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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시대 다른 상황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4) 설교가 약해도 추수할 일꾼이 될 수 있다!
마태복음 9:37-38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이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10:2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주소서 하라."
예나 지금이나 추수할 것은 많습니다. 인구가 늘어나고 교통이 발전해서 배나 더 그렇게 느껴집니다. 반면에 추수할 일꾼은 너무나 적습니다.
우리 교회의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는 목회자 수급입니다. 이단이라는 누명 때문에 목회자 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것이 제가 다른 교회 같으면 당장 해고할 사람도 기회를 주곤 하는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그렇다고 목회자로 지원하는 분들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대부분 설교 테스트에서 떨어집니다. 열의 아홉 명 정도가 설교에서 떨어집니다. 하지만 추수할 일꾼을 세우는 것은 목회자를 세우는 것과 조금 다릅니다. 추수할 일꾼은 상대적으로 재원이 풍부합니다. 왜냐하면 설교를 잘하지 못해도 추수할 일꾼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목회에는 설교가 거의 절대적입니다. 설교의 비중이 굉장히 높습니다. 다른 장점들이 많아도 설교가 받쳐주지 않으면 목회자로 채용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전도자는 반드시 설교를 잘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도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능력입니다. 스미스 위글스워스, 오랄 로버츠, 까를로스 아나콘디아, 티 엘 오스본 이분들은 위대한 전도자들이지만 설교를 잘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설교를 잘하지 못해도 전도에 열심이 있고 능력이 있는 분들을 추수할 일꾼으로 등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선교지와 우리나라의 상황은 다릅니다. 선교지에선 해외 지교회에서 드리는 동시예배를 드릴 수 없습니다. 현재 지교회들은 교민들 중심입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현지인 중심의 교회를 세울 것입니다. 자연히 언어가 달라서 동시예배를 드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매주 설교 원고를 보내주어 그것을 토대로 설교하게 할 수가 있습니다. 이뿐 아니라 100권이 넘는 저의 책들이 모두 설교집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가지고 설교하거나 가르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전략인데, 놀랍게도 저는 이것이 성경적이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디모데전서 4:13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바울서신을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
디모데전서 6:20 "디모데야 망령되고 헛된 말과 거짓된 지식의 반론을 피함으로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라!"
디모데후서 1:13-14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디모데후서 2:2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디모데후서 3:14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 배운 것을 알며"
디도서 1:9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안테코, 충실하다, 고수하다, 굳게 잡다)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슬러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
이처럼 디모데와 디도는 물론, 바울이 세운 교회의 장로들은 그가 깨달은 진리를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바울의 가르침을 그대로 전하거나(읽는 것이 그것) 소화해서 가르쳤습니다. 따라서 전도팀이 제 설교와 책을 가지고 설교하고 가르치게 하는 것은 성경적인 것이며 얼마든지 가능한 것입니다.
저는 지난해 한 성도님이 교회 카페에 올린 꿈에 이것이 예고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래전에 꿈을 꾸었는데요 ...
그냥 마음에만 생각하고 '우와 좋다'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사랑하는교회 카페에 올리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자꾸만 들어서 몇 달을 고민하다 올립니다.^^
꿈에 서울 사랑하는교회가 이사하고 첫 예배를 드린다고 해서 찾아갔거든요. 말로나 글로는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교회였어요. 교회 입구부터 예배당에 들어가기까지 빽빽한 기도굴이 가득하고, 방방마다 말씀 한 구절씩 적혀 있고, 그 안에는 온몸의 물을 다 쏟으면서 기도를 하고 계시는 거예요. 그런 기도굴이 바닥부터 천장까지 빽빽하더라고요. 기도하시는 분들 모두가 기도가 아니면 살 수가 없을 정도로 그렇게 힘쓰고 애쓰며 기도하고 계셨어요. 그래서 예배당까지 들어가는 길이 너무나 벅차고 꿈속인데도 압도감이 말로 표현을 못 할 정도였어요.
그렇게 길고 긴 기도굴을 지나서 예배당에 들어갔는데, 그 안은 타원형으로 아래부터 위에까지 층층으로 되어 있고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어요. 거기서 변승우 목사님이 빽빽하게 앉아 있는 끝도 없는 사람들을 가르치고 계셨어요. 그런데 그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하나씩 하나씩 목사님께 축도 같은 걸 받더니 교회를 나가더라고요. 그렇게 어떤 분들은 자기 집으로, 어떤 분들은 각자의 일터로, 어떤 분들은 아프리카로, 어떤 분들은 중국으로, 어떤 분들은 북한으로, 그렇게 오지와 세계로 나가고 있는 거예요. 그 사람들이 하나의 사랑하는교회가 되어서 그곳에서 목사님의 가르침대로 또 가르치고 있더라고요.
