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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243
12월14일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대림 제2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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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죽음조차도 예수님의 구원사업 성취의 도구로 사용했습니다!>
오늘도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논란과 그에 대한 예수님의 명료화 교육은 계속됩니다.
당시 유다인들이 메시아 오심과 관련해서 강하게 지니고 있었던 믿음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메시아를 보내시기 전에, 반드시 그분이 오심을 사람들에게 미리 알려 준비시키는 전령이요 선구자로서 엘리야를 먼저 보내실 것임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유다인들의 믿음은 말라키 예언서 마지막 부분에 그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그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리라. 그래야 내가 와서 이 땅을 파멸로 내리치지 않으리라.”(말라키 3장 23-24절)
대림 특강 시즌을 맞아 본당으로 강의를 가면, 나름 작은 절차가 있더군요. 본당 교육 분과장님께서 먼저 마이크를 잡으십니다. 그리고 강사를 소개하고 강론대로 모십니다. 소개도 안했는데 불쑥 제가 나가서 강의를 시작하면 좀 쌩뚱맞기도 하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몇년 전 한 본당 교육분과장님께서 저를 소개하는데, 웃겨 죽는 줄 알았습니다. 아마 교육분과장님이 개그콘서트를 자주 보시는 분 같았습니다. “오늘 강의해주실 분은 살레시오회 양상국 스테파노 신부님이십니다^^”
사실 이름이 엘리야는 아니었지만 엘리야와 똑같은 역할을 하신 분이 예수님에 앞서 존재했습니다. 예수님이 구세사의 전면에 등장하기 전에 군중들에게 ‘저분이 바로 메시아이십니다.’라고 소개하신 분, 세례자 요한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름만 달랐지 엘리야 예언자의 화신이자 동일한 역할을 수행하러 이 땅에 온 인물인 세례자 요한을 몰라본 유다인들, 시대의 징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유다인, 결국 그를 비참한 죽음으로 몰고간 유다인들을 크게 질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마태오 복음 17장 12절)
예수님께서는 엘리야와 동급 인물인 세례자 요한의 수난과 죽음을 상기시키며, 당신께도 똑같은 운명이 기다리고 있음을 예언하십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마태오 복음 17잘 12절)
세례자 요한의 무고한 죽음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은 헤로데에게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을 방조한 유다 지도층 인사들과 백성들 역시 책임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의 회개에 대한 외침에 귀를 막았기 때문입니다.
메시아 역시 세례자 요한의 운명과 동일한 길을 걷게 됩니다. 두 분은 동일한 운명공동체였습니다. 이렇게 볼 때 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결코 무가치하거나 무의미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죽음은 단순히 사악한 헤로데의 경솔한 행동이나 헤로디아의 증오로 인한 희생물이었다고만 볼수 없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비록 비극적이었지만 결국 그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의 죽음을 예비한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죽음조차도 예수님의 구원사업 성취의 도구로 사용한 것입니다.
그의 죽음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출생은 물론 생애 전체, 죽음까지도 자기 뒤에 오실 메시아 예수님을 위해 온전히 봉헌한 세례자 요한의 모습이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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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사람은 자신이 만든 그릇의 용도와 크기만큼 채우며 산다>
1491년, 한 스페인 함장이 지구의 굴레를 계산하던 중 숫자를 몇 개 틀렸습니다. 지구 둘레는 대략 40,000km이지만, 그는 약 24,000km로 계산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 그 계산은 틀렸다고 해도 어떤 이유에서인지 자신의 계산을 확신했습니다. 분명 거꾸로 돌아도 중국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런 의도가 앞섰기에 지구를 실제보다 작게 계산할 수밖에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확신을 스페인 이사벨라 여왕에게 보고하고 도움을 청했습니다.
이사벨라 여왕도 그가 틀린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가보겠다는 사람이 있으니 손해 볼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배 3척을 내어줍니다. 콜럼버스는 계속 착각 속에 자신의 계산상 자신이 발견한 대륙은 인도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래서 만난 주민들을 인디언이라 불렀고 그 제도를 인도 제도라 칭했습니다. 그의 거대한 실수 때문에 발견된 신대륙 덕분으로 스페인 정부는 그 후로 200년 이상을 떵떵거리며 살게 되었습니다.
[참조: ‘세계를 바꾼 49가지 실수; 결과가 좋았던 실수’, 빌 포셋, 생각정거장]
콜럼부스는 자신에 대한 확신이 누구보다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남들이 하지 못한 발견을 해냈습니다. 그러나 그는 평생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자기 자신의 부에 대한 그릇이 작았던 것입니다. 반면 이사벨라 여왕은 다른 것은 몰라도 부에 대한 그릇 크기가 엄청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정신 나갔다고 손가락질 받는 콜럼부스에게도 지원을 아끼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스페인이 잘 살 수 있는 축복의 그릇을 누구보다 크게 만들어놓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각자 만드는 자기 자신의 크기만큼 채워주십니다.
일본 TV 프로그램에서 모르는 사람이 그냥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돈을 주는 실험을 해봤습니다. 그 돈을 받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며 받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받은 사람과 받지 않은 사람의 재산 차이를 조사해보니 재미있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돈을 받지 않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형편이 넉넉지 못한 사람들이었고, 오히려 부자들이 돈을 덥석덥석 잘 받았던 것입니다. 부자들은 ‘아, 이렇게 나에게 돈이 굴러들어오는구나!’라고 생각했고, 가난했던 사람들은 ‘이 사람이 뭔 꿍꿍이속으로 나에게 돈을 줘?’라며 생각했습니다. 부자들은 돈이 채워질 그릇이 이미 컸던 것이고 가난한 사람들은 그 작은 그릇이 채워져 있기에 더 이상 채워질 기회가 와도 그 기회를 이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나는 어떤 그릇을 만들고 있는가?’를 생각할 수 있게 만듭니다. 타볼산에서의 변모 바로 뒤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변모하신 이유는 당신은 하느님을 담는 그릇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예수님 곁에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났던 것을 보고 제자들이 엘리야에 대해 이렇게 묻습니다.
