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어근인>(시즌2) 제5회 애국심 고전 속의 지혜 1. 애국심이 왜 필요한가 범중엄(范仲淹)은 북송(北宋) 때의 유명한 정치가이자 문학가이며 <악양루기(岳陽樓記)의 저자이다. <악양루기>를 쓸 때 58살의 범중엄은 오늘날 호남(湖南)성의 악양(岳陽)이 아니라 하남(河南)성의 등주(鄧州)에서 지주(知州)직을 지내고 있었다. 그 때 등자경(藤子京)이 범중엄에게 서신을 보내와서 개축한 악양루에 관한 글 한 편을 부탁했고 범중엄은 흔쾌히 동의했으며 그로부터 불후의 명작 <악양루기>가 탄생하게 되었다. 범중엄은 북송의 인종(仁宗)제 때 관직이 부재상에 가까운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이르렀다. 범중엄은 <악양루기>를 쓰기 3년 전, 즉 서기 1043년 8월에 참지정사로 임명되었고 그 해 9월 인종제는 부필(富弼)과 범중엄 등을 불러 국사를 논했으며 범중엄은 ‘십사소(十事疏)’를 올려 상세한 신정조치를 제출했다. 송나라 경력(慶歷) 신정(新政)이 막을 연 것이다. 그 때 북송은 겉으로 보기에는 번창했으나 사실상 번창함 속에 문제점이 많았다. 그 문제점을 본 범중엄은 나라와 국민 사랑으로 상세한 신정조치를 제출한 것이다. 하지만 역대로 개혁은 많은 저항을 받기 마련이었다. 반대파의 강한 압박에 원래 개혁의 의지가 굳세지 못했던 인종제가 흔들려 1045년 5월 범중엄은 참지정사직에서 면직당하고 오늘날 섬서(陝西)성의 빈주(邠州) 지주(知州) 겸 중앙정부가 지방에 파견하는 직위인 섬서 안무사(安撫使) 직을 겸했다가 그 해 11월 안무사에서도 해직되고 등주 지주로 좌천되었다. <악양루기>의 배경을 논하려면 저자인 범중엄의 경력 외에 <악양루기>를 부탁한 등자경의 경력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범중엄과 오랫동안 사적인 친분을 쌓은 등자경은 문학분야에서 많은 시를 남겼고 정치적으로도 범중엄과 입장을 같이 했다. 또 범중엄처럼 나라사랑이 깊은 등자경도 수차 좌천되었으나 이르는 곳마다 자신의 명예보다는 한 마음으로 백성들을 위하며 많은 좋은 일들을 실천했다. 등자경은 오늘날 호남성의 악양 일대를 말하는 파릉군(巴陵郡)의 태수로 취임한 후 수리시설과 교육시설을 건설하면서 경제와 문화교육을 진흥시켰다. 등자경이 파릉군 태수로 취임한 후 2년도 되기 전에 파릉군은 경제가 발전하고 문화가 흥기하며 풍기가 좋은 지역이 되었다. 범중엄은 등자경의 부탁대로 <악양루기>를 써서 아름다운 동정호와 악양루를 묘사하고 좌천된 친구를 위로하며 큰 뜻을 펴지는 못하나 나라와 백성을 걱정하는 지식인과 관리의 애국심을 보여주었다. 이 글에서 지금까지 전해지는 명구는 바로 “선천하지우이우(先天下之憂而憂), 후천하지락이락(後天下之樂而樂)”이다. 바로 먼저 천하의 근심을 근심하고 후에 천하의 즐거움을 즐긴다는 것이다. 범중엄과 등자경과 같은 지식인들은 강한 사회적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기에 개인의 명예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애국심을 우선시했기에 개인의 희로애락을 생각하지 않았다. 이는 또한 중화민족이 어려움 속에서도 끊임없이 진보하는 정신적인 힘으로 작용한다. 시진핑 주석은 2016년 4월 26일 지식인과 노동모범, 청년대표들과의 간담회에서 범중엄의 <악양루기>에 나오는 명구 ‘선천하지우이우(先天下之憂而憂), 후천하지락이락(後天下之樂而樂)’을 인용하여 “지식인들은 천하위공(天下爲公)의 관념과 책임감, 도덕과 정의감을 갖추어야 합니다. 