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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나라에 대한 소망
요한복음 14:1-21 전규자 목사
양력 9월 10일 고 김종호님이 하늘나라로 간 날입니다.
우리는 김종호를 추모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다음 글은 제가 종호 둘째 고입 특별전형을 위해 그의 아버지에 대해 쓴 글입니다. 종호가 하늘나라로 간 그해에 쓴 글입니다.
지난 9월 10일 만 46세의 나이에 위암으로 고인이 된 김종호(김준엽 아버지)는 전북 정읍에서 가난한 소작인의 아들로 태어나서 어렸을 때 신동이라는 소문을 들으며 자랐고 정읍 중학교를 거쳐 전주 신흥고등학교에 다녔습니다. 신흥고등학교에서는 학교도서관에서 잠을 자며 도서관에 있는 책을 거의 다 읽고 영어 원서를 읽었으며 대학입학예비고사에서는 전북 차석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서울 공대 조선공학과에 입학하였지만 일류대학 학생 신분을 암울했던 유신독재의 현실 앞에서 과감하게 포기했습니다. 그는 어떤 사회적 큰 사건과 관계된 것은 아니었지만 끊임없이 작은 모임들 속에서 사회변혁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1979년에서 80년에 걸쳐 창현교회 대학부 회장을 맡아 충북 괴산군 연풍면 분지리에 있는 산골마을에 농촌활동을 기획하고 집행하여 교회대학부로서 하기 어려운 농촌활동을 해냈습니다. 마늘 한접을 팔아도 커피 한잔 값 밖에 되지 않는다고 깊은 한숨을 쉬는 농민들의 한숨소리를 마음에 담았고, 그 농민의 자녀들인 공장 노동자들을 위해 중소기업들이 밀접해 있는 수유리에서 야학을 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그는 교회에서 대학부 후배들을 교육해서 사회각부분에서 실천적 지식인으로 삶을 결단하도록 했습니다. 그의 장례식장에서 ‘한국전쟁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 사무처장인 ‘이춘열’씨가 종호형으로부터 이제야 할 일을 제대로 한다는 소리를 들을 만한데 형이 가고 없다고 울먹였던 걸 보면 그가 후배들을 길러내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수 있었습니다.
군대에 육군병장 제대를 한 후 그는 자신이 지식인으로서의 틀을 깨고 인천에 가서 자진해서 노동자가 되었습니다. 12시간 막교대를 하고 노동조건이 열악하기로 소문난 동국제강에 입사해서 노동훈련을 하고 이어서 역시 노동조건이 열악하기로 소문난 경동산업에 입사했습니다.
경동산업은 그가 민주화운동의 일환인 노동운동을 위해 헌신했던 사업장입니다. 종업원이 1,200명정도이고 주방기기생산업체로 3대기업중 하나였던 경동산업은 노동자들이 프레스로 철판을 자르면서 함께 잘려져 나가는 손가락이 일년에 한바께스가 된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로 산재가 많았고, 12시간 막교대를 하고 월 2일 휴일밖에 없고 특근을 월 200-250시간씩 시키면서도 월 12-14만원(당시 대우 자동차가 하루 8시간 노동에 월 14-15만원 정도 받았음) 밖에 못받는 열악한 작업환경 속에서 조장이나 반장을 제외하면 평균 근무기간이 6개월밖에 되지 않는 사업장이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1년 이상 일하면서 다른 활동가들과 연합하여 노조를 설립하고 조직부장을 맡아 신고했지만 신고필증이 나오기 전에 해고를 당했고 3-4개월간 ‘인천교 소식’이란 소식지를 만들어 복직투쟁을 하면서 노동자 뿐 아니라 시민들에게 노동자가 역사의 주역임을 알리기도 했습니다.
후에 생존과 부모부양등 책임을 다 하기 위해 그가 정보통신분야에서 일을 하게 되지만 계속 민주사회를 위한 관심과 사회적연대의 끈을 놓지 않고 살다가 갔습니다.
다음은 종호의 친구 김학진 선생이 장례식에서 조사로 낭독한 한 대목입니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대학 초년병 시절... 꿈도 많고 하고싶은 것도 많을 나이였지만... 70년대 말 유신독재 암울했던 현실 앞에 우리는 일류대학생이나 출세 같은 우리의 미래를 치열한 고민끝에 자진해서 포기했었지.