“율법 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메시아가 오시기 이전의 엘리야의 필요성에 대해 묻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
무엇을 바로잡는다는 것일까요? 바로 우리는 하느님을 모시기에 합당한 존재라는 믿음을 심어준다는 뜻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메시아가 자신들의 부와 자주독립을 이뤄줄 분으로 여겼습니다. 잘못된 그릇을 만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구원은 우리 안에 하느님께서 담기기 때문에 성취되는 것입니다. 불이 들어갈 벽난로를 불에 타는 재료로 만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메시아를 세속적 욕구를 채우는 도구로 여기는 이들은 다 이처럼 타버리고 말 것입니다.
저도 세속적인 성공을 바랄 때는 사제가 되라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습니다. 사제를 담을 그릇을 만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되려면 먼저 그 무엇을 담을 그릇부터 만들어야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담을 수 있는 존재라는 믿음을 주러 세례자 요한이 먼저 와야 했다고 말씀하십니다. 엘리야가 바로 세례자 요한입니다. 우리 존재 이유는 성전이 되기 위함이지 돈주머니나 권력주머니가 되기 위함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무언가 담기 위해 크고 작은 각자의 그릇을 만들며 살고 있습니다. 내가 만든 그릇만큼만 내 안에 그것이 담깁니다. 그릇의 용도는 다 다릅니다. 영원한 그릇이 되고 싶다면 영원한 것을 담을 재료로 그릇을 만들어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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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7,10-13 : 엘리야는 이미 왔으나 알아보지 못하였다
오늘 복음에서는 엘리야의 재림에 대한 논쟁을 보여주고 있다. 바리사이들은 엘리야가 종말 전에 온다(말라 3,23 참조)고 하였다. 엘리야는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며 모든 것을 예전의 상태로 돌려놓는다고 하였다. 바로 앞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거룩한 변모를 보여주셨다.
제자들은 이 영광스러운 변모가 그분의 영광으로 생각하고 왜 선구자인 엘리야가 나타나지 않는지 물었던 것이다. “율법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10절) 여기서 “먼저”라는 말에는 엘리야가 먼저 오지 않으면 성경이 말하는 구원자의 오심이 아니라는 뜻이 담겨있다.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을 엘리야로 소개하시지만, 세례자 요한은 이스라엘 백성의 화해와 재건을 이룩하지 못하고 참수 당했기 때문에 재림한 엘리야일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그 엘리야가 아직 재림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다음에 오실 메시아도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은 메시아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세례자 요한을 재림한 엘리야로 생각하였다(11,14 참조). 그러나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기 전에 헤로데에게 죽음을 당했다(14,3-12). 이렇게 메시아의 선구자가 배척을 당한 것처럼, 메시아이신 예수께서도 배척을 당하셨다는 것이다(11,16-19 참조).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12절) 그를 감옥에 가두고 처형한 헤로데와 그들이 공범자였다.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12절) 그런 다음 주님께서는 그들이 엘리야에게 한 것과 같은 일을 당신도 당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엘리야가 이미 왔다.”(12절)는 말과 그에 대한 구원자의 설명을 듣고 제자들은 그것이 세례자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임을 깨달았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두 번 오신다고 이야기 한다. 첫 번째 오심은 지금 오심이다. 바오로 사도는 “과연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은총이 나타났습니다. 이 은총이 우리를 교육하여, 불경함과 속된 욕망을 버리고 현세에서 신중하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도록 해 줍니다.”(티토 2,11-12)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 우리에게 오시는 그분을 잘 맞을 수 있도록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
두 번째 오심에 대해 바오로 사도께서는 “복된 희망이 이루어지기를, 우리의 위대하신 하느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우리”(티토 2,13)라고 한다. 엘리야나 메시아의 참 모습은 희생적인 사랑과 봉사를 통해서 드러나는 것이다. 우리 자신이 엘리야가 되고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는 이 기간이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삶의 은총을 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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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홍보국장/전주교구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독서에서는 엘리야가 칭찬을 받습니다. “엘리야 예언자가 불처럼 일어섰는데 그의 말은 횃불처럼 타올랐다.” 바알 신을 믿는 예언자들은 백성에게 물질적인 번영을 약속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예언자인 엘리야는 백성이 물질주의에 빠지지 않고 신앙으로 충만해지기를 바랍니다. 백성은 마음이 완고해져서 하느님의 뜻과 거리가 먼 행동을 고집합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말씀에 따라 그는 하늘을 닫아 버립니다.” 가뭄은 하느님 진노의 표징으로 해석될 수 있지만, 성경은 다른 이유, 곧 “주님의 분노가 터지기 전에 그것을 진정시키고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되돌리기” 위함이라고 제시합니다. 여기서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회개와 사랑을 되찾으려는 것입니다. “당신을 본 사람들과 사랑 안에서 잠든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엘리야의 목소리는 큰 변화가 필요한 시기에 주님께서 우리 귀에 새로 울려 퍼지게 해 주시는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변모하신 다음 산에서 내려오시는 예수님께서 엘리야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시대의 전통은 메시아 이전에 엘리야가 올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성경을 잘 알고 있기에 주님께 맞서려는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께 성경을 인용하며 이의를 제기합니다.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을 두고 그가 이미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하고 대답하십니다. 율법 학자들은 마음이 완고하여 마음의 문이 열려 있지 않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열려 있다면 세례자 요한이 전한 회개의 메시지를 받아들이고 엘리야가 돌아왔음을 깨달으며, 곧 요한이 새로운 엘리야였음을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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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류한영 베드로 신부님]
제자들은 타보르산에서 내려와 “율법 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높은 산 위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보고 엘리야에 대하여 물은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엘리야는 ‘신앙의 수호자’이며 ‘말씀의 전달자’입니다. 사람들은, 구원의 날을 준비하려고 엘리야가 재림하여 주님의 분노를 진정시키고 이스라엘을 재건하리라고 믿었습니다.