중국의 지식인들은 예로부터 깊은 애국심과 강한 사회적 책임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와 ‘세상을 위해 마음을 가지고(爲天地立心), 백성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爲生民立命), 성인을 위해 학문을 이어 받고(爲往聖繼絶學), 후세를 위해 태평한 세상을 만든다(爲萬歲開太平),’ ‘먼저 천하의 근심을 근심하고(先天下之憂而憂), 후에 천하의 즐거움을 즐긴다(後天下之樂而樂)’는 이런 사상은 예로부터 지식인들의 추앙을 받아오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2. 애국심은 어디서 구현되는가 명(明) 나라 때의 애국 장군 척계광(戚繼光)은 군인의 가문에서 태어났다. 역시 장군이었던 그의 부친 척경통(戚景通)은 56살 나던 해에 아들 척계광을 보게 되었다. 척계광이 늦둥이였지만 척경통은 무원칙적으로 아들을 사랑하지 않고 어릴 때부터 엄하게 키우며 장군 가문의 가풍을 이어받으라는 의미에서 이름을 계광(繼光)이라 지었다. 명나라 가정(嘉靖) 34년, 서기 1555년에 28살의 척계광은 왜구들이 가장 빈번하게 출몰하는 절강(浙江)의 방위를 맡게 되었다. 절강에 도착한 척계광은 강력한 군대 편성의 절박성과 필요성을 느끼고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척가군(戚家軍)’을 조직했다. 척가군은 척계광의 지휘하에 왜구를 물리쳐 연해지역의 백성들이 평화롭게 살게 했으며 역사에 빛날 불후의 공훈을 세웠다. 명나라 가정 42년, 서기 1563년 척계광은 복건(福建)에 파견되어 연해지역을 침범하는 왜구를 격퇴시켰다. 척계광은 복건을 지킬 때 <망궐대(望闕臺)>라는 시를 써서 자신의 애국심을 표현했다. ‘궐대(闕臺)’는 높은 곳에 세워진 대를 말하지만 ‘궐(闕)’의 본뜻은 황궁을 말하고 여기서는 조정을 가리킨다. 척계광은 <망궐대(望闕臺)>라는 시를 빌어 자신이 어디에 있든 시종 변함없이 조정에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함을 보여주었다. 이 시는 네 구절로 되어 있다. “십 년 동안 찬 바다 속에서 왜구와 싸우며(十載驅馳海色寒), 이 곳에 서서 저 멀리 경성의 궁궐을 바라보네(孤臣於此望宸鑾). 나의 붉은 피는 산발에 가득한 서리인 듯 (繁霜盡是心頭血) 뭇 산봉을 단풍처럼 붉게 물들였네(洒向千峯秋葉丹)”. ‘십재구시해색한 (十載驅馳海色寒)’, 이 첫 구절에서는 척계광이 절강에서부터 복건까지 십여 년 동안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왜구를 물리치며 조국의 바다를 지켜온 것을 묘사한다. ‘고신어차망신란(孤臣於此望宸鑾)’, 이 두 번째 구절의 ‘신란(宸鑾)’은 황제의 어가를 뜻하고 여기서는 나라의 중심지인 경성을 말한다. 척계광이 경성에서 멀리 떨어진 변경을 오가며 바다를 지키지만 그의 마음은 언제나 조정과 나라를 향했고 그런 뜨거운 애국심이 있었기에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왜구를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이다. 세 번째와 네 번째 구절인 번상진시심두혈 (繁霜盡是心頭血), 세향천봉추엽단 (洒向千峯秋葉丹)에서는 마침 가을이라 온 산에 가득한 단풍을 조국을 위한 붉은 피로 비유했다. 