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께서는 박애주의자셨습니다
-이태억
박애주의자셨다, 아버지께서는. 당신 가족은 굶기더라도 다른 사람들은 찾아가 먹이셨다.
“저기 4번째 방, 앞에 갖다 놓아라.” 이른 아침, 아버지는 다닥다닥 붙은 판자촌의 여러 동 중에서 6칸이 이어져 있는 범어동 어느 집 앞에 자전거를 세우셨다. 짐칸에 있는 두 대 정도의 포대 하나를 내 손에 들여보내셨다. 쌀이었다. 아침을 굶고 공사장에 오는 인부에게 보내는 양식이었다. 다시 자전거는 지금의 사대부고 근방 대봉동 빈민촌에 섰다. 마지막 포대를 들고 외가의 먼 친척 할머니가 사시는 골목으로 들어섰다. 며칠 전에 온 비가 아직도 질척이는 길 끝에 여러 개 방이 있는 판자로 겨우 바람을 막는 쓰러져가는 집이 있다. 몇 번을 와서 어느 집 몇 번째 방인지 안다. 할머니의 아들, 외가 쪽 아재는 아버지의 공사장에서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날, 산사태 흙더미에 깔려 돌아가셨다. 툇돌 위에 올려두고 할머니에게 안부 여쭙고 나왔다. 맨발로 달려 나와 안아주시곤 하셨다.
아버지는 토목기사이다. 일제 강점기에 도쿄기술학교를 졸업하고 도청에서 기사로 일하시다 해방을 맞이했다. 원칙대로 공사해야 한다는 걸 일본인 기사들에게서 배웠다. 당시에 지어진 건물이며 다리며 길 등은 아직도 건재한 게 많다. 해방 후 어지러운 시기와 6·25 사변이 끝나고 복구 사업이 한창일 때, 기사들은 시멘트량 줄이고, 철근 빼먹으며 공사했고, 배를 불렸고, 그렇게 해서 사업을 늘린 사람들이 많았다.
아버지는 배운 대로, 원칙대로 정량으로 공사를 하셨다. 그러니 공사를 할 때마다 가세는 점점 더 쪼그라들었다. 시내 한복판 남산동에서 변두리 대명4동으로, 다시 계명대학교 담을 따라 형성된 대명 7동 허름한 동네의 낮은 대문 작은 집으로 이사했다. 대지 18평 건평 15평, 방은 3칸이었다. 그러나 두 개는 세 주고, 우리 가족 7명은 그 좁은 집의 큰(?)방 하나에 지내야 했다. 거기다 외외가(外外家) 고모의 아들 3형제가 대구로 유학을 왔다. 대학 졸업 때까지 함께 살았으니 족히 8에서 9명은 한방에서 지내야 했다.
아버지 사업은 점점 힘들어졌고, 엄마는 계란 행상을 하시게 되었다. 우리 형제들은 방학이 되면 외가로 간다. 마냥 좋았었다. 그냥 좋았고, 외할머니의 사랑을 한껏 받으니 방학 오기만 기다렸다. 외사촌 동생들이 6명이었으니 온 집안이 아이들 판이다. 그땐 몰랐다. 외숙모님이 힘 들어 하신 걸. 아프신 것은 다 ‘우리 때문일 거다.’ 죄책감이 든다. 유학 보낸 고모가 보내오는 쌀이 우리 살림의 큰 축이었다. 방학 때마다 우리를 외가로 보낸 것이 입을 줄이려는 엄마의 고육지책이었음을 이제야 알겠다.
대명 7동으로 이사하던 날, 이삿짐 보따리들과 장정 둘이 들기도 힘든 돌로 된 절구통을 리어카에 실었다. 거기다 모래와 자갈에 시멘트를 섞어 물을 부어 콘크리트를 만드는 폭이 넓고 긴 ‘공구리 철판’을 얹었다. 굵은 줄로 두 번 세 번 꽁꽁 묶어 주셨다. “미끄러지면 안 된다. 수고해다오” 시며 일요일인 그날도 아버지는 일 나가셨다. 친구 형국이, 기수, 그리고 동생들이 밀고 당기며 계명대학교 옆길 높은 언덕을 올랐다. 이윽고 언덕빼기 아래로 내려가는 길로 들어섰다. 가파른 내리막길이었고, 왼쪽은 길 깎은 단면이라 울퉁불퉁한 돌들이 튀어나와 있었다. 내가 앞에서 리어카를 잡고, 뒤는 친구와 동생이 끌어당긴다. 조심조심 뒷발에 힘을 주고 살금살금 내려갔다. 갑자기 ‘붕-’ 떴다. 뒤에서 당기던 힘이 무거운 철판과 돌절구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아이들이 리어카에 끌려갔다. 얼마나 날았을까? ‘쿵!’ 리어카의 핸들 옆모서리가 돌벽에 처박혔다.