민주주의를 위해서... 그리고 우리보다 어려운 사람들과 함께 하기 위해서.”
“종호야, 너는 참 재주가 많은 놈이었다. 세월이 하도 험해서 공대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했지만 너는 언제나 혼자 독학해서 어려운 시스템이나 현장 기술자들이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를 뚝딱 해치우는 재주가 있었다.
그래서 주위 친구들이나 회사에서 기술적으로 어려운 문제들이 생길 때면 언제나 너에게 의존하곤 했지. 니 손에 들어가면 항상 해결책이 나오니까. 그러나 우린 잘 몰랐다. 네가 그런 해결책을 찾아내기까지 얼마나 많은 밤을 꼬박 새웠는지는.... 너는 내가 아는 한 진정한 이 시대의 공돌이였다. 기회를 잘못 만나 불운하기는했지만".
"종호야, 시커먼 촌놈아. 너는 참 마음이 약한 놈이었다. 딱한 사정을 들으면 기꺼이 네 주머니를 털고 친구들이 하소연하면 네 일을 팽개치고 달려와서 도와주곤 했지. 남에게 싫은 소리를 하지 못해서 속으로 끙끙 앓으면서도 허허허 털털 웃는 모습이 때론 안타까웠다. 너는 원래 민주투사나 노동운동가가 되기에는 너무나 모진 구석이 없었다. 속고 속이는 정글같은 비즈니스의 세계에서 출세를 하기에는 너는 인간을 너무나 쉽게 믿고 정에 약한 놈이었다.”
이동욱 선배는 그가 남긴 글에서 종호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바깥에 있었지만 안에 있는 창현의 사람보다 ' 아름다운 사람" "뜨거운 사람' " 진실된 이성의 지식인"이라고 너를 말하고 싶다!....
너는 '강도 맞은 사람을 말없이 도왔던 사마리아인"......이웃에게 "희망'을 주었던 사람이라고 기억한다.”
종호는 자신에 대해 이런 글을 썼었습니다.
“그 동안의 나의 비정상적인 일상 생활의 반복과 생활 자세로 마음이 조화를 이루지 못했고 이는 몸에 암과 같은 이상/부조화로 표현되는 게 아닌가 하는 초보적인 반성도 해봅니다.”
이원희선배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정말 그 한창 시절, 창현교회 대학부 활동하며 추구하던 바 그것 , 그렇게 살던 사람들 ,
아마도 그 경우 여러 사람들이 떠오르지만 역시 그 대표가 김종호입니다.”
“기억하고 지키기, 청종하며 살기” “2년 전 김종호 큰 수술하고 그 소식 듣고 창현의 72 동기들 함께 문병갔을 때 여전히 김종호는 그 형편 처지에서도 작은 일에 보람 의미를 찾으며 하루가 신나며 멋있는 인생살기에 도전하는 모습을 볼수 있었습니다. 더 거슬러 가면, 한창시절 야학하던 시절, 또 포장마차하던 시절, 그리고,
내가 78-81년 해군 장교로 진해애서 근무할 때, 당시 창원 공장에 다니던 김종호 찾아와 함게 지내며 이런 저런 고민 이야기 나누던 일들, 다시 03년-04년 종호 수술 하기 전, 아 창현 등산모임이 잘 되던 시절, 관악산 등산하면서도, 멀리 지방에 사는 후배 전화 받으며, 사업이 안되고 몸 컨디션 안 좋아 걱정 하던 시절 기억납니다. 이제 종호 간지 얼마 있으면 만 일년인데, 종호와 관련하여, 기억하고 지키기의 문제를 생각해봅니다.
