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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컵의 파편에서 부서진 새의 영혼을 읽다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추성은시인의<벽>
2024.01.04/김승하시인
언젠가 읽은 리처드 도킨스의 [눈먼 시계공]에 의하면 모든 생명체는 체온이나 산성도, 수분함량, 전하 등을 측정해보면 주변 환경과 현저한 차이를 보이며, 그 차이를 극복하고 현상유지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함을 알 수 있다고 한다. 반면에 무생물은 지연과의 평행을 이루는 일에 순응한다. 어떤 의미에서 자연환경, 즉 주변 환경에 순응하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새는 하늘을 날아다니는 동물이다. 지상의 동물
에게 지상의 벽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날개는 부러움의 대상이다. 그러나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수많은 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인간의 문명화로 비롯된 투명한 유리창은 새들의 죽음을 불러오는 또 다른 벽이 되었다.
세상은 눈에 보이는 벽과 눈에 보이지 않는 벽으로 둘러져 있다. 다만 영혼만이 입자이면서 파동인 빛처럼 모든 벽을 통과할 수 있을지 모른다.
바닥과 벽, 천정은 모두 닫힌 공간속의 벽이다.
그러나 바닥은 삶의 수렁에서 끝없이 자신이 가라앉을 때 더 이상 아래로 꺼지지 않는 확신 같은
믿음이 될 수도 있으며, 바닥은 새로운 출발점이
될 수 있는 버팀목이 되기도 하지만, 그 딱딱한
바닥에 떨어져 부서진 유리컵처럼 존재감을 잃은
유리컵의 파편과 투명한 유리벽에 부딪혀 죽은
새의 깃털을 동일하게 유추하기는 쉽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유리컵과 새는 동일하게 벽에 부딪히면서 존재감을 상실하였다는 사실에서 동일성을 유추할 수 있다. 단순히 생물체의 생존의 유무로 존재의 의미를 찾는 기존의 전통적 시론을 넘어서는 의미의 확장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론적 불확실성이 시인으로 하여금 주변세계와의 대화, 즉 의미(meaning) 찾기로서 자신의 내면의 거울에 비친 대상(객체)-자신과는 다른 존재와의 관계에 대해 노래한다.
시인은 자신만의 창조적 은유를 통해 컵과 새의
존재를 인식하고 무의미한 사물에 실존적 의미를
부여한다. 날지 않는 새는 새가 아니며, "애완 새는/컵 아니면 격자 창문과 백지청진기 천장/차
라리 그런 것들에 가깝다고 한다." 즉 시인의 내
면이라는 거울에 투영된 진실된 의미의 존재를
발견하는 과정이 시 쓰기이지만, 기존의 시론에
서 말하는 사회적 경험과정에서 산출된 감각의
내재적 존재론과는 또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타자와의 관계에 의한 존재론은 세계내의 다른
존재들과 질적으로 다른 타자와의 관계에 의한
형성된다. 그래서 인간은 세계의 일부분으로서
서로 다른 존재와의 인식과 의식을 통합하며 존
재하게 된다. 우리는 어딘가의 공간에 있으면서
동시에 어느 시간 속에 있음(existential)의 상태
로써 서로 다른 모습으로 함께 존재 (Being- pre
sent at)하는 것이 아닐까?
존재감을 잃은 유리컵과 상승하는 날개를 가졌
지만 유리벽에 부딪혀 죽음을 맞게 되는 새와의
관계는 기존의 생명 중심의 세계관으로 보았을
때 전혀 동질감을 찾을 수 없다. 그러나 벽에 부
딪힌 새가 생명에서 무생물로 변화하는 것은 무
생물인 컵이 딱딱한 콘크리트 바닥에 부딪혀 부
서지면서 유리컵의 존재를 잃어버리게 될 때 존
재의 상실을 통해 동일시 할 수 있다. 생물과 무
생물의 관계가 아닌 새와 컵의 존재의 의미로 인
식하는 것이다.
새가 유리창에 부딪혀 생명을 잃은 것과 유리컵
이 바닥으로 떨어져 컵의 의미를 잃게 되었을 때
그것들은 생명과 무생물의 범주를 벗어나 본연의
의미를 잃어 버렸을 때 존재의 의미를 잃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시는 미래파의 경향을
보이고 있다. 기존의 서정영역을 벗어나 의미의
확장을 꾀하고 있다. 그럼에도 추성은 시인의 <
벽은> 전혀 낯설지 않은 감동이 있다.
벽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도록 공간을 차단한
것이 벽이지만 그 벽은 인간을 보호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벽에 안주하여 벗어나기를 포기하였을
때 인간은 새장에 갇힌 새가 되어 그림자 같은 인
생을 살 수밖에 없다. 또한 인간의 한계에 부딪혀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벽을 뛰어넘게 될 때 벽은
소멸되어 새로운 문이 될 수도 있다.
벽은 어디에 있는가?
현실과 환상 사이에는 거울이 있고,
너와 나 사이에는 인습과 관습의 벽이 있고,
지금 내가 앉아 있는 카페의 안과 밖의 사이에는 투명한 유리의 벽이 있다.