말라키 예언자는 주님의 길을 준비할 하느님의 심부름꾼이 오실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로써 제자들은 세례자 요한이 말라키 예언자가 말한 엘리야였음을 확신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이 앞서간 고난의 길을 가시리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구세주를 기다리는 삶은 신앙을 지키고 쇄신하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의 정의를 세우고, 오실 그리스도를 맞이하라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설파하였습니다.
구원의 은총은 거저 주어지지만, 우리에게 구세주를 맞이할 자세는 필요합니다. 불의에서 빠져 나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삶, 사치와 허영에서 소박하고 겸손한 삶으로 돌아가며, 마음을 비우고 하느님의 은총이 채워지기를 갈망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연말에 우리는 많은 것들을 정리합니다. 구세주의 탄생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일, 신앙에 방해되는 것들을 치우는 일들이 우리가 먼저 정리해야 할 ‘목록’에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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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엘리야, 세례자 요한 그리고 나>
마태오 17,10-13 (엘리야의 재림)
산에서 내려올 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율법 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그제야 제자들은 그것이 세례자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인 줄을 깨달았다.
<엘리야, 세례자 요한 그리고 나>
주님의 사제로서
종교의 영역에 속한 사람이지만,
인간을 억압하는 사회적 악의 구조에
침묵할 수 없습니다.
비록 주제를 모른다고
비난의 손가락질을 받을지라도.
성과 속, 육신과 영혼을 아우르는
인간의 총체적인 구원을 위해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온 세상에
드러내야하기 때문입니다.
가톨릭교회의 사제로서
온 생명 걸고 교회를 지켜가지만,
종교적 집단 이기주의에는
결코 함께 할 수 없습니다.
당신의 정체성이 의심스럽다고
욕을 얻어먹을지라도.
특정한 종교적 지향을 지닌
소수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한 뜻으로 창조된
모든 이를 하나로 모으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나의 주님으로 모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사제로서
모든 이를 사랑해야 한다 말하지만,
억압받는 이의 편에 서서
억압하는 자와 맞서겠습니다.
사제가 특정인을 편애하는 것은
잘못이라 비난할지라도.
억압받는 이를 품에 안으심으로써
오히려 억압하는 이를 회개시키고
구원으로 이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길이라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사제로서
사람들이 자기식대로 생각하는 주님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주님을 드러내야 하기에,
사람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기존의 질서를 깨뜨린다는 비난을 받을지언정,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지 않으며
굳건히 주님께서 알려주신 길을 가고 싶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를
준비하러 주님에 앞서 세상에 온,
온갖 불의를 불태웠던
불의 예언자 엘리야처럼.
세상 부패와의 완전한 단절을 외쳤던
회개의 예언자 세례자 요한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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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엘리야, 세례자 요한 그리고 나>
주님의 사제로서 종교의 영역에 속한 사람이지만, 인간을 억압하는 사회적 악의 구조에 침묵할 수 없습니다. 비록 주제를 모른다고 비난의 손가락질을 받을지라도 성과 속, 육신과 영혼을 아우르는 인간의 총체적인 구원을 위해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온 세상에 드러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가톨릭교회의 사제로서 온 생명 걸고 교회를 지켜가지만, 종교적 집단 이기주의에는 결코 함께 할 수 없습니다.
당신의 정체성이 의심스럽다고 욕을 얻어먹을 지라도. 특정한 종교적 지향을 지닌 소수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한 뜻으로 창조된 모든 이를 하나로 모으러 오신예수 그리스도를 바로나의 주님으로 모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사제로서 모든 이를 사랑해야 한다 말하지만, 억압받는 이의 편에 서서 억압하는 자와 맞서겠습니다. 사제가 특정인을 편애하는 것은 잘못이라 비난할지라도.
억압받는 이를 품에 안으심으로써 오히려 억압하는 이를 회개시키고 구원으로 이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길이라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사제로서 사람들이 자기식대로 생각하는 주님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주님을 드러내야 하기에, 사람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기존의 질서를 깨뜨린다는 비난을 받을지언정,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지 않으며 굳건히 주님께서 알려주신 길을 가고 싶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를 준비하러 주님에 앞서 세상에 온, 온갖 불의를 불태웠던 불의 예언자 엘리야처럼.
세상 부패와의 완전한 단절을 외쳤던 회개의 예언자 세례자 요한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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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조창현 클레멘스 신부님]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
<말씀과 함께…>
이사야서 45장 8절에 묵상하면서 영적일기를 준비합니다.
“하늘아, 위에서 이슬을 내려라. 구름아, 의로움을 뿌려라. 땅은 열려 구원은 피어나게, 의로움도 함께 싹트게 하여라. 나 주님이 이것을 창조하였다.”
이번 주에는 대림 시기 세 번째 초에 불이 밝혀져 있는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구세주의 탄생을 기다리는 우리 마음에도 예수님의 빛이 밝혀지기를 희망합니다. 고운님들 마음 안에 예수님의 빛이 밝혀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누군가를 얼마나 사랑했느냐? 삶의 자리에서 얼마나 열심히 살았느냐? 혹시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 일이 있었는지? 지금 내 삶이 아름다웠는지?