지금까지 살고 있는 것은 그날의 운수대통 때문이다. 수레 잡은 손이나 손목이 돌에 찍혔다면, 얹혀있던 철판이 목을 쳤다면, 허리를 찍었다면 열에 아홉은…. 단단한 끈으로 여러 번 챙챙 감은 아버지의 숙련된 묶음으로 무사했다. 하늘에 감사했다. 결심했다. 절대로 가난하게 살지 않겠다고.
“30평이 13대 1이에요. 43평은 8.5대 1이고, 몇 평해요?” 온 나라가 아파트 청약의 불이 붙어 있었다. 엉겁결에 따라나선 글라라가 현장에서 전화로 중개한다. 지금 놓치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가 휩쓸고 다닐 때였다. 뒷감당은 생각지 않고 “무조건 경쟁률이 약한 43평에 넣어요.”라고 했다. 넓은 곳에 살고 싶다는 어릴 적부터의 로망이 더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지금은 남들은 쉽게 ‘억억’ 하더라만, 당시에는 ‘100,000,000’은 동그라미 개수만큼이나 천문학적 액수였다.
저질러져 버렸다. 주위의 부러움은 호사였다. 교사의 박봉으로는 감당 불가능했다. 시댁도 친정도 기댈 곳은 어디도 없다. 죽을 똥 살 똥 ‘투잡(two-job)’을 뛰었다. 낮도 밤도 없었다. 밤이 더 바빴다. 돈은 얻었으나 건강과 아이들과 글라라에게 가야 할 사랑은 희생해야 했다.
어릴 적부터 붙어 다닌 가난의 딱지가 못내 밉다. 갈수록 어려워지는데 속 좋으신 아버지의 퍼주는 나눔과 베풂이 정말 싫었다. 우리 형제는 먼저 내 것부터 챙겨야 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넷째는 바로 위 형의 교복을 물려 입고 입학식에 갔다. 먹는 것도 부족하였으니 내 손에 일단 들어 온 것은 절대 놓지 않았다.
어른이 되었다. 머리가 먼저 계산부터 한다. 습관적이라기보다 순식간에 그냥 계산 되어졌다. 본능이다. 이게 얼마이고, 내가 사야 할까? 밥 먹는 것, 물건 사는 것, 영화 구경하는 것까지도 바로 계산하고 있다. 자연 내 피붙이 외에 남에게 베푼다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번 아웃(burn-out) 되어 병원에 입원해야 했다. 주치의께서 “어릴 적, 특별히 생각나는 게 없으세요?” 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번 아웃과 연결될 게 없었다. “열심히 놀고 재미있게 뛰어다닌 기억밖에 없습니다.” 대답했었다.
왜 교수님이 어릴 때 일을 물었는지, 잠재된 내 감성과 감정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제야 알겠다. 무의식 층에 존재하는 Self, 그리고 Complex 들이 지금의 나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이 글을 쓰면서 깨달았다. 아버지의 아낌없는 베풂이 어떻게 나에게 ‘나만 아는 Egoist’로 발전되었는지 알게 되었다. 당신의 나눔이 자식에게는 상처로 남게 되리라고 아버지께서는 상상 못 하셨으리라. ‘불효자는 다시 웁니다.’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성현들이 얘기하셨다. 타인에게 자선을 베풀든지, 기부하든지, 봉사하든지 마지막에는 그것까지 ‘잊으라(Forget)’는 것이다.
이제 나의 심연에 가라앉아있던 Ego의 스크루지 할아범을 불러낼 수 있다. 그리고 털 수 있겠다. 순간적인 본능의 계산에서 벗어날 수 있겠다.
늦었지만 아버지 뒤를 따라갈 수 있겠다.
2024.12.18
첫댓글 어린시정 대부분 지금 어른들이 겪은 일입니다. 보리고개 디딜방아 갱죽 시래기죽 콩죽 지금은 개도 먹지 않을 그런 것들이 지금은 그립습니다. 감자떡 찐쌀 ...이제 지난날의 추억을 풀어내어 아름다운 글감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어린시절에 많은 고생과 역경을 이겨내고 모두 훌륭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으니 대단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