바닥과 벽, 천정은 모두 닫힌 공간속의 벽이다.
딱딱한 바닥에 떨어져 부서진 유리조각처럼 인간
은 삶의 과정에서 끊임없이 죽음이라는 위협을
받으며 살아간다. 죽음은 어떤 생명체도 피할 수
없는 모든 존재의 본질적인 비극이어서, 인간은
시공간의 벽에 갇혀 근원적 결핍감이나 존재론적
비애감을 늘 느끼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실존적
세계(Existential world)에서 인간의 소통은 익
숙한 것이 아닌 낯선 것이거나, 부분적이지만 극
단적인 감각을 갈구하는 존재로써 혼란스럽고 불
안안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새는 하늘을 날기 위해서는 공기의 저항을 극복
하기 위해 끊임없이 날개를 움직여야 하고, 인간
은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 음식을 섭취해야 한다.
역설적으로 모든 생명체는 생존을 위해 주변 환
경에 저항하는 것이 삶일지도 모른다. 새가 날아
다니는 것을 거부하고 던져주는 새 모이에 길들
여 진 새는 “발목을 묶인 새들”이다. 그리고 사
람들은 새가 날지 않으면 새가 아닌 컵과 같은 무
생물과 다름없는 존재이지만 모르는 척 애완용으
로 새를 살 것이다.
모든 사물의 존재는 그 사용 용도와 목적에 일치
할 때 존재의의 의미를 갖는 것처럼, 컵이 컵의
기능을 잃으면 컵이 아니듯 날아다니는 것을 포
기한 새는 새가 아니다. 결국 사람들에 길들여진
새는 새의 본연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새의 진화
는 컵의 진화와 비슷할 것이다"라고 시인은 말
한다. 새가 날개를 가졌지만 날개를 거부할 때 새는 더 이상 새가 아니다. 인간이 육신의 생명을
잃으면 "몽골이나 오스만 위구르족 어디에서는
시체를 절벽에 던져둔다고 한다." 인간은 생명
을 잃으면 새들에게 던져준 “옥수수 알”이며, 발
이 묶인 새들은 "컵 아니면 격자 창문과 백지 청
진기 천창/차라리 그런 것들과 가깝다고" 한다.
결국 새의 진화는 컵의 진화처럼 사람이 잡기 쉬
운 모습으로 진화할 것이며 손잡이 달린 컵처럼
팔수 있게 진화할 것이다. 새의 본 모습을 잃은
진화한 새들은 생명을 가졌지만 “새는 토마토도
아니고 돌도 아니기 때문에 조용히/죽어갈 것
이다” 새는 새의 본연의 모습을 잃게 될 때 존재
감 없이 조용히 죽어갈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시에서 반복되는 “새”와 “유리컵”이나 “옥수수
알”,과 “사람의 뼈” 등과 같은 단어의 이미지가
생명에서 무생물로 환경에 순응하는 과정에서 주
체와 대상으로 수렴하지 않고 흩어진 모습을 보
인다. 특히 “컵 아니면 격자 창문과 백지 청진기 천장이라는 제목일 것이고”와 유사한 구문의 이
미지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쉽게 전
달되지 않고 이해되지 않지만 반복적으로 배치하
여 시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러한 시 쓰기는 미래파 시인들에게서 보이는
전형적인 형식이다. 비슷한 구문의 중첩은 컵과
새라는 주체가 세상과 시인 자신을 연결하는 유
일한 매개 방식이지만, 컵과 새라는 주체가 세계
와 불일치를 드러내고 있어 시의 이해를 매우 곤
혹스럽게 하고 있다. 그럼에도 추성은의 <벽>은
컵과 새라는 주체와 분리된 채 불일치를 드러내
는 결함을 지녔으면서도 명확한 메시지를 던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유리파편의 조각에서 버드 스트라이크로 죽은
새들의 영혼을 읽어내는 이미지의 유도전이는 낯
설지만 어떻게 유추되어 확산 되는 것일까? 버드
스트라이크와 유리창, 바닥에 떨어진 유리컵의
파편은 동질성의 이미지를 갖고 있지만 새의 깃털과 유리컵은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시인이 천연덕스럽게 새의 깃털로 착각하였다는 말은 분명
전통적 시 쓰기에서 유사이미지와는 전혀 동떨어
진 이미지이다.
죽은 새의 모습을 본 현실의 경험으로부터 비춰
진 거울속의 무의식과 환상의 세계인 부서진 유
리컵의 파편을 통해 두려움과 낯설음을 구체화
시키는 그로테스크의 미학적 기교처럼, 우리 인
간이 관습과 학습에 의해 의식에서 지워진 다양
한 욕망은 결국 무의식 어딘가에 두려움과 공포
로 남아있으며, 그 두려움과 낯설음의 공포가 새
로운 시적 에너지의 유도전이로 이어지는 새로운
감동의 파동으로 이어진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벽>이라는 제목과 버드스트라이크로 죽은 새
를 떠올리며 새라는 생명체가 죽음을 통해 무생
물로 돌아가고 유리컵이 바닥에 떨어져 부서졌을
때 유리컵으로서의 본연의 존재가 의미를 잃게
되었을 때 새와 유리컵의 파편은 기존의 존재감
을 잃은 대상으로 동질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적 유추는 기존 전통적인 시론과는 다
른 새로운 의미의 확장으로 해석되어질 수 있다.