그리고 삶의 열매를 맺었느냐?”라고 나 자신 스스로 질문을 던져보면서 주님의 성탄을 바라보면서 준비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처럼 어떤 일이나 상황에서도 자신의 욕심을 부리지 않고, 하느님만을 바라보며 하느님의 뜻만을 따르는 고운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을 준비했던 세례자 요한은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았습니다. 자기 자신이 아닌 남을 위한 삶이었기에 고난의 상황에서도 행복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을 두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율법 학자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의 삶을 통해서 “자기를 위한 삶이 아닌 남을 위한 삶을 직접 실천할 수 있도록 저희에게 지침을 내려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고운님들은 어렵다고 또 힘들어 죽겠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그 대신 지금 아픔 속에 있는 고운님들의 이웃들을 바라보십시오. 그들과 함께 하는 가운데 주님 안에서 진정으로 희망을 보고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남을 위한 삶을 살아갈 때, 어떤 고통과 시련 가운데에서도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짐을 믿고 희망을 품고 행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고운님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말씀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자신부터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다른 사람들이 넘어지지 않도록 도와줄 수 있습니다. 이제 고운님들의 삶의 자리에서 ‘그리스도가 답’이라는 사실에 생명을 걸어야 합니다.
“더러운 잡것들아!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떠나가라.” 그 어둠의 시간에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노래를 불러야 합니다. 누구든지 주님 이름을 부르는 자는 충만하게 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특히 오늘 우리는 기념일을 맞이한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신앙생활을 성 요한 사제의 '영적 찬가'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느님 보화의 지혜에 들어가는 문은 십자가라는 문입니다. 그 문은 좁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들어가고 싶어 하는 이들은 적지만 그것을 통해서 다다를 수 있는 행복을 바라는 이들은 많습니다.”
저는 오늘 묵상한 것은, 성 요한 사제가 말씀하는 십자가의 문이란 “모든 의심에서 벗어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의심하지 않는 이는 행복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신앙생활은 바로 의심을 하지 않고 하느님을 믿는 십자가의 문을 들어가 걷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특히, 이 순간에도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걷고 계신 몸과 마음이 아픈 이들과 간호하는 이들, 그리고 고운님들의 자녀들, 그중에 아픈 손가락인 자녀들에게 치유와 회복의 은총을 주실 것을 의심하지 않고 믿으며 기도합니다. 아멘.
영적일기를 마무리 하면서….
온 누리를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주님 앞에 서 있는 날을 기다리며, 세례자 요한과 함께 주님의 빛이 고운님들 안에 들어와 말씀과 함께 소망하는 모든 일이 이루어지는 복된 은총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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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단단해지게 하는 시편(345)
♧♧ 시편 66편 17절…
"그분께 내가 입을 부르짖었지만 내 입술 밑에는 이미 찬미 노래가 있었네."
이 시편 저자로 보이는 다윗은 곤경 중에 하느님께 부르짖어 구원을 호소하면서도 또한 하느님께서 반드시 구원해 주실 줄로 확신하는 선취적 신앙으로 하느님께 감사 찬미를 드렸던 과거의 경험을 이야기 하면서 동시에 주님께 충실한 이들이 곤경 중에 가져야 할 신앙 자세를 교훈적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는 마침내 의심 많고 늘 불안한 마음으로 살아가며 어떤 일이 이루어지지 않고는 도무지 믿으려 들지 않는 우리 삶의 자세를 돌아보게 하는 것입니다.
♧♧ 시편 66편 18절…
"만일 내 마음 속에 죄악이 들어 있었다면 주님께서 들어 주지 않으셨으리라."
이 구절은... 하느님을 진정으로 경배하고 찬미하는 이의 마음가짐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저희에게 교훈적으로 가르칩니다. 여기서 ‘죄악이 들어 있었다.’라는 말은 ‘죄악을 본다.’라는 뜻으로 죄를 짓고 싶은 욕망이 마음속에 있음을 말하는데, 다윗은 이런 자의 기도를 ‘주님께서 들어 주지 않으셨으리라.’라고 확실하게 말하는 것입니다.(욥기 27장 9절. 잠언 15장 29절. 이사야서 1장 15절. 즈카르야서 7장 13절. 요한복음 9장 31절. 참조) 이 말은 ‘단순히 주님께서 그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신다.’라는 뜻이 아니라 ‘결단코 주님께서 그 기도에 응답하시지 않는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충실한 이들은 하느님을 대하는 외적인 자세에 있어서는 물론 보다 근본적인 그 내적 마음 자세에 있어서도 항상 심령과 진실로 하느님을 경외하는 이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요한복음 4장 24절.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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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미국의 어느 교도소에서 수감자들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했습니다. 질문은 이것이었지요. “성장하는 동안 부모에게서 가장 많이 들은 이야기는 무엇입니까?” 수감자들의 90%가 공통으로 가장 많이 들은 이야기는 “너 같은 녀석은 결국 교도소에 갈 거야.”라는 소리였습니다. 말은 실제로 이루어진다는 이야기가 있지요. 그래서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이 점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파우스트’의 저자인 괴테의 말에서도 다시금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은 보이는 대로 대접하면 결국 그보다 못한 사람을 만들지만, 잠재력대로 대접하면 그보다 더 큰 사람이 된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에서 멈추지 말고, 그 이면까지 바라보고 대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시선은 늘 겉모습에서 멈추고 맙니다. 이렇게 닫혀 있는 시선으로 변화도 만들 수 없으며, 새로운 삶으로 나아갈 수도 없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시각을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그들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에서만 멈추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놀라운 말씀을 하시고, 또 놀라운 기적을 행하셔도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입니다.
