 물밑 교섭을 합니다. 저우언라이와 키신저의 만남은 그렇게 이루어졌고요.그리고 뒤이어서 위싱턴과 베이징에서는 양국 정상이 만나기로 했다는 그 소식이 동시에 공표됩니다.
--------------(동영상) 1971.7.15. 닉슨 대통령 생방송 TV발표: 중국의 저우언라이 총리와 미국 국가안보보좌관 헨리 키신저는 1971년 7월 9일 11일부터 베이징에서 회담을 가졌습니다. 제가 중화인민 공화국을 방문할 의사가 있음을 인지한 중국의 저우언라이 총리는 중화인민 공화국 정부를 대표해 1972년 5월 이전의 적절한 날짜에 중국을 방문할 수 있도록 저를 초청해 왔음을 말씀드립니다.
최태성: 드디어 1972년 2월 21일 닉슨 미국 대통령이 베이징에 등장합니다. 이것은 역사적인 장면이라고 볼 수 있는데 닉슨이 머문 국빈관있잖아요 거기에 중화인민 공화국 설립이래 처음으로 성조기가 게양되었습니다. 그런데 첫날 환영만찬에서 항상 스포트라이트 받는 게 있죠? 뭘 봤죠?
일동: 건배주?
최태성: 그 건배주에 뭐가 나온 줄 아세요?
허준: 중국 최고 유명한 술, 마오타오주,
최태성: 그렇죠, 보좌관들이 닉슨 대통령한테 이거 안 드시면 좋겠다구 대통령이 역사적인 장면인데 안 마실 수 없잖아요. 캭~ 했는데, 너무 쎄 가지고 눈물을 찔끔 흘렸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김지훈: 저우언라이 총리가 자기 술잔에 술을 따르고 거기에 성냥 불을 부쳐요 그러면 알코올이 타죠. 그걸 보여 줍니다. 나중에 닉슨 대통령이 마오타오주를 선물로 받아가지고 백악관에 갔는데 실수로 쏟았어요 거기에 잘못해서 불이 붙었어요. 그래 가지고 백악관에서 작은 규모 화재가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이시원: 요즘도 양주에 불 붙여 드시는 분들이 있대요.
최원정: 위험하죠, 절대 따라 하지 마세요.
최태성: 닉슨이 방문한 일화들이 많은 거에요. 일화 중에서도 또 하나 재미있는게 있는데 그게 뭐냐면 그때가 1972년 2월 눈이 많이 왔나 봐요. 중국 베이징 갔어요. 관광지로 어디를 가야 될까요?
일동: 만리장성
최태성: 만리장성이죠. 눈이 많이 오면은 도로에서 차들이 미끌어질 수도 있고 올라가다가 넘어질 수도 있구 그렇잖아요. 사고나면 안 되니까 어떻게 했을까요?
허준: 눈을 싹 치워라
최태성: 하루 밤 사이에 10만명을 동원해서 눈을 싹 치웠다고 합니다.
김지훈: 닉슨이 묵고 있었던 조어대 국빈관에서 팔판령 만리장성까지 가는데 80킬로미터예요. 근데 그걸 10만명을 동원해 가지고 눈을 다 치웠죠 (만리장성 위에서 닉슨 부부와 일행들 사진-땡큐 차이나 덕분에 잘 보고 갑니다),
최태성: 양국 정상이 만나 가지고 마오타오주 마시고 만리장성 구경하고 이럴 러구 만난 건 아닐꺼 아녜요. 분명히 기브 앤 테이크가 있을텐데
김준형: 그게 진짜 역사적 만남 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근데 당시에 미국과 중국과 진행된 것과 관계 없이 (미국의 구애 이유-베트남전에 대한 중국의 지원), 중국과 베트남의 관계는 계속 나빠집니다. 중국은 베트남에 대한 지원을 줄였구요. 1972년에는 완전히 중국이 베트남에서 철수를 하게 됩니다. 실제로는 북베트남이 중국군을 추방을 한 것이다. 마찬가지예요. 사실 미국과 중국이 수교한 직후인 1979년 2월에는 중국과 베트남이 전쟁을 합니다. 참 역사의 변화가 대단하죠.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국제 정세다.