그리고 세계지도에 사랑하는교회를 깃발로 표시를 해놓았는데 정말로 빼곡히 채워져 있었어요. 그래서 사랑하는교회가 온 세계에서 크게 부흥하겠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꿈에서 깬 후 '난 이런 교회에 다니고 있구나!' 하면서 너무 좋았어요. 몇 달이 지나도 자꾸 카페에 올리고 싶은 마음이 안 없어지기에 올립니다."
이 꿈은 참으로 신기한 꿈입니다. 전도팀을 파송하는 내용도 그렇고, 아프리카 중국 북한 그리고 오지로 나가는 것도 그렇고, 저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제게 안수를 받고 선교지로 가서 그대로 가르치고 있더라는 내용도 그렇습니다.
사실 저는 처음에 이 꿈을 읽고 의아하게 생각했습니다. 우리 교회는 김옥경 목사님과 사사모가 강합니다. 또 선교하러 나가는 자들에게 김옥경 목사님과 같은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왜 내게 안수를 받고 나와 같은 가르침을 가지고 간다고 하지?'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해가 됩니다. 그것은 목회자 수급도 어려운 지금 설교까지 잘하는 추수할 일꾼들을 내보내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설사 설교를 잘하지 못하더라도 저의 설교 원고와 책들을 활용하면 얼마든지 잘 가르치고 설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해가 되시지요!
앞으로 저는 설교를 잘하지 못해도 능력전도를 할 수 있는 분들을 선교사로 파송할 생각입니다. 그렇게 선교의 물꼬를 틀 것입니다. 그 후에 그분들과 집회를 위해 파송되는 팀들이 현지인 중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을 제자훈련하게 할 것입니다. 그들로 하여금 계속 세워지는 제2 제3의 교회들을 담당하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 중에서 똑똑한 사람들을 훈련해서 다른 나라에 선교사로 파송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효과적일 뿐 아니라 경제적입니다. 예를 들어, 필리핀의 경우 선교사 1명에게 매월 200-300만 원이 드는데, 현지인은 30만 원밖에 들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런 분들에게 50만 원씩 주고 목회자로 써보십시오. 같은 비용으로 훨씬 많은 선교사들을 일을킬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방식으로 많은 추수할 일꾼들을 일으킬 것입니다.
(5) 종이호랑이가 아니라 진짜 호랑이들이 오고 있다!
일단 국내의 오지와 해외의 가난한 나라들로 팀들을 파송하고 지켜보면 주님이 특별히 선택하시고 일으키시는 사람들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들을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12사도나 70인 제자, 그리고 바울과 바나바와 같은 놀라운 보고서를 가지고 돌아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0:17 "칠십 인이 기뻐하며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사도행전 15:4 "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매"
사도행전 15:12 "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께서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에 관하여 말하는 것을 듣더니"
사도행전 21:19 "바울이 문안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말하니"
우리는 이런 보고를 해오는 분들을 전임사역자로 세울 것입니다. 그들이 국내의 전도 전도사로, 해외에서는 능력전도를 하는 선교사로 전임사역을 할 수 있게 할 것입니다.
정말 흥분이 되는 것은, 이런 분들 속에서 진짜 사도들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이들 속에서 70인 제자나 빌립 같은 전도자들이 일어날 뿐 아니라 12사도나 바울 같은 강력한 사도들이 일어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을 통해 실제로 도시와 나라들이 돌아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외적으로 보기에는 그들이 설교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큰 목회를 하는 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 것같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난하고 불편한 곳에 가서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헌신하는 것이 영적으로는 지름길일 수 있습니다. 최고로 빠른 승진의 길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높이 올라갈 수 있는 길일 수 있습니다. 즉 진짜 사도가 될 수 있는 길일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두증인전도단을 생각하면 가슴이 뜁니다.
전쟁에서 이기려면, 실제로 전쟁터에서 용감하게 싸워줄 장군들이 필요합니다. 저와 같은 목회자는 일종의 종이호랑이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잘 외치지만 교회 밖에서는 그렇지 못합니다. 앞으로는 교회 밖 즉 세상에 나가서 담대히 외칠 진짜 호랑이들이 필요합니다. 저는 전도팀을 통해 이런 진짜 호랑이들이(사도들)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들은 야성을 갖춘 사람들로서 담대한 능력전도로 많은 영혼들을 구원해낼 것입니다.