오히려 마귀 두목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서 그런 것이라며 평가절하하면서예수님을 제거할 마음만 품고 있었지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사람들은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메시아가 오시기 전에 엘리야가 미리 온다는 것을 예언서를 통해서 알고 있었지요. 실제로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엘리야의 모습으로 세례자 요한이 왔고, 그 후에 메시아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합니다. 우리는 어떨까요? 과연 우리 곁에 오시는 주님을 알아보고 있을까요? ‘나’라는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또 겉으로 보이는 모습에서만 벗어나지 못한다면 절대로 주님을 알아볼 수도 없고 함께 할 수도 없습니다. 주님을 알아 뵙고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은 마음을 열어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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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걸 하는 것>
스트레스를 풀어야 하는데 어떻게 풀지 모르겠다면, 푸는 방법은 내가 좋아하는 걸 하는 것이다. 좋아하는 걸 하면서 좋아하는 것에 집중한 뒤에 시간이 흐르고 나서 나를 힘들게 한 일을 다시 마주하게 되면 3가지 좋은 경우를 만나게 된다.
싫어하는 것만 계속 바라보며 싫은 것에 대한 싫은 생각의 크기가 계속 커지는 것을 막을 수 있고, 시간이 지나 싫은 것을 다시 봤기 때문에 싫어하는 크기가 작아져 있고, 그게 아니라면 싫어하는 시간을 버티면서 ‘좋아하는 걸’ 생각하면서 얼른 스트레스를 풀러 가야지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된다.
작가 글배우의 ‘지쳤거나 좋아하는 게 없거나’라는 책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좋아하는 것을 하면서 좋아하는 것에 집중해야 하는데, 많은 이가 싫어하는 것을 하면서 싫어하는 것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삶의 반복입니다. 스스로 책임질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좋아하는 것을 해야 합니다. 분명히 삶이 어렵고 힘들지만 않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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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1)
성서는 ‘엘리야’ 예언자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엘리야 예언자를 이야기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거룩하게 변모하셨을 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세와 엘리야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땅에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였다면, 엘리야는 거짓된 신에 빠져있던 이스라엘 백성을 하느님께로 인도하였습니다. 오늘은 저도 엘리야 예언자에 관한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첫째, 엘리야 예언자는 거짓 예언자들과 대결하였습니다. 거짓 예언자는 수도 많았고, 힘도 강하였습니다. 그러나 엘리야 예언자는 하느님을 믿었고, 하느님께 의지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엘리야 예언자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예언자는 불의한 시대에 하느님의 의로움을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엘리야는 다시 오리라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부활한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부활은 ‘다시 일어난다.’라는 의미입니다. 부활은 ‘반대하여 일어난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거짓과 불의에 맞서 일어나는 것이 부활입니다. 불의한 권력에 맞서 일어나는 것이 부활입니다.
둘째, 엘리야 예언자는 아합왕의 잘못을 지적하였습니다. 아합왕은 욕심이 과해서 나붓의 포도원을 빼앗았습니다. 아합왕의 권세와 힘을 두려워했던 사람은 아무 말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당당하게 “나봇의 피를 핥던 개가 아합왕의 피를 핥을 것이다.”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세례자 요한도 헤로데 왕의 잘못을 당당하게 이야기하였습니다. 권력에 편승하고, 불의에 야합하고, 자신의 이익만을 챙기려는 사람은 결코 엘리야가 될 수 없습니다. 어둠의 시대에, 군사 독재의 시대에 당당하게 목소리를 내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엘리야이고, 세례자 요한이고, 예언자입니다.
셋째, 엘리야는 힘든 시기에 ‘호렙산’으로 갔습니다. 호렙산은 모세가 하느님에게 십계명을 받은 산입니다. 호렙산은 하느님이 계시는 거룩한 산입니다. 엘리야는 호렙산에서 두 가지 체험을 했습니다. 하느님은 불기둥 속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은 지진 가운데 계시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은 바람 속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은 침묵 속에 계셨습니다. 엘리야는 침묵 속에 계신 하느님을 체험했고, 새로운 임무를 받았습니다. 엘리사를 후계자로 삼으라고 하십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일수록 우리는 하느님께 의지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용기를 주시고, 지혜를 주십니다.
15년 전의 일입니다. 구역장, 반장을 위한 강의가 있어서 성당엘 갔습니다. 생각보다 일찍 왔고, 제 앞에 강의하실 신부님이 있다고 했습니다. 성당 옆에는 불가마 사우나가 있었습니다. 저는 잠시 쉬려고 불가마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방송에서 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사우나에서 저를 부른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저는 급히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제 앞에 강의하기로 한 신부님이 길이 막혀서 늦는다고 연락이 왔다고 합니다. 봉사자는 저를 기억하였고, 저를 찾아서 성모상 앞, 사제관, 성체조배 방을 갔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곳에 저는 없었고, 불가마에서 저를 찾았다고 합니다. 정신없이 강의를 마치고 생각했습니다. 그분들이 생각하던 곳에 저는 없었습니다. 저는 제가 필요로 하는 곳에 있었습니다. 가난한 이 곁에, 고통 중에 있는 이 곁에, 아파 병상에 있는 이 곁에, 주님이 계시는 성체 앞에 저는 없었습니다. 제 마음이 가는 곳에, 저를 즐겁게 하는 이들 곁에, 제가 기뻐하는 일에 주로 제가 있었습니다.
주님의 성탄을 준비하는 대림 시기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길을 준비하였고,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오시는 날을 꿈꾸었습니다. 엘리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오시면 하였을 일들을 보여주었습니다. 물이 맑으면 달이 머물고, 나무를 심으면 새들이 머문다고 합니다. 어떤 모습으로 주님의 오심을 준비해야 하는지 돌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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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지난 화요일에 선배 신부님의 ‘모친’ 장례미사를 다녀왔습니다. 60이 훌쩍 넘으신 신부님께서 강론 중에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라는 시를 읽어 주었습니다.