이시원: 국제 정치에는 영원한 친구도 적도 없어요. 그게 순식간에 싹싹 바뀌어요. 미국의 1차 목표 중국이 베트남전에서 철수한다는 성공은 했네요.
김준형: 맞습니다.
김지훈: 두 정상이 만났고 그래서 1972년 2월 27일 상하이에서 공동성명을 발표를 하죠. 그때 핵심문제가 되었던 것은 타이완, 대만 문제였는데 내부에서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중국 베이징/이광용 代役: 브리핑을 시작하겠습니다. 중국은 다음과 같이 성명한다. 대만은 중국의 일부분이고 대만을 해방하는 것은 중국의 내정이며 외국은 간섭할 권리가 없다 미국의 군대와 군사시설은 대만에서 철수해야 한다.
최태성; 오늘날 중국주장과 동일하다.
-------------미국워싱턴 백악관대변인/이광용 代役: 미국은 다음과 같이 성명한다. 미국은 대만해협 양안에 있는 모든 중국인이 중국은 하나뿐이고 대만은 중국의 일부분이라고 주장하는 것을acknowledge 인지한다. 미국 정부는 이 입장에 대해 이의를 challenge 제기하지 않는다. 미국은 대만에 미국군대와 군사시설을 철수하는 것이 최종목표임을 확인한다. 이 기간 동안 이 지역 긴장 국면 완화에 따라 대만에 있는 군대와 군사시설을 점차 철수할 것이다.
이시원: 점차라는 게 어느 정도 기간이에요?
최태성: 대만하고 협의됐나요?
이시원: 공동성명인데 양국의 결이 달라요. 중국 정부는 대단히 단호한데 미국은 최종 목표로 한다. 점차 철수한다. 되게 애매하거든요.
허준: 중국은 이건 우리 문제야, 간섭하지 마, 이러는데 미국은 그게 아닌 게 아니고 아닌 건 아닌데,
김지훈: 중국은 당시에 마오쩌둥이 확실하게 대만문제에 대해서는 미국과 양보를 하지 말라고 지시를 합니다. 대만문제에 대해 확고하게 자신들의 핵심적인 이익이라고 생각을 해가지고 지키도록 하죠. 그래서 저런 공동 코뮤니케도 저런 식으로 나온 겁니다.
김준형: 다들 느끼셨죠. 미국은 뭔가 애매 모호하구, 구구절절 길어지면 이건 확실하지 않은 거잖아요. 그래서 하나의 중국을 반대하는 측에서는 두 가지 포인트를 치고 들어갑니다. 하나가 뭐냐하면 미국이 acknowledge 했다는 말은 동의 했다는 말과 다르다. 그러니까 미국이 중국의 입장을 수용했다는 것이 아니다, 두번째는 뭐냐 하면 양안의 모든 중국인이 동의한다고 했으니까 대만도 중국이 되니까 대만이 반대하면 무효화 할 수 있다.
허준: 이래서 외교가 단어 하나 때문에 완전히 달라지는 거다 그래서 외교적 수사(표현)에 한번 더 생각하고 더 신중해야,
최태성: 중국은 대만을 독립국가로 상대하는 것을 정말 엄청 반대하잖아요. 그러니까 다른 나라들은 양자택일을 해야 되는 상황이라는 얘기죠. 지금 이런 식으로 나와 버리면 대만 입장에서는 어찌보면 관계가 모호하다 할지라도 너무 화가 나는 거죠.
이시원: 대만은 낙동강 오리알 된 느낌?
최태성: 그렇죠, 그래서 결국은 대만이 유엔에서 탈퇴해요.
최원정: 이때 유엔을 탈퇴하는 구나. 1971년 10월 25일 대만의 유엔추방 결의안 가결직전 대만이 유엔탈퇴를 선언하고 퇴장~
최태성: 굉장한 배신감에 분노를 느끼지 않을까요. 그 자리에 누가 들어가냐 하면 중국이 들어가요 (대만 탈퇴 후 막강한 권한을 가진 유엔상임이사국이 된 중국),
허준: 그래도 아무리 화가 난다 해도 성질 부리고 나가면 나만 고립 되는 거예요. 다른 사람들은 다 소근소근 모여서 얘기하고 있는데 난 이제 그 얘기를 듣지도 못 하잖아요.
