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 관룡사가 신돈의 옥천사이다
작성일: 2007/04/03 작성자: 이양훈
창녕 관룡사(계성면 소재) 에 봄이 짙어간다.
보물인 대웅전·약사전·석조여래좌상·용선대 석조석가여래좌상 (모두가 보물이다)이 있어,
작지만 역사가 깊은 큰 절 관룡사이다.
필자가 찾아간 그날, 사찰에는 바야흐로 새봄이 일어나고 있었다.
뒤쪽 관룡산(화왕산 연봉으로 그 줄기는 경북 달성군 비슬산에 이어 있다)
에 진달래가 만발했다.
필자가 이 절을 주목하는 것은 관룡사가 신돈辛旽(?∼1371)의 사찰 옥천사라는 것이다.
고려말 공민왕때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을 설치해 지주, 세족들에게 빼
앗긴 농민들의 재산을 돌려주고 권문호족의 전횡을 막는 등 우리 역사상 전
무후무한 개혁을 실시한 신돈, 그의 출생사찰이 이 관룡사인 것이다.
고려사에 따르면,
신돈의 어머니는 계성현(현재의 계성면, 당시는 밀양의 속현)에 있는 사찰
옥천사玉泉寺의 노비였다고 했다.
그러므로 신돈은 그 출신 상의 문제로 인해 평생 부정되고 고통받았다.
신돈이 죽은 1371년, 조정은 옥천사 절을 헐어 버렸다고 전해 오는데, 이 옥
천사가 미스테리의 사찰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한반도의 화엄 6대 사찰은
① 태백산의 부석사
② 원주 비마라사
③ 가야산 해인사
④ 비슬산 옥천사玉泉寺
⑤ 금정산 범어사
⑥ 남악(南岳:지리산) 화엄사라고 했다.
우리 불교사에서 이토록 큰 위치를 점하고 있는 옥천사가 비슬산 먼 기슭인
이 창녕군 계성면 옥천리에 있었는데 그 정확한 위치가 아직까지 규명되지
않고 있다.
옥천리는 넓은 지역이 아니므로 나타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관룡사 외에 어떤 대찰도 이 옥천리에는 없다.
관룡사 연기문에는, 관룡사가 신라 흘해왕 때인 서기 379년에 창건되었고
한 때는 원효대사가 1천여 명의 대중을 상대로 화엄경을 설법한 대 화엄도
량으로 신라 8대 사찰의 하나였다고 했다.
신라 6대사찰 옥천사와 신라 8대사찰 관룡사가 한 계곡에 있는데 다른 사찰이
아니다.
신돈의 옥천사가 관룡사인 것이다.
어린 신돈이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잡고 자란 사찰 옥천사, 오늘의 관룡사에
아직 봄날 새소리는 들리지 않고 있다.
신돈의 아버지는 이 관룡사 아래쪽 큰 고을인 영산靈山의 호족 신씨辛氏였다.
영산신씨는 다른 성씨들과는 달리 영산에서 발원한 토착성씨로 전해온다.
(신씨성관고辛氏姓貫考에 그렇게 적혀 있다)
영산신씨는 고려시대와 조선에 걸쳐 큰 세력을 지닌 호족이었다.
낙동강의 요지 영산에서 발원한 영산신씨는 비록 신돈으로 일시적으로 위축
되었지만 당시 신귀辛貴의 후손들이 조선개국 1등공신이 되는 등 조선에서
도 영달했다.
한국역사상 대표적 개혁자로서, 우리 역사상 불세출의 인물인 신돈이 태어
나고 자란 관룡사, 입구의 장승은 아무 말이 없다.
망해가는 고려를 일시적이나마 되살린 인물 신돈의 관룡사는 봄을 맞아 계
곡에 짙게 덮인 황사만큼이나 두꺼운 베일을 덮고 있는 것이다.
첫댓글 신돈의 출생지는 옥천사 라는 별도의 사찰이 폐사된채로 존재 합니다.(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옥천리 산 219번지 일대)
비슬산 옥천사 는 우리고장 옥천과는 무관 하다고 봅니다.
보리밭님 맞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