척계광은 서리와 단풍, 열혈(熱血)과 단심(丹心) 등 시의 언어로 나라를 사랑하는 자신의 애국심을 잘 표현했다. 시진핑 주석은 2018년 5월 28일 중국과학원 제19차 원사대회, 중국공정원 제14차 원사대회에서 척계광의 시를 인용하면서 “‘나의 붉은 피는 산발에 가득한 서리인 듯(繁霜盡是心頭血), 뭇 산봉을 단풍처럼 붉게 물들였네(洒向千峯秋葉丹)’ 라는 시가 있습니다. 과학원과 공정원 원사(院士)들은 국가의 재산과 국민의 자랑, 민족의 영광입니다. 오랫동안 과학자들은 대를 이어 깊은 애국심을 품고 두터운 학문과 넓은 과학적 시야로 조국과 인민을 위해 사서에 기록될 큰 기여를 했습니다”라고 말했다. 3. 애국심을 어떻게 양성할 것인가 <안자춘추(晏子春秋)>는 후대 사람들이 춘추(春秋)시대 제(齊)나라의 명재상인 안영(晏婴)의 언행을 기록한 책이다. 제 나라 때 여러 황제의 재상을 지낸 안영은 어진 정치를 펴고 백성을 자신의 몸처럼 아꼈으며 박학다식해서 사람들은 그를 ‘안자(晏子)’라 부른다. 안자가 제경공(齊景公)의 재상으로 있을 때 제경공이 아부를 일삼는 사람에게 큰 상을 내리려 했고 담당 대신이 어지를 따르려 하지 않아 제경공이 크게 화가 났다. 이 일을 알게 된 안자가 황궁에 들어가 경공을 알현하고 많은 이야기들을 했다. 이야기의 골자는 하(夏)나라 우(禹)임금과 상(商)나라의 탕(湯)왕, 주(周)나라의 문왕(文王), 무왕(武王)이 나라의 진흥을 이룬 것은 그들이 “이어국자애지(利於國者愛之), 해어국자악지(害於國者惡之)”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나라는 백성들이 몸을 담고 사는 근본이기 때문에 나라에 이로운 일을 하는 사람은 개인의 이익에 손해를 끼치더라도 사랑과 보호를 받아야 하고 나라에 불리한 일을 하는 사람은 개인의 이익을 도모하더라도 비판하고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후에 사람들은 안자의 이 말을 <안자춘추>에 기록했고 이 고전은 오늘날까지 널리 전해지며 많은 사람들을 격려한다. 어려서부터 큰 뜻을 키워 애국심의 모범이 된 인물이 또 하나 있다. 바로 명(明)나라 때의 우겸(于謙)이다. 어려서부터 마음 속에 큰 뜻을 품은 우겸은 성인이 되기도 전에 벌써 “이 몸이 가루가 되어도 돌볼 것 없어라(粉骨碎身渾不怕), 오로지 청백함을 이 세상에 남기리 (要留淸白在人間)”라는 명시를 썼으며 그는 성인이 되고 나서 어릴 때 세웠던 뜻을 행동으로 실천했다. 명나라 정통(正統) 14년, 서기 1449년에 몽골의 야선(也先)이 명나라를 침범했다. 당시 명나라 황제 영종(英宗)제가 환관의 말에 휘둘려 직접 군대를 이끌고 전쟁에 나갔다가 대패하고 야선군에 생포되었다. 황제가 생포된 소식이 전해지자 명나라 조정에는 혼란이 빚어졌다. 명석한 두뇌를 가진 우겸이 신속이 요충지에 군대를 파견하고 포화의 전략을 취해 승리에 교만해진 야선의 군대를 격퇴시켰다. 우겸의 노력으로 명나라 조정은 국도였던 북경(北京)을 지켰고 조정의 혼란을 바로 잡았다. 바로 우겸과 같이 능력을 갖춘 애국자들이 백성들의 마음 속에 ‘철의 장성’을 쌓은 것이다. 시진핑 주석은 2018년 5월 2일 베이징대학교에서 사생들과 가진 간담회에서 <안자춘추>의 고전을 인용하여 “중국인들은 중화민족의 역사를 알고 중화문화의 유전자를 이어 받으며 민족의 자긍심과 문화의 자신감을 가져야 합니다. 언제나 나라를 생각하고 어디서나 국민을 생각하며 ‘나라에 이로운 사람을 사랑하고(利於國者愛之) 나라에 해로운 사람을 비판(害於國者惡之)’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