최원정: 약간 욱~ 했던 것 아닌가요. 자진 사퇴한 건
이시원: 나 이대로 못해! 보여 주기식 아니었을까요?
김준형: 두 가지 측면이 다 있는데요. 대만이 유엔을 탈퇴를 하면서 비정상적 국가로 외교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국가로 전락을 하죠. 반대편에서는 이것이 대만 사람들의 정체성을 확립하고요. 민주화와 대만 민족주의가 성장하게 되는 계기가 되는 거죠.
최원정: 내부 결속의 계기가 된다.
최태성: 미국이 자유진영에 신호를 준 거잖아요. 다른 나라 같은 경우는 중국과 수교하라는 얘기네. 수교하는 거예요. 그리고는 대만은 어떻게 할까? 단교를 하는 거죠. 그런데 이런 상황이 벌어지는데 정작 미국은 의외로 중국하고 수교하는 게 7년 뒤에 1979년에 중국과 수교합니다.
김지훈: 처음에 미국은 중국과 대만을 둘 다 국가로 인정하길 원했습니다. 그렇지만 중국은 단호하게 거부를 하죠. 중국이 내세웠던 조건들, 미국하고 대만의 상호방위조약이 있었는데 그것을 폐기하고 미군이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미국 주둔도 역시 철수를 시키고 그리고 단교룰 하고 이것을 수용을 하게 돼죠. 1979년 1월 1일에 중화인민 공화국과 미국이 수교를 하게 돼죠. 그리고 대만과는 단교를 하게 되고요. 조약도 폐기가 되고 미군철수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현재와 같은 그런 모습이 되었습니다.
최태성: 국제사회가 무섭긴 무서우네요.
최원정: 국제사회가 이렇게 비정합니다. 우리도 당해 봤어요. 남의 일이 아닙니다.
이시원: 그렇다면 최근에 미국 펠로시 하원의장이 맞섰잖아요. 지난 8월 미국내 권력서열 3위, 펠로시 일행은 밤 11시가 가까워서야 타이완에 도착했습니다. 펠로시 의장은 도착 즉시 중국과의 대립으로 타이완의 민주주의가 위협받는다며 연대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낸시 펠로시/미하원의장: 그 어느 때보다 미국과 타이완의 연대가 중요합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전하는 메세지입니다--------------
이시원: 이거는 그러면 사실 비공식적인 절차라고 볼 수 있겠네요.
김준형: 변수가 하나 있습니다. 얘기 안된 건데요. 당시에 닉슨이 문을 열었지만 수교할 때는 카터 대통령이었습니다. 카터 대통령이 의회와 충분히 동의를 구하고 조율을 해야 되는데 거의 무시하다시피 해버렸습니다. 그러니까 미국 의회에서는 여기서 반발해 가지고 대만관계법이라는 것을 따로 통과시킵니다. 핵심골자가 뭐냐 하면 (대만관계법 (1979.4.10) 주요골자-중국이 대만 문제를 비평화적으로 해결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용납하지 않는다), 중국이 만일 비평화적인 방법으로 대만을 통일할려고 하면 용납하지 않겠다 또 그 뒤에는 특히 대만에게 방어용 무기를 제공한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실제적으로 대만의 정치적 실체를 인정하는 것이고요. 중국이 주장하는 하나의 중국의 원칙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죠.
이시원: 미국 내의 입법부와 행정부가 서로 충돌하는 상황인 거네요.
허준: 충돌이라고 표현을 했잖아요. 어떻게 보면 이 선택지도 가지고 있고 저 선택지도 가지고 있고 너무 머리를 잘 쓴 거야.
최원정: 일종에 대중 외교에서 지랫대 삼아서 이렇게도 할 수 있고 저렇게도 할 수 있고 굉장히 영리한 역사적 선택인데요. 외교를 얄밉게 잘 한다.
