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세자의 비사가 있는 이곳 배봉산에서 찢어진 노트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사도세자의 이야기를 따라 정조의 화성 능행 길을 따라 가보려 한다.
능행길의 가장 빠른 길은 남태령을 넘는 과천길이었지만
과천에는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여한 사람의 묘가 있어 시흥쪽 길로 바꾸었다고 한다.
즉 지금의 1번 국도는 정조가 능행길을 만들면서 생긴 길이라고 한다.
그래서 먼저 창덕궁을 둘러 남대문을 지나 한강대교로 향한다.
한강, 막막하다 어떻게 한강을 건넜을까,
비사에 의하면 조선은 침략을 너무 많이 받아 다리 건설에 인색했다고 한다
잦은 외침에 강을 방어벽으로 사용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정조가 강을 건널때 사용한 것이 배다리 라고 한다
한강에서 어업을 하던 뱃사람들의 배를 동원하여 배로 다리를 만든 것이다.
어찌보면 어민들을 수탈하여 만든 배 다리 라는 생각에 그 또한 짠한 생각이 든다.
배로 다리를 만들어 한강을 건너면 첫번째 행궁지를 만난다, 그곳이 노량행궁지다.
창덕궁에서 멀지 않는 곳에 행궁지가 있었다는 것은
한강을 건너는 일이 매우 큰 일 이었다는 것을 증명 하는것 같다.
창덕궁에서 짧은 거리이지만 강을 건너는 특수성 때문에 행궁지가 필요 했든것 같다
그리고 수많은 배를 끌어다 다리를 만들었다 하니 그것을 관리할 관청이 필요했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든다.
노량행궁지로 추정되는 곳은 한강대교를 건너자 마자 왼편에 노량진 주민센타가 보이는데
그옆에 용양봉저정 이라는 곳이 있다, 이곳이 노량행궁지가 있던 곳이라 한다.
노량행궁지에서 한강 건너에 있는 창덕궁 건물을 큰 건물에 가려 보이지는 않지만
저 멀리 북악산을 바라 보니 이곳이 행궁지로서 적지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수많은 배를 수탈 당한 어민들 생각에 심란한 마음이 든다,
그 불편한 마음을 안고 그곳을 떠나 다음 행궁지로 향하니 그곳은 시흥5동에 있는 은행나무 사거리이다.
이곳에는 보호수로 지정된 큰 은행나무와 비석이 있는데 이곳이 두번째 행궁지로 추정되는 시흥행궁지라 한다.
이곳은 흔히 볼수 있는 우리가 사는 동네 골목길이어서 행궁지라는 사실이 실감이 나지 않는다.
정조는 이곳 시흥 행궁지에서 1박을 했다고 하는데 규모가 대단 했을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흔적이라고는 은행나무 밖에 없으니 백성들 입장에서는 그런 실망이 나를 더 편안하게 한다.
시흥에서 1번 국도 따라 안양쪽으로 가다 보면 관안역 부근에 만안교를 만난다.
다리 건설에 인색한 조선에서 안양천을 건너기 위해 유일하게 만든 다리가 만안교 이다.
관악 전철역을 만들면서 이곳으로 조금 옮겨 놓은게 흠이라면 흠일까,
외관으로 보아도 정말 튼튼한 다리 같다.
이 다리는 정조가 이름을 지었다고 하는데 만년동안 안전하라고 만안교라고 했다고 한다.
안양천을 건너기 위해 만든 만안교 다리를 건너 도착한 곳이 안영역 앞 번화가이다.
안안역 건너편에 안양의 명동이라 부르는 가장 번화한 이곳이 안양 행궁지로 추정된 곳이라 한다.
현재 이곳에는 건물이 빽빽히 들어서 있어 이정표만이 행궁지 였음을 알리고 있어 실감이 나지 않는다
안양행궁지를 빠져 나와 1번 국도를 따라 도착한 곳이 의왕에 있는 사근행궁지이다.
현재 고천동 주민센타가 자리한 곳으로 이곳도 표지석이 대신할뿐 행궁지에 대한 흔적은 찾을수 없다.
이곳 의왕 행궁지는 수원으로 들어가는 북수원 관문이 멀지 않다.
사근 행궁지에서 수원으로 들어 가려면 큰고개를 넘어야 하는데 이곳이 수원으로 들어 가는 길목으로 지지대 고개이다.
지금은 8차선으로 약간의 언덕길 이지만 정조가 다닐때는 상당한 비탈길이었다고 한다.
정조는 이 고갯길 정상에 올라서면 사도세자 능을 볼수 있는데
비탈지고 좁다른 고갯길이어서 자꾸 지체했다 해서 지지대 고개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곳에는 조그만 더가면 소나무 노송길이 나오는데 이곳 주위에는 수원갈비를 파는 음식점이 많다.
이곳이 유명한 이유는 왕능에서 제사를 지낼때 왕능 주위에 수라간을 설치하여 소를 잡았다고 한다.
이곳의 수원갈비도 이런 연유로 유래 된것으로 추정 되며,
현재 홍릉 이나 태릉 쪽에 갈비집이 유명한 이유도 여기에 연유가 있다고 한다.
수원화성 행궁지는 누구나 한번쯤은 둘러 보았을것 보아 들러보지 않고 화성에 있는 융능으로 간다.
아, 융능이다.
창덕궁에서 100리가 넘는 먼길을 다닌 정조는 그의 능행길이 단순히 아버지에 대한 효심뿐만 아니라
능행길을 보기 위해 길가에 모인 백성들의 이야기를 들어 주고 민원을 해결해 주는 행차 였다고 한다.
그러나 정조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너무 많은지라 아버지의 새로운 역사를 만들려 화려하개 능을 만들었고
아버지의 무덤 끝에 자신의 묘를 만든 것으로 보아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유별난 것으로 보인다.
후세 학자들은 이렇게 이야기 한다.
정조는 길 위의 왕이라고 길에서 백성을 만나고 인생을 깨우치며 길 위에서 백성과 조선을 생각 했다고
즉 요즘으로 말하면 현장 정치를 했다고 기술 한다.
물론 당파 싸움이 치열했던 정치적 상황으로 보아 능행 길을 통해 자신의 지위를 강화 하고
자신을 호위하는 군사들로 하여금 강력한 군사훈련을 실시하여 왕권을 강화 했으며
아버지에 대한 효심과 백성을 위한 애민정신 까지 보이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능행 길에 따른 민초들의 고초는 누가 알까?
첫댓글 아! 그렇구나.
따라가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