마가복음 3:14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사도행전 20: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디도서 1:3 "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으니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
하나님은 실전에 강한 즉 야성이 살아 있는 진짜 호랑이 즉 진짜 사도들이 일어나길 원하십니다. 그들을 통해 문자 그대로 도시와 나라들을 주께로 돌이키길 원하십니다. 저는 실제로 그것을 볼 수 있다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습니다. 여러분도 기대하는 마음으로 두증인전도단을 통해 이런 진짜 사도들이 일어날 수 있도록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결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6:24-25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한 '자기 십자가'는 무엇일까요? 많은 이들이 자신이 겪고 있는 어려움들을 떠올리며 '나의 십자가는 ~~이다'라는 식으로 편리하게 이해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한 '자기 십자가'는 실제로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 '나를 따라오려면 실제로 십자가에 달려 죽을 각오를 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가신 길은 정치적인 메시아가 되어 왕좌에 오르는 길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히러 가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예수님과 같이 죽을 것이냐 아니면 배신하여 돌아설 것이냐 하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이 구절이 실제로 이런 의미라는 것은 IVP성경난제주석에 매우 잘 나타나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라?
일반적으로 적용한다면, 이것은 아주 어려운 말씀은 아니다. 하지만 본래 의도한 대로라면, 대단히 어려운 말씀이다. 더 어려운 말씀이 없을 정도다.
보통은 이 표현이 신체장애, 달갑지 않은 경험, 억지로 떠맡게 된 편치 않은 동료나 친척 등을 뜻한다고 적용한다. 사람들은 '이것은 내가 져야 할 십자가다'라고 말한다. 이 말씀의 문자적 의미는 우리의 경험과 동떨어져 있기 때문에, 이렇게 희석된 의미로 사용될 수 있다. 서구에서 사형은 이제 드물거나 과거의 일이 되었고, 이 말씀을 일상적 경험으로 풀어쓰는 일마저 어렵다.
사형이 공개적으로 집행되던 시절이 있었다. 사형을 선고받은 범죄자는 걸어서 또는 수레에 실려 거리를 지나 처형 장소까지 끌려갔고, 이 암울한 행렬을 지켜보던 군중은 길 끝에 무엇이 놓여 있는지 알았다. 공개 처형장으로 가는 길에 있던 사람은 이 땅의 모든 희망과 야망을 버리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예수님의 말씀은 이렇게 번역될 수 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기를 바란다면, 나의 본보기를 따라, 공개 처형장으로 끌려 나갈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세 권의 공관복음서에서 이 말씀은 빌립보 가이사랴에서 있었던 베드로의 고백, 임박한 수난에 대한 예수님의 첫 번째 경고, 베드로의 타이름과 그에 대한 예수님의 책망 기사 뒤에 나온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과 마찬가지다. '너희는 지금도 나를 메시아라고 고백하느냐? 너희는 지금도 나를 따라오고 싶으냐? 그렇다면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분명히 깨닫고, 나를 따라옴으로써 너희도 그곳에 있게 될 것을 이해해야 한다.' 인자는 고난을 겪어야만 한다. 제자들은 그분과 함께 고난받을 준비가 되었는가? 인자는 잔인한 죽음에 직면해 있다. 제자들도 그것에 직면할 준비가 되었는가? 잔인한 죽음이 십자가 위의 죽음으로 밝혀진다면 어떻겠는가? 제자들도 그것에 준비되었는가?
어떤 사람이 공개 십자가 처형 장소로 끌려가는 장면은 그 당시 로마 세계에서 낯설지 않았다. 그런 사람은 대개 죽음을 향해 가면서 자기 십자가 들보(patibulum)를 지고 가야 했다. 예수님의 말씀이 청중이 마음에 연상시켰을 그림이 바로 이것이다. 만약 그들이 이런 제자도의 결말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 아직 시간이 있을 때 생각을 고쳐야 한다. 하지만 먼저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저울에 몇 가지 대안을 달아보아야 한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할]' 것이기 때문이다(막8:35).
이 말씀을 들은 많은 사람, 어쩌면 대다수가 이 진리를 증명했다. 그들이 모두 실제로 십자가에 달린 것은 아니었다. 알다시피 이것은 베드로의 운명이었다. 예수님을 위해 맨 처음 죽음의 고통에 바쳐진 사람,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는 참수당했다(행12:2). 그런데 이것이 '십자가를 진다'는 말의 의미였다. 곧 예수님을 위해 핍박과 죽음에 직면하는 것이다."