나이를 먹으면서 ‘엄마’라는 말을 한 적이 거의 없습니다. 주로 ‘어머니’라고 불렀습니다. 강론을 들으면서 ‘엄마’라는 말이 더욱 친근하게 느껴졌습니다.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하루 종일 밭에서 죽어라 힘들게 일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찬밥 한 덩이로 대충 부뚜막에 앉아 점심을 때워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한겨울 냇물에서 맨손으로 빨래를 방망이 질 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배부르다 생각 없다 식구들 다 먹이고 굶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손톱이 깎을 수조차 없이 닳고 문드러져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가 화내고 자식들이 속 썩여도 전혀 끄떡없는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외할머니 보고 싶다
외할머니 보고 싶다 그것이 그냥 넋두리 인줄만
한밤중 자다 깨어 방구석에서 한없이 소리 죽여 울던 엄마를 본 후론
아 ! 엄마는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번 성탄에는 의정부 ‘엄마’에게 가서 점심을 먹고 와야겠습니다. 결코 어려운 일도 아닌데,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도 아닌데, 돈을 많이 쓰는 일도 아닌데 하지 못했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면 우리의 따뜻한 손길이 필요한 ‘엄마’들이 참 많습니다. 식당에서 껌을 하나 사드리니, 어르신께서 엄지를 치켜세우십니다.
오늘 성서는 신앙인들이 따라야 할 ‘이정표’와 같은 분들 말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엘리야’입니다. 오늘 제 1독서에서 들었던 ‘엘리야’ 예언자도 그렇습니다. 구약성서에 엘리야 예언자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거짓 예언자와 싸워서 이긴 이야기, 사렙다 과부에게 기적을 베푼 이야기, 하느님을 만난 이야기, 하늘에서 불을 내린 이야기, 승천한 이야기 들이 전해집니다.
구약시대의 예언자인 엘리야는 지금도 신앙 안에서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에게 힘과 용기를 줍니다.
주님의 성탄을 준비하는 대림시기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길을 준비하였고,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오시는 날은 꿈꾸었습니다. 엘리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오시면 하였을 일들을 보여주었습니다.
오늘 나는 어떤 모습으로 주님의 오심을 준비해야 하는지 돌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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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순교 영성>
-희망과 기쁨-
“순교는 신자들이 숨쉬는 공기다”(Martytrdom is the air that Christians breathe)
교황님 강론중 한 말씀이 마음 깊이 와닿습니다. 나름대로 믿는 이들 모두가 순교적 어려움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고통과 고난의 순교영성은 믿는 이들의 일상처럼 생각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제 자작 좌우명시 마지막 연이 일상화된 순교영성을 보여줍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평생처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그러나 우리의 순교영성은 어둡고 무겁거나 우울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자기를 버리고 믿음으로 제 십자가를 지고 우리의 희망이신 주님을 따르기에 기쁨이 있습니다. 하여 우리는 하루하루 부정적 비관의 고해인생이 아니라 긍정적 낙관의 축제인생을 살아갑니다.
오늘은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입니다. 제가 성인 축일에는 반드시 확인하는 생몰生沒 연대에 제 나이와의 비교입니다. 성인은 만49세를 사셨고, 말그대로 가난과 고통의 파란만장한 순교적 삶이셨습니다.
가르멜 수도회 개혁에 반대하던 완화 가르멜 수도자들게 납치되어 9개월간 수도원 다락방에 감금되어 온갖 고초를 겪었고, 1590년 수도회 분쟁이 재현되어 1591년 모든 직책에서 물러나 멕시코로 가게 되었지만 병에 걸려 그해 9월말 우베다 수도원으로 옮긴후 병고와 정신적 고통을 겪다가 12월13일 밤 자정이 지난 무렵 바로 오늘 12월14일 선종합니다.
그러니 오늘은 십자가의 성 요한의 천상탄일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이란 명칭에서 보다 시피 평생 십자가를 진 순교적 삶에 충실한 성인이었습니다. 이런 와중에서 교회의 위대한 신비가이자 시인으로서 영성신학의 고전으로 일컬어지는 참 깊고 그윽한 ‘가르멜의 산길’. ’영혼의 노래’,‘사랑의 산 불꽃’같은 불멸의 저서를 남겼습니다.
“희망은 신자들이 숨쉬는 공기와 같다”
역시 교황님의 말씀입니다. 희망과 기쁨중에 자발적 순교적 삶이라는 것입니다. 순교적 삶의 모범인 바오로 사도 역시 ‘기쁨의 사도’라 칭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어려움 중에도 희망과 기쁨의 순교적 삶을 산 성인들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은 결코 절망, 원망, 실망의 삼망의 삶을 살지 않습니다. 반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와 감동, 감탄의 삼감의 삶을, 희망과 기쁨의 삶을 삽니다. 바로 승천한 전설적 인물, 엘리야가 그랬습니다.
“엘리야여, 당신은 놀라운 일들로 얼마나 큰 영광을 받으셨습니까? 누가 당신처럼 자랑스러울 수 있겠습니까? 당신은 불 소용돌이 속에서 불마차에 태워 들어 올려 졌습니다.---당신을 본 사람들과 사랑 안에 잠든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우리도 반드시 살아날 것입니다.”
오늘 집회서의 말씀은 그대로 시공을 초월한 우리의 엘리야에 대한 고백처럼 생각됩니다. 순교적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희망과 기쁨을 제공하는 엘리야의 승천입니다. 바로 이런 엘리야의 재림을 오늘 복음은 전합니다. 바로 예수님은 물론 초대교회 신자들은 세례자 요한을 엘리야의 재림으로 믿었습니다. 바로 그 근거는 오늘 집회서에 근거합니다.