마가복음 16장에 나오듯이, 부활한 예수, 먼저 갈릴리로 가 있으니 거기 가면 뵈오리라는 성령의 말씀에 따라, 지금도 거기 있는 그분을 뵈오러 가는 인생을 다짐·결단하며 살기, -중략- 지금이라도, 갈릴리를 향하여 살고자 다짐하며, 나아가기 그 전형을 이 땅에 살고 간 김종호가 우리에게 보여 주고 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오늘 설교를 통해 되도록 감정을 빼고 객관적인 한 사람 김종호를 말하고 우리가 보는 객관적인 것과 하나님 나라는 전혀 다름 것임을 말하려합니다. 제가 1978년 창현교회에 갔을 때 제 눈에 김종호는 가장 이론과 실천이 겸비된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대부분 이론이 앞서면 실천이 부족하고, 실천을 잘하는 사람은 이론이 부족한 편인데 제 눈에 종호는 거의 완벽한 조화를 이룬 사람이었지요. 남들이 그렇게나 부러워하고 온가족이 기대하는 눈망울을 뒤로하고 학교를 떠나 야학을 하고, 노동운동을 하고 그러던 그가 군대에 다녀와서 좀 빠르다 싶은 나이에 결혼을 했지요. 종호는 너무 힘들어 노동운동을 했습니다. 그가 함께 했던 경동산업은 열악한 근로조건 개선과 함께 지역 노동운동의 산실 역할을 했습니다. 그 때 당시 노동운동은 낮에 12시간을 현장에서 일하고 저녁에 활동가들이 모여 밤새도록 토론하며 현장활동에 지침을 마련하고 실행계획을 세워야했는데 그 힘든 시기에 종호는 자기를 컨트롤할 수 있는 힘을 많이 잃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더 이상 노동운동을 할 수 없는 여러 가지 형편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회사에 취직을 했고, 창업을 했지만 창업은 돈을 벌어주는 게 아니라 빚만 안겨주었습니다.
그는 순수했고 정의감에 불탔습니다. 그의 이런 측면만 보면 그는 정말 멋진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현실문제에 부딪힐 때 융통성을 발휘하지 못하고, 경직되었고, 때론 과하다 싶은 욕심과 허세를 부리기도 했습니다.
그는 육체적인 힘도 대단하여 하룻밤 정도는 잠을 안자도 전혀 다음 날 지장이 없고, 일주일에 3-4일은 2-3시간 자는 것으로 버티기도 했던 기인적인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그가 영적으로 무척 방황했습니다. 저는 그의 장례식장에서 이런 설교를 했습니다.
“5) 그는 세례교인입니다.
세례는 예수를 내 삶의 주인으로 고백하고 하나님의 자녀됨을 선포하는 의식입니다. 한번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그것은 취소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 아들이 사춘기에 가출을 했습니다. 핸드폰도 안받고 연락이 안됩니다. 저와 상관 없는 다른 집에 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제 아들이 제 아들이란 사실은 취소될 수 없습니다. 고 김종호 형제는 영적 사춘기에서 방황했습니다. 영적 방황의 시점에서 하나님께서는 그 고통을 마감시키시고 하나님 나라로 불러가셨습니다. 하나님의 소중한 자녀로 불러가셨습니다.
우리의 사랑하는 형제 고 김종호씨는 ‘죄의 문제’에 많이 고민했습니다. 그는 놀랍게도 비가 오고 천둥치고 번개가 치면 자기의 죄로 인해 하나님께서 벌하실까 두렵다는 이야기를 진지하게 했습니다.
최근에 제가 입원하고 있던 ‘나누리 병원’에 와서 통증을 호소하면서 ‘내가 지은 죄값으로 온 통증’이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죄의 문제는 하나님께 자백함으로 용서함을 받으며, 사람과 화해함으로 평안을 얻으므로 물로 더러움을 씻는 것처럼 씻겨지는 것이지 통증 같은 것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해주었습니다.