잠시 예수님의 사역을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은 사십 일을 금식하고 성령의 권능을 받으셨습니다. 그 후 복음을 전하시고, 가르치시고, 병을 고치시는 삼중사역을 하셨습니다. 또한 귀신을 쫓아내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풍랑을 잠잠케 하시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시는 등 놀라운 기적들을 행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로 인해 왕이 되신 것이 아니라 결국에는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셨습니다.
베드로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는 오순절 날 성령세례를 받고 하루에 삼천 명, 오천 명씩 회개시키는 놀라운 역사를 일으켰습니다. 초대 교회는 그의 지도하에 급성장하여 말 그대로 초대형 교회가 되었습니다. 게다가 그의 그림자만 덮여도 사람들이 나을 정도로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의 최후도 이와 비슷합니다.
" * 야고보 - 예루살렘
제자들 중 처음으로 순교당한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 그는 요한의 형제이며 예수님의 먼 친척이기도 합니다. 야고보의 순교는 스데반의 순교 후 약 10년이 채 되지 않아 일어났습니다. 헤롯 아그립바가 유대 총독으로 임명되면서 박해가 시작됐을 때, 참수당해 순교했습니다.
* 빌립 - 터키
빌립은 갈릴리 벳세다에서 태어났으며 예수님의 제자들 중 최초로 제자로 불린 사람입니다. 프리기아의 헤리오폴리스에서 채찍에 맞았으며 A. D. 54년에 십자가에서 순교했습니다.
* 다대오 - 페르시아
다대오는 페르시아에서 전쟁용 무기에 난도질당하여 순교했습니다.
* 안드레 - 그리스
안드레는 베드로의 형제이며 많은 아시아 국가들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자기 아들을 개종시켰다는 이유로 에데사에서 체포되어 그리스의 관리가 안드레에게 사형을 선포하자, 안드레는 항의를 하지 않고 나흘 동안 십자가의 두 끝에 수직으로 못 박혀 순교했습니다. 안드레는 십자가에 못 박혀 있는 순간에도 예수를 믿으라고 많은 사람들에게 권하면서 순교했습니다.
* 작은 야고보 - 예루살렘
예수님의 육신적인 동생입니다. 초대 교회 예루살렘 교회의 감독이기도 했으며 94세에 유대인들에게 구타당하고, 돌로 맞아 뇌손상으로 순교했습니다.
* 바돌로매 - 아르메니아
바돌로매는 각국에 복음을 전하기에 힘썼으며, 잔인하게 폭행당하였고, 포악한 우상숭배자들에 의해 십자가에서 순교했습니다.
* 도마 - 인도
도마는 디두모라 불리면서 파티오와 인도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곳에서 이교도 제사장들이 격노하여 창에 찔려서 순교했습니다.
* 마태 - 에디오피아
마태는 나사렛 사람으로 직업은 세리였습니다. 파티오와 에디오피아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에디오피아에서 박해를 받고 A. D. 60년 나다바에서 미늘창으로 순교했습니다.
* 시몬 - 영국
시몬의 다른 이름은 젤로이며 아프리카 마우리타나와와 영국에까지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그는 A. D. 74년 영국에서 십자가에 달려 순교했습니다.
* 요한 - 밧모섬
요한은 사랑받는 제자로 큰 야고보의 형제입니다. 에베소로부터 로마로 강제송환명령을 받았으며 그곳에서 끊는 기름 솥에 던져지는 형을 받았으나 가까스로 피해 달아났습니다. 그 후 도미티안은 요한을 밧모 섬으로 추방하였고 그곳에서 계시록을 기록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제자들 중 유일하게 참혹한 사형을 피했습니다."
그리고, 위대한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바울에게 특별계시를 주셔서 신약성경의 3분의 2를 쓰게 하셨고, 희한한 능력을 행하게 하셨습니다. 그가 가는 곳곳마다 교회들이 세워졌고 그의 선교사역은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국 로마에서 목이 잘려 순교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과 12제자, 그리고 바울의 생애는 작금의 유명한 전도자나 초대형 교회의 목사들과 달랐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인정받고, 존경받고, 대우받는 것이 아니라 미움과 박해를 받았고 마지막에는 순교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목사가 되겠다', '주를 위해 살겠다', '영혼들을 위해 살겠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과연 예수님께서 가신 '이 길'을 생각했을까요? 그들이 과연 자기의 종말도 이와 같다고 해도 '목사가 되겠다', '주를 위해 살겠다', '영혼들을 위해 살겠다'는 결단을 내릴까요? 그리고 그토록 능력을 받기 위해 기도할까요?