“당신은 정해진 때를 대비하여 주님의 분노가 터지기 전에 그것을 진정시키고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되돌리며 야곱의 지파들을 재건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집회48,10)
바로 이런 엘리야의 재림이 세례자 요한인데 사람들의 무지로 인해 좌절되고 말았다는 다음 예수님의 고백입니다.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 잡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회개로 기억되지 않는 역사는 무지로 인한 악순환의 반복입니다. 하여 메시아 의 선구자 세례자 요한이 배척을 당했고, 메시아인 예수님도 배척을 당하셨습니다. 우리 나라의 경우를 봐도 참으로 악순환의 반복입니다. 남북한의 분단도 아픔이지만 국가브랜드에서 나타난 우리나라의 현실도 아픔입니다. 함께 평화 통일하여 나아가도 부족할 터인데 얼마나 극단으로 치닫고 있는 남북분열, 남남분열의 적나라란 현실인지요.
-국가 브랜드 조사는 대한민국을 포함한 전 세계 50개국을 대상으로 상품신뢰도, 정부신뢰도, 문화력, 국민친근감, 관광선호도, 이주-투자 매력등 6개 카테고리를 기반으로 평가한 결과 순위는 독일, 일본, 영국, 프랑스, 캐나다, 순이었고 우리나라는 27위로 중진국 수준에 머물렀다는 것입니다. 아직도 갈길이 먼 우리나라입니다.
남북의 분단도 뼈아픈 현실입니다. 2018년 기준으로 북한 주민들은 한국인 보다 12-13살이 적은 것으로 나타났고, 북한의 인구는 한국의 절반 수준, 북한의 명목 국민총소득(GNI)은 한국의 1.9%, 1인당 국민 총소득은 한국의 3.9%, 북한의 대외 무역 총액은 한국의 0.2%, 참으로 언젠가는 함께 통일하여 가야할 형제나라인데 작금의 남북의 현실은 참 어둡습니다.-
그러나 절망, 원망, 실망은 금물입니다. 철저한 회개와 반성으로 새롭게 태어나야 할 대림시기입니다. 우리의 시야를 넓고 깊게 해야 할 것입니다. 엘리야의 재림인 세례자 요한이 이루지 못한 꿈을 이루기 위해, 또 우리를 찾아 오시는 대림의 주님을 잘 맞이하기 위해 희망과 기쁨으로 우리의 순교적 삶에 충실하도록 해야 겠습니다.
결코 오늘 복음의 사람들처럼 무지로 인해 세례자 요한같은 이들을, 메시아 예수님을 배척하는 악순환의 반복이 있어선 안되겠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각자 주어진 순교적 삶에 충실하고 항구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하느님, 저희를 일으켜 주소서. 당신 얼굴을 비추소서. 저희가 구원되리이다.”(시편80,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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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오시기로 되어있는 분>
유다인들은 메시아가 오기에 앞서 그가 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전령이요 선구자로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마지막 예언서인 말라기서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그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리라. 그래야 내가 와서 이 땅을 파멸로 내리치지 않으리라”(말라3,23-24) 이 본문은 예수님 시대의 유다인들의 신앙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엘리야가 ‘이미 왔는데도’그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이름은 다르지만 세례자 요한이 바로 메시아에 앞서 오게 되어 있는 엘리야인데 그를 몰라 본 것입니다. 사실 누군가를 알아보려면 열린 마음이 필요합니다.
루카복음 1장16절은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을 그들의 하느님이신 주님께 돌아오게 할 것이다. 그는 또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 그분보다 먼저 와서,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의인들의 생각을 받아들이게 하여,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할 것이다”하고 천사의 이야기를 전함으로써 세례자 요한의 출생을 예고했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요한1,23)라고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그는 마침내 하느님나라를 위해 백성들을 준비시킨 마지막 때의 예언자로서 엘리야의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시대의 표징을 알아보지 못하고 요한을 제멋대로 다루었습니다. 그리고 헤로데는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있었음에도 헤로디아의 딸에게 헛된 맹세를 하여 결국 요한의 목을 베도록 명하였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몹시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라 그의 청을 물리치고 싶지 않았다.”(마르6,26) 그러나 헤로데만이 그를 죽였는가? 생각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잘못은 모두에게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요한의 외침을 따르기를 거부하고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헤로디아는 헤로데 동생인 필리포스의 아내 입니다. 그러나 헤로데와 혼인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여러 차례 말했습니다. 이것을 알고 있는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앙심을 품고 그를 죽이려 했습니다. 그리고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 서리가 내린다.’고 했나 봅니다. 사실 헤로디아의 마음이 우리 안에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길을 거부하고 내 마음대로 하려는 욕심과 똥고집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마음을 바꾸지 못한다면 우리도 요한을 죽인 공범자가 되고 맙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시대의 징표를 읽고 마음을 하느님께로 돌려야 하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언자도 메시아도 결코 만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도 고난을 받을 것이다” (마태17,1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언자 엘리야의 역할을 한 요한을 알아보지 못했고 결국 메시아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언자를 죽인 그들이 결국은 예수님까지도 십자가에 못 박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사악하기보다도 자기 안에 갇힌 무지의 탓이 크다 할 것입니다.
물론 요한의 죽음이 단순히 한 왕의 방자한 변덕과 경솔한 맹세의 결과가 아니라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요한12,24) 메시아적인 구원의 죽음이었지만 이것을 받아들이기 까지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제자들이 반드시 배워야 할 삶이었습니다. 따라서 죽음을 통해 새로운 생명이 온다는 진리를 알면, 주님을 따름에 있어 고통의 길은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막연히 내가 그려놓은 주님을 기다리지 말고 주님께서 어떤 모습으로 오시든지 제대로 알아볼 수 있도록 깨어있어야 하겠습니다.
“오, 주님! 저는 당신을 몰랐나이다. 다만 지상의 일들을 알고 맛보려 했나이다. 주 하느님! 모든 것을 바꾸어 주시어 당신 안에 편히 쉬게 하소서.”(십자가의 성 요한)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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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독서와 복음에는 엘리야가 언급됩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 백성이 꼽는 대표적 예언자 중 한 사람입니다.