김준형: 미중수교가 되면서 결국 중국은 큰 변화를 겪게 돼죠. 특히 개혁-개방을 하게 되고 그리고 중국이 미국이라는 거대한 시장을 가지게 되면서 경제대국으로 부상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되기도 했고 그리고 냉전이 약화가 되고 그러면서 새로운 시대를 여는 중요한 게기가 됐다 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이시원: 미국이 대만을 대하는 게 많이 바뀌는 것 같애요. 요즘 세대가 느끼는 것은 미국은 다시 대만을 도와주는 느낌이거든요.
허준: 행정부가 요즘은 가만히 있고 입법부가 막 나서서 대만으로 가는 이유가 무섭다.
김준형: 1991년 고르바쵸프 사임과 함께 엄연히 1991년 12월 26일 소련이 붕괴를 합니다. 그래서 이제 냉전체제가 무너지고 탈냉전 시대가 왔는데 지금 딱 30년이 지났는데요. 이제 그 자리에 중국이 부상하면서 요즘에 화두가 신냉전이 시작되는 게 아닌가 라는 얘기가 나오는데 그래서 말씀하신 것처럼 미국이 중국과 대만에 대한 생각이 바뀌고 있죠. 1970년대 그때는 이익을 위해 대만을 버렸던 미국이 사실 애매모호하게 버렸죠. 지금은 다시 대만을 끌어안고 보호하려는 미국의 정책이 대중견제를 위해서 대만을 이용한다는 거죠.
허준: 마치 연인에게 헤어지자는 말은 안했는데 연락도 안 되고 보지도 않고 이렇게 살아왔잖아요. 다시 돌아와서 너 잘 생각해 봐 나 너한테 헤어지자고 한 적 없어 이러면서 슬쩍 다시 다가오는 느낌인데~
이시원: 가스라이팅이에요!
허준: 중국하고 손잡을 때도 중국은 명확했어요. 이건 우리 일이니까 대만 만큼은 양보 못해! 라고 했었는데 내가 acknowledge 내가 인지하고 있어 라고 넘어갔던 거는 군사개입 하겠다고 뉴스에 바이든 대통령이 의사를 드러내고 있어요.
--------------TV 뉴스: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언론 인터뷰에서 중국이 전례 없는 공격을 할 경우 미군을 동원해 타이완을 방어하겠다고 밝힌 건데요. 중국은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허준: 백악관에서는 공식적인 입장은 아니에요 라고 길을 열어놓고 있는데 중국이 분명한 건 그때부터 지금까지 한번도 변하지 않았거든요.
최원정: 여기서 배운 교훈은 외교관계에 있어서 수사는 흐리멍텅하게 애매모호하게 하는 게 결국 나중에 운신의 폭이 넓어진다.
이시원: 중국 입장에서는 미국의 이중 플레이가 괘씸할 것 같애요.
최원정: 머리 아프다 굉장히 이게 미국-중국-대만 문제가 복잡한 역사적인 배경이 있어요. 잠깐 머리도 식힐 겸 귀여운 영상을 준비해 봤습니다. 자~ 보시죠.
-------------(동영상-마오쩌둥과 닉슨이 만나는 정면) 정상회담을 기념해 미국과 중국은 각각 사향소와 자이언트 판다 한 쌍을 교환했다. 큰 덩치에 귀여운 외모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상대국의 호감도를 높이는 중국의 대표 외교주자 판다, 그런데 사실 지구상의 모든 자이언트 판다는 중국의 소유다. 중국은 외교 상대국으로부터 판다의 대여 비용을 받으며 현지에서 낳은 새끼에도 부과한다. 또 판다가 짝짓기가 가능한 만 4살이 되면 중국에 반환해야 한다. 올초 미국에서는 중국에 새끼 판다를 반환하지 말자는 내용의 법안이 발의 되기도 했다. 미중관계의 갈등이 판다에도 영향을 미친 것이다.