불행하게도 오늘날 신학생과 목회자들은 대부분 예수님과 12제자와 바울이 걸어간 길과 다른 것을 꿈꿉니다. 교회를 개척하고, 교회를 성장시키고, 교회를 건축하여 더 크게 부흥시키고 대형 교회로 만드는 꿈을 꿉니다. 그래서 어디를 가든지 인정받고, 대접받고, 존경받고, 인기 있는 설교자 혹은 부흥사가 되는 것을 꿈꿉니다. 그렇게 사역을 하다가 죽은 후 주님께 큰 상을 받는 꿈을 꿉니다. 솔직히 이것이 오늘날 대다수 목회자들의 꿈 아닙니까? 이렇게 교회 성장과 성공만을 꿈꾸다 보니 교회가 크면 클수록 교만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교회가 클수록 돈이나 명예에 취약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수많은 목회자들이 팍팍 썩어가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는 목회자가 선교에 집중할 때 이런 위험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최근에 성령님이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고인 물이 썩는다!!!"
많은 목회자들이 썩는 이유는 선교에 관심을 갖지 않고 오로지 교회성장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목회자들이 정말 선교에 관심을 가지면 그렇게 썩지 않게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열방의 죽어져가는 영혼들을 하나라도 더 살리겠다는 목적을 가진 사람이 돈이나 명예를 꿈꾸겠습니까? 아니지요!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영혼을 살리고 천국에 보낼까를 고민하게 될 것입니다. 단순히 목회가 아니라 선교에 관심을 가져야 목회자가 변질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선교에 관심을 갖는 것이 목회자 자신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뿐 아니라, 목회자가 선교에 관심을 가지면 교만의 위험 역시 피할 수 있습니다. 선교에 관심을 가지면, 자연히 오지의 열악한 상황 속에서 힘들게 사역하며 고군분투하는 선교사들의 소식과 보고를 접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분들을 자신보다 더 크게 여기게 될 것입니다. 영적 최전선에서 피땀을 흘리며 목숨 걸고 희생적으로 선교하는 것이 얼마나 귀한지 아는 목사가 단순히 큰 교회를 한다는 이유로 머리를 들 수 있겠습니까? 교만해져서 목을 뻣뻣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선교에 관심을 가져야 교회가 크게 성장해도 교만해지지 않습니다.
아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저는 제 자녀들이 목회자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의 자녀들이 나름 열심히 공부하지만, 공부를 잘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자녀의 길을 열어주고 싶은 부모의 마음 때문에 자녀들이 목회하기를 원했습니다. 제가 길을 닦아놓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면 미래가 보장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불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나의 자녀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영혼들을 사랑하고, 사명감과 구령애 때문에 목회자가 되어야지, 안정된 직업이나 보수를 바라보고 목회자가 된다면 결국 목회를 통해서 '얼마나 더 받을 수 있나?', '얼마나 더 많은 것을 가질 수 있나?'에 관심을 갖는 삯꾼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최근 선교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야~ 이것 참 멋진 일이다.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이다. 고생은 되겠지만 정말 해볼 만한 일이다'라는 생각이 들면서 '만약 내 자녀들이 은혜를 받고 선교사가 되겠다고 한다면 나는 반대하지 않으리라'라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한국에서 편히 목회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줄 수도 있지만, 저는 만약 자녀들이 선교사가 되겠다고 한다면 반대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진짜 성공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예수님과 12제자와 바울은 하나님께 능력받고 놀라운 사역을 했지만 결국 죽임을 당했습니다. 누구도 원할 것 같지 않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은 아무도 원할 것 같지 않은 삶을 살면서도 기쁨과 열정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왜냐하면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 잠시 있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24-25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고린도후서 4:17-18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이것이 곧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약속한 것이기도 합니다. 제자들은 이 땅의 높은 자리를 원했고, 서로 다투었습니다(막10:35-37, 41).