"율법 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마태 17,10)
주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 이후 산을 내려오던 제자들이 예수님께 여쭙니다. 그들은 방금 엘리야와 모세를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하였지요. 엘리야의 출현으로 제자들은 스승이신 예수님의 예언자적 소명의 정통성과 연속성을 확인합니다.
제1독서는 엘리야 예언자에 대한 집회서의 대목입니다. 길지 않은 내용 중 "불"이란 말씀이 다섯 차례나 등장합니다.
"엘리야 예언자가 불처럼 일어섰는데"(집회 48,1)
"그의 말은 횃불처럼 타올랐다."(집회 48,1)
"세 번씩이나 불을 내려보냈다."(집회 48,3)
"당신은 불 소용돌이 속에서"(집회 48,9)
"불 마차에 태워 들어 올려졌습니다."(집회 48,9)
엘리야의 표상인 "불"은 정화와 열정, 사랑을 상징합니다. 죄와 악습을 태우고 살라 버려 정화시키고, 마음을 뜨겁게 하여 주님을 향하게 만들며, 성령 안에서 사랑이 되게 합니다. 그 자신이 곧 "불"인 엘리야의 사명은 "정해진 때를 대비하여 주님의 분노가 터지기 전에"(집회 48,10) 백성을 준비시키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마태 17,12)
엘리야의 그 사명을 부여받은 이가 바로 세례자 요한입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아합 왕의 아내인 바알 숭배자 이제벨의 손아귀를 벗어나 불마차에 태워져 승천한 것과 달리(1열왕 17장 -2열왕 2장 참조), 세례자 요한은 헤로데가 취한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의 부추김과 그 딸의 춤값으로 목이 베어져 순교하지요.(마태 14,1-12 참조)
'아는 것'과 '알아보는 것' 사이의 간극이 얼마나 큰지요! 율법 학자들은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는 사실은 머리로 알고 있었지만, 메시아에 앞서 길을 준비하러 온 세례자 요한에게서 엘리야를 알아보지는(관상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니 세례자 요한이 "내 뒤에 오시는 분"(마태 3,11)에 대해 아무리 증언하고 선포해도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아볼 눈이 열릴 수 없었지요.
마침 오늘은 주님 향한 사랑의 불꽃으로 이글이글 타올랐던 십자가의 성 요한 기념일입니다. 덕분에 오늘 우리는 엘리야와 세례자 요한, 십자가의 성 요한이라는 세 개의 불덩이를 한 자리에서 만났네요. 하느님께서 때에 맞춰 우리에게 보내 주신 성인들을 통해 우리는 정화되고 열정을 되찾아 열렬한 사랑으로 주님께 뛰어들게 됩니다. 이들은 우리가 주님을 알아보도록 눈을 열어 주는 불꽃입니다.
대림 제3주일을 앞두고 다시금 사랑의 불을 지피는 하루 되시길 빕니다. 여러분이 불타는 사랑으로 불이신 주님을 맞이하여 하나의 불길로 함께 타오를 수 있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루카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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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하느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제2의 기회’를 주신 것이다
하느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제2의 기회’를
주신 것이다. -유안진(클라라) 시인
차마 아담과 하와를 죽일 수는 없었다. 어떤 부모가 낳아 키운 자식을 죽일 수 있겠는가?
자식을 이기는 부모는 없다고, 하느님께서도 아담과 하와에게 ‘제2의 기회’를 주신 것이다.
그러니 내가 거짓말쟁이가 되는 게 낫지, 우선 자식들을 살려놓고 봐야지 고생하면서 철 들겠지! “여자에게 난 네가 임신하여 커다란 고통을 겪게 하리라. 너는 괴로움 속에서 자식들을 낳으리라.” 아담에게 “네가 아내의 말(하느님 말씀 보다 )을 듣고 내가 너에게 따 먹지 말라고 명령한 나무에서 열매를 따먹었으니, 땅은 너 때문에 저주를 받으리라. 너는 사는 동안 줄곧 고통 속애서 땅을 부쳐 먹으리라."(창세 3,17-19)
♣심지어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과 그의 아내에게 “가죽 옷을 만들어 입혀 주셨다.’”(창세 3,21)
그리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으로 사람이 되시어, 당신이 거짓말 했던 것을 당신이 대신 죄악의 대속 물로 희생의 십자가 희생 제물이 되신다.
당신 자녀들이 받은 죄악의 대가를 친히 몸소
받아 내셨다. 덕분에 ‘먹는 날’ 죽을 우리가 지금 여기에 살아 있다고 본다. 예수 성심은 우리 이해를 넘어 가슴에 쓰라린 통증까지 느껴지는 듯했다.
-<김홍언 신부 영성노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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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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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알아차리기>
마태오 17장 10~13
"엘리야가 이미 왔지만
그들은 알아보지 못하였다."
우리의 기준으로 보면 다 놓치고 맙니다.
거지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길거리 상인으로 나타나며
택배 아저씨로도 오십니다.
놓치고 늦은 후회를 했던 과거가
얼마나 첩첩이 쌓여 있습니까?
가장 가까이 있는 함께 사는 사람 그 안에
담긴 예수님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한다면
이제 좀 더 눈여겨보고 보물을 찾아내듯 알아차리는 기쁨 맛봅시다.
"그 사람의 진가를 알아보는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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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마태 17, 12)
의로운 이들을
알아보지 못하고
살 때가 많습니다.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우리 마음이
다른 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알아보지 못해도
주님께서는 분명
우리에게
오실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가
어디로부터
왔는지를
알게 합니다.
이 대림시기는
우리가 잃어버리고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성찰하게 합니다.
한꺼번에
모든 것을
다 볼 수는
없습니다.
조금씩만이라도
주님을 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함께 서로를
알아보는 것이
성탄의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소중한 서로를
알아보고
맞아들이는 것에
기쁘고 편안한
대림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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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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