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수건에 대한 최초의 기억은 코를 많이 흘리던 어린 시절 엄마가 닦아 주던 손수건이다. 엄마는 면으로 만든 하얀 손수건에다 코를 풀라고도 하셨다. 물자가 지금만큼 풍부하지 않던 시절이라 품질 좋은 티슈를 사용해 본 기억이 많지 않고, 두루마리 뽀삐화장지도 아껴서 썼다. 무엇보다도 요즘같이 구멍가게에서 휴대용 티슈를 흔하게 판매하지 않았으므로, 손수건은 꼬마인 내게 외출 시 필수품이었다. 초등학교 입학식 때 엄마가 가슴에 달아주던 물건도 바로 하얀 면 손수건이었다. 이제 손수건은 더 이상 어린이의 필수품이 아니다. 초등학생 가방에는 손수건 대신 휴대용 티슈나 물티슈가 들어 있다. 콧물이든 눈물이든 내 몸의 체액은 일회용 휴지에 배출되어 버려진다. 이러한 사정은 꼬마들만의 것이 아니다. 요즘은 경제적 풍요 때문만이 아니라 위생 관념의 발전 때문에라도 체액이 묻은 것을 다시 사용하는 일은 피한다.
하지만 손수건 사용이 예전에 비해 현격히 줄어들었다 하더라도 이 사물의 존재 가치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이 사물은 순전히 코를 풀고 눈물을 닦기 위한 실용품이라기보다는, '공적인' 자리에서 품위를 갖추려는 이들의 기능적 필요를 위한 '패션' 아이템이다. 예컨대 남녀가 처음 만난 자리에서 콧물을 휴대용 티슈로 닦는 것과 손수건으로 닦는 것은, 상대에 대해 전혀 다른 이미지를 형성한다. 위생 관념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이 이미지는 신뢰를 형성한다는 점에서 역설적이다.
손수건으로 자기 몸의 무언가를 닦는 사람을 보면서, 상대는 그 사람이 전적으로 그 자신의 체액을 받아내는 사물을 늘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본다. 이 사물에 몸의 흔적이 밴다는 점에서, 상대는 무의식적으로 그가 제 몸의 시간성을 존중하는 사람일 거라고 생각하게 된다.
슬픔의 눈물을 흘리고 있던 오래전 어떤 날, 한 친구가 손수건을 건네던 순간이 있었다. 그는 자기 몸의 흔적이 밴 손수건에 내 눈물을 받을 수 있도록 허락했다. 내 눈물은 휴지로 버려지지 않고, 이 사물을 통해 그에게 다시 건네졌다. 세탁하더라도 어딘가에 남아 있을 타인의 흔적에는 다시 그의 몸의 흔적이 밸 것이다.
'공감(empathy)'이라는 말은 한 '감정 속으로' 다른 한 감정이 '배어들어' 간다는 뜻에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