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북스의 계간지다. 작년 하반기 창간호에 이어 통권 두 번째 잡지인셈이다. 차경희 편집위원의 인사말에 이어 펼쳐지는 고풍스러운 책 공방의 사진이 인상적이다. 색색의 가죽과 실, 오래된 책들, 나무와 금속으로 된 도구들을 찍은 사진에 눈길이 오래 머문다. 현란한 기계들로 대체되는 시대에 한 땀 한 땀 수놓듯 전부 수작업으로 이루어지는 공방의 모습에 마음이 편해진다.
책을 제본하는 예술제본가를 '를리외르'라고 부르나보다. 우리나라 최초의 예술제본소 '렉또베르쏘'의 고 백순덕 선생과 그 제자 조효은 현 대표의 일화, 그리고 프랑스 유학을 떠나 '를리외르' 자격증을 취득하고 돌아온 백순덕 선생의 조카 이효진. 이들을 통해 척박한 예술제본 공방의 이야기를 알게 되었다. 참고로 '렉또베르쏘'의 뜻은 '책의 앞장과 뒷장'이며 라틴어라고 한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책의 기원은 파피루스에서 시작되었고 성서의 bible도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두루마리 형태의 파피루스는 낱장을 묶어 끝을 꿰매는 코덱스로 바뀌면서 휴대와 보존이 용이해졌다. 오래된 책이라도 겉표지는 낡았을지언정 속지는 생생하게 살아있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코덱스의 힘이다. 인터뷰어인 문지혁 작가는 책의 본질을 인터뷰하는 과정을 속해 새롭게 정의하고 있다.
"내용이 아니라 물성이 책의 본질이다" (42쪽)
의외의 정의다. 책의 본질이 내용에 있는 것이 아니라 책을 둘러싼 표지, 무게감이 느껴지는 책 그 자체에 있다니. 코로나19 감염증으로 인해 수업에 대한 본질도 약간 달리 해석되고 있다. 보통 수업하면 교사와 학생의 상호작용, 그 상호작용을 가능케 하는 물리적 시간을 떠올렸다면 비대면 원격 수업이 이루어진 코로나19 감염증 시기에는 수업의 본질이 내용에 있는 것이 아니라 수업을 준비하는 과정과 수업 후 피드백에 있음을 경험한다. 컴퓨터 화면 상에 비춰지는 콘텐츠와 얼굴보다는 학생들을 생각하며 준비하는 그 시간이 더 의미 있으며 다시 만날 날을 기대하는 그 시간이 오히려 '수업' 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예술제본 공방에서의책은 책이라는 크기와 무게를 지닌 물리적 형식이 곧 책임을 말해준다.
"페이지마다 빼곡히 적혀 있는 글자가 아니라, 앞장에서 뒷장으로 넘어갈 때 우리가 필연적으로 한순간 경험하는 어둠과 공백과 멈춤만이 진짜 책이다" (42쪽)
새로운 책을 모조리 샅샅히 다 읽지 않아도 그 책이 내 책인 것처럼 책은 내용보다는 책 자체에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는 역설적인 생각에 책에 대해 새롭게 생각하게 된다. <에픽#02-멋진 신세계>라는 책의 내용 구성도 남다르지만 책장을 넘길 때마다 느껴지는 감촉도 새롭게 느껴진다. 우리 사회가 놓칠 수 있는 사회적 소외자, 홈리스(노숙인)를 만나 구술한 이야기, 병원이 병원이 되게끔 변방에서 애쓰는 병원 노동자의 소박한 이야기, 몇 년전부터 우연찮게 읽게 된 추리 소설의 작가 정명섭의 진정한 덕후의 삶이 무엇인지 자신의 삶을 공개한 이야기는 평소에 접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기에 꼼꼼히 활자를 따라 읽어가게 되었다. 논픽션과 픽션의 경계를 넘어가는 두 번째 파트에서는 에세이를 소개하되 사회적 현상에 관심이 있는 독자들이라면 챙겨볼만한 책들을먼저 읽은 이들의 설명을 곁들여 놓아 궁금증과 호기심을 유발하게 하며 결국 관련 책들을 찾아 읽도록 강하게 유혹하고 있다. 나 사진 조차도 며칠 전부터 읽다가 만 김현경 작가의 <사람, 장소, 환대>, 문학과지성사의 책이 소개된 지면을 보고 중도해 읽기를 포기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설득력이 강하게 느껴지는 글들이었다.
마지막 부분 세 번째 파트에는 단편집들을 담아 놓았다.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중세 수도원을 배경으로 한 '말하지 않은 책'의 이야기였다. 부패한 수도원장의 비뚤어진 욕망으로 경건한 독서를 금기시하고 성서를 번역하고 묵상하는 가련한 마르타 수녀를 재물삼아 자신의 자리를 오랫동안 보존하려는 음융한 계략을 고발하는 이야기는 결국 책이란 누군가 책에게 말을 걸때에만 비로소 책은 대답한다는 명제를 독자들에게 던지고 있다.
"위대한 책을 읽는 순간, 책과 독자와 화자와 등장인물과 저자의 운명이 모두 바뀌는 것은 자연스러운 이치다" (174쪽)
독서를 통해 독자뿐만 아니라 책의 운명도 바뀐다는 것을 수도원을 공간적 배경으로 삼은 '말하지 않는 책'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인터뷰와 논픽션, 논픽션과 픽션의 경계물들, 픽션까지 한 권의 책에서 다양한 종류의 글들을 만나볼 수 있는 것은 <에픽>의 장점이자 특징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