유족 여러분, 조문하기 위해 오신 친척, 친지, 친구 여러분! 누구에게나 공통적인 문제인 죄의 문제는,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일수록 깊게 고민하는 죄의 문제는 하나님께 고백하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씻어버리고 사람들과 화해함으로 평안을 얻으면 깨끗하게 씻어버릴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고 김종호씨가 믿은 예수 그리스도는 무엇보다도 죽음을 이기신 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도 죽음을 이기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우리의 사랑하는 형제 고 김종호씨는 죽은 것이 아니라 죽음을 이긴 하나님의 자녀로 하늘나라로 그 자리를 옮겼을 뿐입니다. 죽음이 승리할 수 없는 자리로 옮겨 갔습니다. 언젠가 우리도 죽음을 이기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늘나라로 그 자리로 옮기는 순간이 오면 하늘나라에서 우리의 사랑하는 형제 고 김종호님를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저는 부끄러운 목사입니다. 장례식장에서 그렇게 설교해놓고도 그가 죽기 전 염불을 하고, 장례절차를 불교 스님이 하시고, 제가 주관해서 드렸던 장례예배도 노승권 선배님의 강력한 주장에 의해서 갑자기 만들어진 예식이었음을 잘 아는 저로서는 김은국씨의 순교자를 생각하며 목사인 저는 이중적으로 생각했습니다. 제 속마음으로는 하늘나라에 못 갔을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사람들에게는 종호는 하늘나라에 갔다고 설교한 것입니다. 제가 그렇게 생각한 것은 제 생각에 그는 교만했습니다. 자기의 죄를 고백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그에게 “네가 교회에 나가지 못하는 것은 네의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고 용서함을 간구해야 하는데 너 그것 하기 싫어 교회 못가지?” 하며 들이대기도 했고, “너는 더 이상 내가 알던 종호가 아니다”라고 대놓고 욕을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내 죄를 대신해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믿었는지에 대해 회의적이었습니다. 그는 하늘나라에 못 갔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저는 종호를 ‘바보 같은 놈’이라고 욕했습니다. 그런데 작년에 저는 꿈에 그가 하늘나라에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가 하늘나라에 있다는 확신을 하게 되었고 우리 생각과 하나님 생각은 얼마나 다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꿈 얘기를 하니깐 사이비처럼 들릴지 몰라도 저는 여러 차례 종호에게 중요한 일이 있을 때 꿈을 꾸었고 종호도 미망인도 제 꿈에 대해 놀라워했습니다.
더 이상 우리는 그의 얼굴을 볼 수 없게 된 때 엉겹결에 장례예배를 드렸지만, 저는 제 생각에 묶여 1주기 예배 때 설교 할 수 없다고 말했고, 창현의 73학번 이후에게 영원한 선배이신 이원희 장로님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2주기 때 이원희 장로님의 생생한 설교말씀 “기억하고 지키고 말씀에 청종하며 살자”는 말씀, “기억도 하나의 투쟁이다. 기억 투쟁하기를 하자”는 말씀이 귀에 쟁쟁한데도 그를 어떻게 기억해야 할지를 몰라 하다가 겨우 몇 사람이 평일에 점심 먹는 것으로 그에 대한 기억을 때웠습니다. 지난해 3주기에는 김효순 선배 댁에서 초청이 우연히 날짜가 맞아 형식도 내용도 없는 예배와 함께 기억하기를 또 때웠습니다. 올해도 어떻게 그를 기억해야 할지에 대한 대안 없이 정해남 선배의 저녁초청에 응했다가 여러 선배님들이 계신 자리에서 이 문제를 의논했고, 이원희 장로님의 말씀이 백번 옳았다고 무릎을 치며 다시 창현에 모여 예배드리는 것으로 다시 의견을 모았습니다. 이원희 장로님의 말씀대로 “거기 갈릴리, 소외되고 헐벗고 굶주리고 못살고 자기 모멸감에 있는 여러 사람들이 있는 곳, 갈릴리, 그곳을 삶의 현장 안에서 늘 기억하며, 나 부족하지만 무언가 쓰임받는 삶 하기로 결단 하며, 그럴 때마다, 약속에 의지하며/신뢰하며 불확실한 세계임에도 불구하고 그 세계에 던져들기, 하나님 발길에 채여, 하고싶다와 해야한다 사이에서 휘몰아치는 존재를 체험하며 인생을 살기 ...”여야 합니다.
뿐만아니라 우리는 영원한 나라 하나님 나라에 대한 희망으로 살아야 합니다. 보이는 세계가 다가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약속을 믿으며, 여러분 모두 믿음으로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영원한 나라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삶은 믿음 없이 사는 삶보다 훨씬 더 값있고, 오묘하며, 진실하고 복되기 때문입니다.
종호가 남긴 것들을 생각하며 우리 삶을 다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첫댓글 좋은 글 감사합니다. 그리고 김종호님의 영혼의 평온한 안식과 새로운 업으로 다시오실 것을 기원합니다(도경)
올해 추모예배에 참석 못하고 뒷풀이에만 끼었는데 전 목사 말씀, 이원희형 말씀 다 마음을 파고 듭니다. 품어 안고 긍정하며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