이시원: 판다에게 까지 이런 복잡한 외교가 얽혀있다니
허준: 심지어 그 와중에 미국도 사향소를 주었는데 아무도 기억하지 않아
최원정: 사향소를 처음 찾아 보았거든요 사향이 시무룩~
김지훈: 판다가 지금 문제가 되고 있지만 닉슨 대통령 부부가 방문했을 때 닉슨 대통령의 영부 인 팻 닉슨 여사가 베이징 동물원을 방문해요. 판다를 보고 굉장히 오랫동안 보고 예뻐합니다. 그 소식을 듣고 당시 저우언라이 총리가 만찬장에서 담뱃갑을 하나 보여줘요. 담배를 안 피우는 영부인한테 웬 담뱃갑? 실제로 거기엔 판다가 그러져 있었어요. 그래서 제가 판다를 선물로 드리겠다는 표현을 한 것이고 그때 당시에는 판다가 쉽게 볼 수 없는 동물이었기 때문에 미국에서도 환영을 받았습니다.
최원정: 저희가 3주간 대만과 중국의 갈등 해법을 역사에서 찾아볼려고 했잖아요.
최태성; 곧 중국에서 새로운 주석을 뽑는 공산당 대회가 열릴 예정이죠. 정말 이 대회에서는 대만 통일이 중요한 이슈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자국의 권력강화를 위해서 항상 외교적 긴장을 활용했던 역사적인 사례는 너무나 많습니다. 이게 분명히 우리에게 영향을 미칠 것 같은데~ 지켜 봐야 되겠습니다.
최원정: 시진핑 주석의 3기 집권과 미국의 중간선거까지 같이 있으면서 미중관계에 관심이 쏠리고 있는데 그중에 가장 큰 현안은 대만이에요.
김준형: 키신저가 나왔잖아요. 키신저가 최근에 대만에서 전쟁이 날 것이라는 질문에 대해서 향후 10~20년간 전쟁이 절대 나지 않는다 라고 얘기 했어요 저도 동의합니다. 여기에서 부딪치면 다 죽는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서로 얘기하는 것보다 실질적으로 일어날 가능성은 낮기 때문에 안심하셔도 좋은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한테도 발목을 잡아 볼 수 있고 중국한테도 발목을 잡을 수 있는 덫이다 라고 봅니다.
허준: 믿져야 본전인 시점이 다가온다. 이런 생각이 들거든요. 미국에서 야 그거 너네 반도체 중국에 갖다 주지마 아니 이걸 어떡해요 안갔다 주면 큰일나게 생겼는데 하면서 중국한테는 아니 저 큰형이 이러다가 우리 혼나게 생겼어요. 물건 못줄 수도 있는데~ 우리의 외교 전략에 따라서 이 위기가 기회가 될 수도 있겠다 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믿져야 본전인 시장 우리가 현명한 외교를 만들어 봤으면 좋겠습니다.
김준형: 허준을 외교관으로
최원정: 교수님, 딱 판다로 분장시키면~ 역사저널 그날 오늘 나라 걱정 하느라고 판다의 다크 서클이 깊어지고 있다. 동북아의 긴장고조로 우리가 지금 판다가 될 지경에 있습니다. 부디 역사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를 바라면서 오늘 순서 여기서 마무리 하겠습니다. 끝. (KBS 역사저널 그날 379회 ③ 대만은 왜 동북아의 화약고가 됐나? 닉슨, 마오쩌둥을 만나다에서 정리)
① 1972년 2월 21일,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중국의 베이징에 모습을 드러냈다. 마오쩌둥을 만나기 위한 전격 방중이었다. 닉슨과 마오쩌둥, 이들의 갑작스러운 만남은 세계를 놀라게 했다. 미중회담 이후 요동치게 된 국제정세, 그 중심엔 대만이 있었다. 대만은 미국은 언제나 나의 편이다 라고 생각하였다. 중국은 대만을 국가간의 관계가 아니고 양안관계 라고 부른다. Nixon goes to China(닉슨이 중국에 간다) 라는 말이 적대적인 관계에 있는 나라가 극적으로 화해한다든지 정책이 극적으로 변하는 것에 관용구가 될 정도였다. 