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이 배출한 조선 후기 대유학자 임헌회(任憲晦) 임헌회(任憲晦)님은 아산시 염치읍 쌍죽리 사람이다. 외가인 천안시 직산면 산음리에서 태어나 아산시 염치읍 쌍죽리에서 성장 했다고 한다. 아산 사람이지만 공주와 연기(세종시 일원)에 그분의 유적이 많이 남아있다. 몇년전 온양관광호텔 기로연(耆老宴) 자리에서 그분의 후손을 우연히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는데 그분은 원래 아산시 염치읍 쌍죽리 풍천임씨 집성촌 사람인데 관직에 나가지 않기 위해 집을 떠나 생활 했었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을 수 있었다. 임헌회(任憲晦) 님은 설에 의하면 조선후기 제자가 2천명 내지 3천명에 이른다 할 정도로 제자가 가장 많은 학자로 이름이 나있는 분이시기도 하다. 그분의 발자취는 아산, 천안, 공주, 연기, 태안 등 충청도 일원에 남아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산시에서는 이런 훌륭한 사람이 아산시 출신인 것도 모르고 있는 것 같아 참으로 안타깝게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아산시 행정은 아산시의 인물과 자원을 잘 관리해야 하는 것이다. 있는 자원도 관리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기가 너무나 안타까워 이런 글을 써봅니다. 누가 보거나 말거나 . . . . . -----------------
임헌회(任憲晦)님 기(氣)의 우위를 주장하는 일원론적인 주기파(主氣派)에 속하며 주학을 극력 배격했던 조선후기 학자. 주요 저서에는 《고산문집(鼓山文集)》, 《속고산집(續鼓山集)》 등이 있다. 출생-사망 : 1811 ~ 1876 본관 : 풍천(豊川) 자 : 명로(明老) ·중명(仲明) 호 : 고산(鼓山) ·전재(全齋) ·희양재(希陽齋) 시호 : 문경(文敬) 활동분야 : 문학 주요저서 : 《고산문집(鼓山文集)》,《속고산집(續鼓山集)》 본관 : 풍천(豊川). 자 명로(明老) ·중명(仲明). 호 고산(鼓山) ·전재(全齋) ·희양재(希陽齋). 시호 문경(文敬). 경서(經書)에 몰두, 학자로서 이름이 알려지자 1858년(철종 9) 참봉(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다. 1874년(고종 11) 대사헌이 되고 이어 좨주(祭酒)가 되었다. 성리학에서는 이기(理氣)이원론(二元論)을 배격, 기(氣)의 우위를 주장하는 일원론적인 주기파(主氣派)에 속했다. 천주학을 극력 배격했다. 저서에는 《고산문집(鼓山文集)》 《속고산집(續鼓山集)》 등이 있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임헌회 [任憲晦] (두산백과) ----------------
임헌회 인장(任憲晦印章) 분야 : 역사/전통 시대, 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 유물/유물(일반) 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연수원길 103[금흥동 110-2] 시대 : 조선/조선 후기, 근대/개항기 문화재 지정 일시 : 2014년 문화재 지정 번호 :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 제40호 출처 : 디지털세종시문화대전-임헌회 인장 조선 후기 연기 지역에 거주한 임헌회와 그 후손의 인장. 임헌회(任憲晦)[1811~1876]는 19세기 말 성리학자이다. 충청남도 연기·공주 일대에서 크게 활약한 성리학, 특히 주기론(主氣論)을 주장한 인물이다. 대표적인 문인으로는 간재(艮齋) 전우(田愚), 경의당(敬義堂) 김진수(金振遂) 등이 있다. 임헌회의 문집교지와 함께 인장이 보존되어 있다. 가계와 활동 임헌회(任憲晦)[1811~1876]의 본관은 풍천이다. 자는 명로(明老), 호는 고산(鼓山)·전재(全齋)·희양재(希陽齋)이다. 아버지는 이조참판으로 증직(贈職)[죽은 뒤에 품계와 벼슬을 추증하던 일]된 임천모(任天模)이고, 어머니는 홍익화(洪益和)의 딸 남양홍씨이다. 1811년(순조 11) 천안시 직산면 산음리에서 출생하여 1836년(헌종 2) 감시(監試) 초시에 합격하였다. 송치규(宋穉圭)를 찾아가 학문에 전념하였으며, 1842년(헌종 8) 홍직필(洪直弼)의 제자가 되었다. 1858년(철종 9) 조두순(趙斗淳)의 천거로 효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이듬해 판부사 김좌근(金左根)의 천거로 활인서별제·전라도도사·군자감정 등에도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1861년 조두순의 천거로 경연관에 발탁되었으나 역시 소를 올려 사직하였다. 1864년(고종 1) 장령·집의·장악원정 등에 제수되었고, 이듬해 호조참의가 되었다. 이때 만동묘(萬東廟)를 폐하라는 왕명이 내려지자 부당함을 거듭 상소하여 다시 제향(祭享)[제사]하도록 한 것으로 유명하다. 1871년(고종 13) 연기 남면 양화리로 옮겨왔고, 1873년(고종 15)에는 공주 명강동[월송리]로 옮겨와 살았다. 1874년(고종 16) 이조참판에 임명하고 승지를 보내어 관직에 나오기를 청하였으나 상소하여 사직하였고, 그 뒤 사헌부대사헌·성균관좨주 등에 제수되었으나 역시 나아가지 않았다. 