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 땅의 보좌를 약속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늘의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2:29-30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훗날 제자들은 예수님의 바람대로 땅의 것이 아니라 위의 것을 추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특히 사도 바울은 회심 후 누구보다 그런 삶을 살았고 자신 있게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골로새서 3:1-2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사람이 꼭 부유하고 인정받고 인기 있어야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드라마를 보면 재벌 2세나 3세가 자주 등장합니다. 그만큼 사람들이 재벌들을 선망하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저도 재벌이 부러울 때가 있습니다. 특히 자녀의 미래를 생각하거나 가난한 친척들을 도와주고 싶을 때 그러합니다. 교회 돈은 아무리 많아도 내 돈이 아니기 때문에, 자녀의 미래를 위해 쓰거나 가난한 친척들을 마음껏 도와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내게 돈이 많으면 한몫식 크게 떼어주고 도와줄 텐데' 하는 생각이 들 때마다 재벌들이 부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짜 재벌은 돈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과 사도들과 바울 같은 분들입니다. 즉 진짜 전도자들과 진짜 선교사들입니다. 왜냐하면 고난 중에도 하늘의 기쁨을 누리며 천국에 큰 상을 쌓으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뜬금없는 말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쾌락은 사랑과 무관합니다. 쾌락은 정욕만으로도 누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쁨은 정욕으로 누릴 수 없습니다. 욕심과 이기심을 버리지 않으면 기쁨을 누릴 수 없습니다. 기쁨은 사랑과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배고플 때 밥 먹는 것은 일종의 쾌락이지 기쁨이 아닙니다. 기쁨은 자녀에게 먹을 것을 줄 때 찾아오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줄 때 찾아옵니다. 무엇보다, 기쁨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만큼 우리 속에 찾아옵니다. 그러므로 정말 자신을 내려놓고 비이기적으로 주님 중심, 영혼 중심이 되어서 희생적으로 선교하는 사람들보다 더 큰 기쁨을 누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일례로,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매 맞고 옥에 갇혔어도 기쁨을 이기지 못해서 찬양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대궐 같은 집에 사나 우울증에 걸린 사람이 얼마나 많고, 기쁨이 메마른 가련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저는 진짜 선교사들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분들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또, 저는 진짜 선교사들이 세상에서 가장 성공한 분들 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릭 조이너의 책에 다음과 같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한 시점에서 주님께서 그분 주위에 열을 지어 있는 보좌들을 향해 바라보셨다. 많은 자리에는 주인들이 앉아 있었으나 빈 자리도 많았다. 그분이 이윽고 말씀하셨다. '이 보좌들은 각 세대에서 나를 충성되이 섬겼던 승리자들을 위한 것이다. 아버지와 나는 창세 이전에 그것들을 준비해두었다. 너는 이들 중 한 자리에 앉기에 합당한가?'
나는 한 친구가 전에 얘기했던 것을 기억에 떠올렸다. '전지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질문을 하실 때에는 그분이 정보를 찾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보좌들을 바라보았다. 나는 지금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신앙의 위대한 영웅들 중 몇 사람들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내가 아는 사람으로 앉아 있는 사람들 중 대부분은 세상에서는 잘 알려지지도 않은 사람들이었다. 내가 아는 이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삶을 눈에 띄지 않는 속에 보낸 선교사들이었다. 그들은 땅 위에서 기억받는 것에 전혀 무관심하였으나 오직 그분에 의해 기억되기를 원했다. 나는 부유했던 몇 사람들과 자기에게 맡겨진 것들에 충성하였던 주재자들을 보고 상당히 놀랐다. ...
내가 여기 앉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느냐는 주님의 질문에 대해 내가 '예'라고 답할 수 있는 도리는 전혀 없었다. 나는 거기 있는 누구와도 함께할 자격이 없었다. 나는 내게 천국이나 땅에서 가장 큰 상을 위하여 달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었으나 나는 실패하고 말았다는 것을 알았다. 절망적이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하나의 희망이 있었다. 비록 나의 생애의 대부분이 실패였지만, 나는 땅에서의 내 삶을 마치기 전에 이곳에 온 것을 알고 있었다. 내가 자격이 없다고 고백하였을 때 그분은 질문하셨다.
'그러나 너는 이 자리를 원하고 있느냐?'
'제가 전심으로 원하고 있습니다.' 내가 대답했다."
진실로 진짜 선교사들이 가장 행복할 분 아니라 가장 큰 자들입니다. 우리가 부러워해야 할 대상은 재벌이 아니라 바로 그들입니다. 그래서 저는 자녀들이 선교사가 되겠다고 하면 막을 마음이 없습니다. 또 저의 영적 자녀들인 여러분들 속에서 많은 선교사들이 일아나게 되길 바랍니다. 왜냐하면 저의 자녀와 여러분이 가장 행복한 자가 되고 가장 성공한 자가 되길 바라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