왜냐면 낙슨은 강경한 반공주의자였다. 그래서 닉슨 쇼크라는 말까지 유행했었다. 그 사건이 우리한테 대단한 영향을 미쳤다. 닉슨이 중국을 방문한 해가 1972년 이다. 그 1972년에 우리나라에서는 박정희 정부의 1972년 10월 유신선포가 바로 닉슨의 중국방문과 연결이 된다. 우리의 동맹이었던 미국 대통령이 중공을 갔다. 미국이 아시아의 공산화를 방치하는 거 아냐. 이런 과정 속에서 박정희 정부는 이 상황을 대처해야 된다 라는 명분을 내놓으면서 10월유신을 선포하였다. 북한도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북한은 2개월 후인 1972년 12월에 헌법을 바꾸었다. 원래 건국헌법을 1948년에 제정했는데 그걸 사회주의 헌법이란 이름으로 통째로 바꾸었다. 유신처럼 일인 지배체제를 확고히 하였다. 주석직을 처음으로 도입하고 중국의 배신에 대한 대내적 결합이 북한에도 똑같았다. 우리는 미국 때문에 놀랐고 북한은 중공 때문에 놀랐다. 닉슨의 방중이 한반도에 나쁜 영향을 미쳤다. 미국과 중국의 화해를 핑계로 두 독재자는 권력을 공고히 하였다.
② 미중관계의 개선은 그 이전부터 이미 추진되고 있었고 양쪽에서 서로 만나자고 하고 있었는데 나고야 탁구대회를 통해 가지고 미국과 중국의 수뇌가 모두 협력하기로 했다. 미중관계가 급속도로 진전이 되었다. 출발은 어려웠다. 그 뒤 진전이 되고 탁구로 넘어간다. 닉슨이 1969년 1월에 취임한다. 닉슨은 반공주의자였다. 취임 1주일 후 기자회견에서 중국의 적대적인 정책을 거론하면서 저들이 변하기 전에 우리가 변할 일은 없다. 그렇게 얘기했지만 당시에 미국이 엄청나게 골칫거리가 하나 있었는데 그것을 풀 열쇠를 가진 나라가 중국이었다. 1954년 베트남이 북위 17도선으로 분단된 후 내전이 일어났다. 미국은 베트남에 공산화를 막기 위해 남베트남 정부를 지원했고 곧 전쟁은 미국 대 북베트남의 전면전으로 확대됐다. 세계 최강을 자처하던 미국, 그러나 북베트남을 상대로 고전을 면치 못한다. 길어지는 전쟁으로 미군의 피해는 커져가고 국내 반전 여론까지 거세지는 상황, 닉슨은 타개책이 필요했다. 닉슨이 대통령이 됐을 때 이미 베트남 전쟁이 한참 진행 중이었다. 취임 3개월 후에는 병력을 증파했다. 그런데 생각만큼 전쟁이 미국의 뜻대로 돌아가지를 않았다. 세계 최강 미국이 그 명성이 무색하게 계속 패배를 하니까 미국이 생각한 것은 배후에 중국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때 중국은 후방지원 부대를 중심으로 1965년에는 거의 32만 병력을 투입했다. 전쟁이 미국의 뜻대로 쉽게 끝날 수 없는 상황이었다.
③ 거기에다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그 당시 미소냉전이 격화되었던 시기였기 때문에 결국 소련의 적대관계인데 만약에 중국을 통해서 소련을 견제할 수 있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침 중국과 소련 사이에 틈이 생긴 것을 포착하게 되었다. 실질적으로 중국이 가장 긴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나라가 소련이다. 우리는 아편전쟁으로 중국이 홍콩을 영국에만 뺏긴 것만 알고 있는데 (1839~1842년 제1차 아편전쟁 결과 청이 영국에 홍콩 할양) 실제로 19세기에 가장 중국 영토를 많이 가져간 나라가 러시아다. 연해주 그 다음에 하바로프스크 남부 해륭장성 그리고 중국의 서북부까지 150만평방킬로미터를 가져가 버린 나라가 러시아다. (제2차 아편전쟁 전후로 연해주 등 약150평방킬로미터를 러시아에 빼앗긴 중국), 저 과정에서 한반도가 러시아와 영토를 마주하게 되어버렸다.
