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열공 김취려(威烈公金就礪) 장군 김취려(金就礪, 金就呂로도 쓴다)는 고려 고종 때 거란적의 침략을 격퇴하는 데에 지대한 공로를 세운 무신이다. 본관은 언양(彥陽)으로 할아버지는 금오위(金吾衛) 섭낭장(攝郎將) 김언량(金彦良)이고, 아버지는 금오위 대장군 김부(金富)이다. 어머니는 검교장군(檢校將軍) 행낭장(行郎將) 주세명(朱世明)의 딸이다. 김취려는 부음(父蔭)으로 정위(正尉)가 된 뒤 중랑장과 장군을 거쳐 대장군에 올랐다. 1216년(고종 3) 8월에 거란적이 침략하자 왕이 중군·우군·후군의 삼군을 편성해 출정시켰다. 김취려는 섭(攝) 상장군으로서 후군을 지휘해 서북면 일대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지만 그의 장남이 전사했다. 거란적이 대동강을 넘어 서해도로 진출했다. 김취려는 다음해 초에 상장군이 되어 거란적과 대치했다. 고려정부는 삼군을 오군(五軍)으로 개편해 거란적을 저지하려 했지만 패배했고, 김취려는 분투했지만 부상을 입은 채 돌아왔다. 거란적은 개경을 위협하더니 장단을 건너 동주(철원)를 함락하고 남하했다. 최충헌이 오군을 다시 개편하면서 김취려를 전군병마사(前軍兵馬使)로 삼았다. 이어진 전투에서 김취려의 전군은 때로는 패배하기도 했지만 자주 승리를 거두며 적을 추격해 제주(提州)에 이르더니 박달현(朴達峴)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타격을 입은 거란적은 남하하지 못하고 동쪽으로 대관령을 넘어 등주, 함주를 지나 여진 땅으로 들어갔고, 김취려 군대는 여진 국경까지 추격했다. 거란적은 여진 병력을 추가해 다시 고려를 침략했는데, 김취려는 병이 들어 개경으로 돌아와야 했다. 김취려는 1218년(고종 5)에 상장군으로 판예빈성사(判禮賓省事)를 겸했다. 고려정부는 오군을 삼군으로 개편해 거란적을 저지하려 했지만 효과가 없자 조충(趙冲)으로 중군 원수 겸 서북면 원수를, 김취려로 병마사를 삼고 전군·좌군·우군·후군을 편성했다. 오군으로 편성한 것인데 조충은 원수로서 중군을 지휘했고, 김취려는 중군에서 병마사로서 부원수 역할을 한 것이었다. 조충과 김취려의 고려군이 거란적을 압박하니 거란적은 평양 동쪽 강동성으로 들어갔다. 합진(哈眞)의 몽골군 및 완안자연(完顔子淵)의 동진군이 강동성으로 향했다. 1219년(고종 6)에 고려군이 이 두 외국군과 연합해 강동성을 포위 공격하니 거란적이 항복했다. 합진이 조충과 김취려에게 요청해 몽골과 고려가 형제 맹약을 맺었다. 몽골 원수를 전송하다가 서경(西京) 재제사(齋祭使)에 임명되어 서경에서 제사를 지냈다. 의주(義州)에서 한순(韓恂)과 다지(多智)가 여러 성과 연결해 반란을 일으키자 김취려가 우군을 이끌고 중군·후군과 함께 토벌하다가 다음해에 추밀부사(樞密副使)에 올라 중군을 이끌고 토벌을 완료했다. 부하를 보내 거란의 잔여 무리까지 토벌하니 북쪽 국경이 안정되었다. 1221년(고종 8)에 추밀사(樞密使) 병부상서 판삼사사에, 다음해에 금자광록대부 참지정사 판호부사에 임명되었다. 1228년(고종 15)에 수태위(守太尉) 중서시랑평장사 판병부사에, 1230년(고종 17)에 평장사 판이부사에, 1232(고종 19년) 3월에 수대부(守大傅)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문하시랑평장사에 올랐다. 최우 무인정권이 1232년(고종 19) 6~7월에 개경에서 강화로 천도함에 따라 김취려도 강도(江都)로 이주해 문하시중에 올랐고 다음해에 특진(特進) 주국(柱國)을 받았다. 1234년(고종 21) 5월 21일 강도(江都)에서 63세로 사망하였으며, 7월 12일에 진강현(鎭江縣) 대곡동(大谷洞) 서쪽 기슭에 장례 지냈다. 시호 위열(威烈)을 추증받았고, 고종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오래 전에 답사를 한 묘역인데 못 보고 묘만 보고 왔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위열공 김취려(威烈公金就礪)의 묘 울산광역시 언양면 송태리(松台里)에 있는 묘이며,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7호이다. 공의 본관은 언양이며, 예부시랑을 지낸 김부(金富)의 아들이다. 음서로 정위(正尉)에 임명된 후 동관위(東官衛)에 배속되었다. 그 후 장군이 되어 동북계를 맡아 지켰고 대장군이 되었다. 1216년(고종 3) 거란의 왕자 김산(金山)·김시(金始)가 압록강을 건너 쳐들어 왔을 때, 이를 무찔러 큰 공을 세웠다. 1217년에 금오위상장군(金吾衛上將軍)에 임명되었다. 그해 5월 명주[溟州: 지금의 강릉]에서 거란과의 싸워 큰 공을 세웠다. 추밀원사병부상서판삼사사(樞密院使兵部尙書判三司事), 참지정사판호부사(參知政事判戶部事), 수태위중서시랑평장사판병부사(守太尉中書侍郞平章事判兵部事)를 거쳐 1232년(고종 19)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올랐다. 시호는 위열이다. 묘는 언양면사무소에서 서쪽으로 약 3㎞ 떨어진 산속에 원형분으로 잘 보존되어 있다. 언양김씨 종친회에서 관리하고 있다. 장군의 애국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이곳에 유허비를 세우고, 후손들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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