뛰어난 문장 실력으로 연기·공주 일대에서 여러 문중의 신도비문과 정려기 등을 지었다. 1877년 성전(星田)[충청남도 연기군 남면 방축리, 현 세종특별자치시 어진동·도담동 일대]에서 향년 6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사후 10여 년 뒤인 1885년(고종 22)에 후학들이 전재 임헌회를 제향하는 사우로 숭덕사(崇德祠)를 창건하였으며, 1902년 윤용선(尹容善)의 주청으로 정2품 내부대신에 추증되었다. 전재 임헌회의 인장을 비롯하여 아들 임만교(任萬敎)·임진재(任震宰)·임감재(任坎宰)·임간재(任艮宰) 등의 성명·자·호 등이 새겨진 인장, 간찰의 봉함인 등 총 41점이다. 재질은 벽옥(碧玉)과 목재(木材)이다. 이중 임헌회와 관련된 대표적인 인장의 크기는 「전재(全齋)」 3.8×4.1×3.3㎝, 「고산거사(鼓山居士)」 3.1×3.1×5.1㎝, 「임헌회장(任憲晦章)」 3.8×4.5×3.4㎝, 「명로(明老)」 3.0×2.9×2.8㎝이다. 이들 유물은 현재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충청남도 공주시 연수원길 103]에 소장되어 있다. 관련 유적과 유물 문집으로는 『전재집(全齋集)』, 『고산집(鼓山集)』, 『속고산집(續鼓山集)』이 있다. 또 임헌회가 문인들에게 명하여 조광조, 이황, 이이, 김장생, 송시열의 문집에서 명언들을 뽑아 책으로 엮게 한 『오현수언(五賢粹言)』이 1905년에 간행되었다. 임헌회와 관련된 유물로는 풍천임씨 선대 유묵과 기록물이 전하여진다. 임헌회는 부친의 유묵(遺墨)[생전에 남긴 글씨나 그림]을 모은 『선고수필(先考手筆)』, 모친 남양홍씨가 자신에게 쓴 한글편지와 한글유언을 엮은 『선비수필(先妣手筆)』 및 『선비유언(先妣遺言)』, 선대의 간찰(簡札)[편지]을 엮어 만든 『서하세필(西河洗筆)』과 선대의 친필을 엮은 임태춘(任泰春)의 『지평공수필(持平公手筆)』 및 『지평공정려시첩(持平公旌閭詩帖)』, 임징하(任徵夏)의 『서재유묵(西齋遺墨)』과 『우제홍공수필(愚齋洪公手筆)』 및 『우암선생필(尤庵先生筆)』, 선대의 교지를 묶은 『선세관교(先世官敎)』 등을 남겼다. 추숭 유적으로는 1978년 전국의 유림 1,000여 명이 임헌회의 유허지인 충청남도 연기군 남면 방축리[현 세종특별자치시 연기면 세종리] 성전지구 내덕동에 숭덕사를 복원하여 임헌회 외 전우(田愚)·이재구(李載九)·김준영(金駿榮)·이유흥(李裕興)·조흥순(趙弘淳)·임헌찬(任憲瓚) 등 문인 6명을 추가 배향하고, 매년 음력 3월 8일 향사하고 있다. 1990년에는 서원을 세우고 임헌회의 유허지명을 취하여 덕성서원(德星書院)이라 하였고, 2014년에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 제40호로 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전재 임헌회의 유품과 유물로 의미 및 가치가 있으며, 다양한 인장의 형태 및 용도·특징들을 보여 주는 유물이다. 참고문헌 『숭덕사오현집』 『연기군지』(연기군지편찬위원회, 1988) 『연기인물지』(조치원문화원, 1997) 『2010 기증유물 특별전』(충남역사문화연구원, 2010) 『우리 살던 고향은 - 세종시 2005 그리고 2015』(국립민속박물관, 2016)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임헌회 인장 [任憲晦印章]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
덕성서원[ 德星書院 ] 요약 : 세종특별자치시 연기면 세종리에 있는 서원이다. 원래 명칭은 숭덕사(崇德祠)이며, 1885년(고종 22) 임헌회를 배향한 사우(祠宇)로 창건되었다. 임헌회는 풍천(豊川) 사람으로 1811년(순조 11) 천안 직산면 산음리에서 태어나 1858년(철종 9) 경영관이 되었고, 이조참판과 대사헌 등을 지낸 뒤 방축리에 내려와 후진 양성에 힘썼다. 1876년 사망한 뒤 자헌대부 내무대신을 추증받았다. 매산(梅山) 홍직필(洪直弼)의 문인이며, 기호(畿湖) 유학의 거두로서 유림의 추앙을 받았다. 1978년 전국의 유림 1000여 명이 임헌회의 유허지인 연기군 남면 방축리에 사우를 복원하여 임헌회 외에 전우(田愚)·이재구(李載九)·김준영(金駿榮)·이유흥(李裕興)·조흥순(趙弘淳)·임헌찬(任憲瓚) 등 문인 6명을 추가 배향하고, 매년 음력 3월 8일에 향사(享祀)하고 있다. 전우와 이재구는 임헌회의 문인이고, 김준영·조흥순·임헌찬은 전우의 문인이며, 이유흥은 김준영의 문인이다. 1990년 유림이 이곳에 서원을 세워 덕성서원이라 칭하였으며, 7현을 배향한 사우는 숭덕사라 하였다. 2001년 5월 31일 연기군의 향토유적 제40호로 지정되었으며, 세종특별자치시 연기면 세종리에 있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덕성서원 [德星書院] (두산백과)
[출처] 아산이 배출한 조선 후기 대유학자 임헌회(任憲晦) |작성자 농부의 장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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