④ 스탈린 사망 이후에 흐루시쵸프가 등장한다. 흐루시쵸프가 서방과 연결할려는 시도를 하자 마오쩌둥이 충격을 받는다. 이러다가 우리만 고립되는 거 아니야 어떻게 타개책을 강구하자. 실제로 1969년에 마오가 국제 정세에 대해서 연구를 하고 그 결과를 보고하도록 지시를 한다. 당시에 미국과 소련과 중국과의 관계를 어떤 식으로 풀어나가야 될 것인가를 연구를 하는데 그 결과 미국이 중국을 공격할 건 아니다. 국경을 맞대고 있는 소련이 자신들의 안보에 직접적인 위협이 되고 있기 때문에 미국과 손을 잡을 필요가 있다. 이것은 마치 삼국시대에 제갈량이 융중(隆中) 대책을 내놔서 약한 촉나라가 오나라와 손을 잡고 북쪽 위 나라에 대항을 해야 한다 라는 이야기를 인용한다. 마오쩌둥은 손자병법이랑 삼국지를 엄청 좋아했다. 거기서 힌트를 얻었다.
⑤ 중국을 방문했던 에드거 스노(1905~1972) 작가에게 마오쩌둥이 노골적으로 얘기를 했다. 나는 닉슨을 만나고 싶다. 닉슨의 방중에 미국에는 헨리 키신저 실무자였고 중국은 당시 국무원 총리였던 저우언라이(周恩來)가 실무자였다. 닉슨의 방중은 아주 극비리에 진행됐다. 키신저는 두 명의 수행원과 함께 베이징으로 날아간다. 자는 시간 빼고 17시간 동안 물밑 교섭을 한다. 저우언라이와 키신저의 만남은 그렇게 이루어졌고 뒤 이어서 위싱턴과 베이징에서는 양국 정상이 만나기로 했다는 소식이 동시에 공표된다.
⑥ 드디어 1972년 2월 21일 닉슨 미국 대통령이 베이징에 등장한다. 역사적인 장면이다. 닉슨이 머문 국빈관은 중화인민 공화국 설립이래 처음으로 성조기가 게양되었다. 당시에 미국과 중국 접촉과 관계 없이 중국과 베트남의 관계는 계속 나빠졌다. 중국은 베트남에 대한 지원을 줄였다. 1972년에는 완전히 중국이 베트남에서 철수하였다. 실제로는 북베트남이 중국군을 추방하였다. 사실 미국과 중국이 수교한 직후인 1979년 2월에는 중국과 베트남이 전쟁을 한다. 국제 정치에는 영원한 친구도 적도 없다. 미국의 1차 목표 중국의 베트남전 철수는 성공했다. 두 정상이 만났고 1972년 2월 27일 상하이에서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그때 핵심문제가 타이완, 대만 문제였다.
⑦ 중국 베이징: 중국은 다음과 같이 성명한다. 대만은 중국의 일부분이고 대만을 해방하는 것은 중국의 내정이며 외국은 간섭할 권리가 없다 미국의 군대와 군사시설은 대만에서 철수해야 한다. 미국 워싱턴: 미국은 다음과 같이 성명한다. 미국은 대만해협 양안에 있는 모든 중국인이 중국은 하나뿐이고 대만은 중국의 일부분이라고 주장하는 것을acknowledge 인지한다. 미국 정부는 이 입장에 대해 이의를 challenge 제기하지 않는다. 미국은 대만에 미국군대와 군사시설을 철수하는 것이 최종목표임을 확인한다. 이 기간 동안 이 지역 긴장 국면 완화에 따라 대만에 있는 군대와 군사시설을 점차 철수할 것이다. 공동성명인데 양국의 결이 달랐다. 중국 정부는 대단히 단호한데 미국은 최종 목표로 한다. 점차 철수한다. 미국은 애매모호하였다,
⑧ 중국은 당시에 마오쩌둥이 확실하게 대만문제에 대해서는 미국과 양보를 하지 말라고 지시한다. 대만문제는 자신들의 핵심적인 이익이라고 생각을 했다. 공동 코뮤니케도 미국은 애매 모호하다. 그래서 하나의 중국을 반대하는 측에서는 두 가지 포인트를 든다. 하나가 뭐냐하면 미국이 acknowledge 했다는 말은 동의 했다는 말과 다르다. 그러니까 미국이 중국의 입장을 수용했다는 것이 아니다, 두번째는 양안의 모든 중국인이 동의한다고 했으니까 대만도 중국이 되니까 대만이 반대하면 무효화 할 수 있다.