시인의 이러한 이미지 전개는 분명 기존의 시론
에서 벗어나려는 젊은 시인의 새로운 모습을 보
이고 있다.
시인은 모든 살아있는 존재의 슬픈 모습들을 담
담히 서술적으로 기술하고 있을 뿐이다. "새를
파는 이들은 새의 발목을 묶어둔다"거나, "새는
토마토가 아니고 돌도 아니기 때문에 조용히/
죽어갈 것이다", "연인은 나 죽으면 새 모이로
던져주라고 한다." 고 말하거나, "곧 창문에 새
가 부딪칠 것이다"라고 존재에 대한 회의와 부
정, 거부 등으로 지각된 슬픔에 관한 사유의 실존적 허무를 노래한다.
모든 존재는 무의 가능성을 내포한다. 인간은
항상 무언가 결여되어 있기에 외부의 사물을 인
식하여 자신의 무無를 채워가는 것이며, 존재에
서 무로의 손실과 무에서 존재로의 생성원리가
가능한 까닭에 자기 자신의 가치와 정체성을 가
지고 있다. 이러한 정체성은 타자와의 관계를 형
성하고 우리가 살아 있음을 확인시켜 주지만 삶
이 지속되는 한 불안과 슬픔은 계속될 수밖에 없
다.
그러나 세상은 고독과 슬픔으로 가득할지라도
그것을 극복할 의지가 있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
이 아닐까? 새장 안에서 사람들이 주는 옥수수 알
을 받아먹으며 사는 새는 새가 아니다. 우리는 슬
픔이 무엇이고 무상이 무엇인지 깨달을 때 삶의
의지가 살아나는 것처럼 우리 스스로 자신의 삶
을 긍정하지 못한다면 수동적인 삶으로 변하여
존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는 보이든 보이지 않던 수많은 벽이 존
재한다. 우리 인간 또한 길들여지거나 보이지 않
는 벽에 부딪혀 부서지거나. 인간 본연의 삶을 살
기위해 끊임없이 부딪힐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시인이 "백지 청진기 천장"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방이 벽처럼 막힌 삶의 공간속에서 청진기의
울림처럼 하얀 천장을 통해 진동으로 전해지는
노랫소리가 들리는 공간을 의미하는지 모르겠다.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진동으로서 귀로 듣
는 것처럼 인간의 존재적 비애감을 먼 이국의 음
악처럼 느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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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_ 벽 / 추성은
벽 / 추성은
죽은 새
그 옆에 떨어진 것이 깃털인 줄 알고 잡아본다
알고 보면 컵이지
깨진 컵
이런 일은 종종 있다
새를 파는 이들은 새의 발목을 묶어둔다
날지 않으면 새라고 할 수 없지만 사람들은 모르는 척 새를 산다고, 연인은 말한다
나는 그냥 대답하는 대신 옥수수를 알알로 떼어내서 길에 던져두었다
뼈를 던지는 것처럼
새가 옥수수를 쪼아 먹는다
몽골이나 오스만 위구르족 어디에서는 시체를 절벽에 던져둔다고 한다
바람으로 영원으로 깃털로
돌아가라고
애완 새는
컵 아니면 격자 창문과 백지 청진기 천장
차라리 그런 것들에 가깝다
카페에서는 모르는 나라의 음악이 나오고 있다 언뜻 한국어와 비슷한 것 같지만 아마 표기는 튀르크어와 가까운 음악이고
아마 컵 아니면 격자 창문과 백지 청진기 천장이라는 제목일 것이고
새장으로 돌아가라고……
아마 그런 의미겠지
연인은 나 죽으면 새 모이로 던져주라고 한다
나는 알이 다 벗겨진 옥수수를 손으로 쥔다
쥐다 보면 알게 될 것이다 컵은 옥수수가 아니라는 것
노래도 아니고
격자 창문과 백지 청진기도 아니고
진화한 새라는 것
위구르족의 시체라는 사실도
새의 진화는 컵의 형태와 비슷할 것이다
그리고 끝에는 사람이 잡기 쉬운 모습이 되겠지
손잡이도 달리고 언제든 팔 수 있고 쥘 수도 있게
새는 토마토도 아니고 돌도 아니기 때문에 조용히 죽어갈 것이다*
카페에서 노래가 흘러나온다
그건 어디서 들어본 노래 같고 나는 창가에 기대서 바깥을 본다
곧 창문에 새가 부딪칠 것이다
깨질 것이다
첫댓글 새 사람 컵.이런 것들은 생명 그 자체가 아니고 생명을 담는 컵과 같은 것이다
죽음은 컵이 깨지는 것과 같다
컵이 새로 전이되는 과정은 뭔가
자유 언어의 자유
본질에 다가서려는 사물의 본질 그 생명력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