⑨ 결국 1971년 10월 25일 대만은 유엔에서 탈퇴한다. 유엔상임이사국 자리에 중국이 들어갔다. 대만은 유엔을 탈퇴 하면서 비정상적 국가로 외교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국가로 전락하였다. 반대로 이것이 대만 사람들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민주화와 대만 민족주의가 성장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미국은 의외로 7년 뒤 1979년에 중국과 수교한다. 미국은 중국과 대만을 둘 다 국가로 인정하길 원했다. 그렇지만 중국은 단호하게 거부를 하였다. 중국이 내세웠던 조건들, 미국하고 대만의 상호방위조약이 있었는데 그것을 폐기하고 미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그런데 미국 주둔도 역시 철수를 시키고 단교를 하고 이것을 수용을 한다. 1979년 1월 1일에 중화인민 공화국과 미국이 수교를 한다. 대만과는 단교를 한다. 조약도 폐기가 되고 미군철수가 이루어지게 되고 현재와 같은 모습이 되었다.
⑩ 지난 8월 미국내 권력서열 3위, 펠로시 일행은 밤 11시가 가까워서야 타이완에 도착했다. 펠로시 의장은 도착 즉시 중국과의 대립으로 타이완의 민주주의가 위협받는다며 연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당시에 닉슨이 문을 열었지만 수교할 때는 카터 대통령이었다. 카터 대통령이 의회의 동의를 구하고 조율을 해야 되었는데 거의 무시하다시피 수교를 해버렸다. 미국 의회에서는 여기서 반발해 가지고 대만관계법(1979.4.10)을 따로 통과시켰다. 핵심골자는 만일 중국이 비평화적인 방법으로 대만을 통일할려고 하면 용납하지 않겠다 또 그 뒤에는 대만에 방어용 무기를 제공한다. 이렇게 되면 실제적으로 대만의 정치적 실체를 인정하는 것이고 중국이 주장하는 하나의 중국의 원칙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다.
⑪ 미중수교가 되면서 결국 중국은 큰 변화를 겪게 됐다. 개혁-개방을 하게 되고 미국이라는 거대한 시장을 가지게 되면서 경제대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고 냉전이 약화가 되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미국이 대만을 대하는 게 많이 바뀌었다 미국은 다시 대만을 도와주고 있다. 고르바쵸프 사임과 함께 1991년 12월 26일 소련이 붕괴한다. 이제 냉전체제가 무너지고 탈냉전 시대가 왔는데 지금 30년이 지났다. 이제 그 자리에 중국이 부상하면서 신냉전이 시작되는 게 아닌가. 1970년대 국익을 위해 대만을 버렸던 미국이 지금 다시 대만을 끌어안고 보호하고 있다.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언론 인터뷰에서 중국이 전례 없는 공격을 할 경우 미군을 동원해 타이완을 방어하겠다고 밝혔는데 중국은 강하게 반발했다.
⑫ 여기서 배우는 교훈은 외교관계에 있어서 수사는 흐리멍텅하게 애매모호하게 하는 게 결국 나중에 운신의 폭이 넓어진다. 키신저가 최근에 대만에서 전쟁이 날 것이라는 질문에 대해서 향후 10~20년간 전쟁이 절대 나지 않는다. 여기서 부딪치면 다 죽는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만문제는 미국한테도 중국한테도 발목을 잡을 수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