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심사 문수사 겹벚꽃, 내변산 신록, 군산 폐항의 일몰

[김태혜]

개심사 문수사 겹벚꽃, 내변산 신록, 군산 폐항의 일몰

적막하지 않고 어찌 봄밤이라 할 수 있을까.
저녁바람에 흐느끼던 보리밭이 내 곁에 와 잠들었다.
 
이제 더이상 애달프지 않으리.
손아귀에 쥐어본 한줌 바람 같은 시간들 

노을 속에서 흔들리는 보리밭을 보면서
나는 사랑의 배후를 본다. 

감미로운 속삭임이었다가
사라져버리는 기억의 저편. 

먼 옛날 바윗돌에 새긴 매향비埋香碑는
찾는 이가 없어 홀로 이끼를 머금었다. 

돌 속에 새겨진 천금 같던 약속이여
이 들녘에서 누가 머물다 갔는지 말해보렴.

열리지 않는 목청으로 봄밤의 심연을 향해
어어어이이이 하고 소리를 질러보느니

적막하지 않고 어찌 이별이라 할 수 있겠는가.
들녘에 개구리 울음소리 가득하다.


봄밤 - 이형권




















 


곰배령 얼레지와 연가리 맑은터 산나물 여행


봄밤에는 우수가 있다. 
슬픔이라고 표현하기에는 채워지지 어떤 감정의 상태
봄밤의 우수는 깊고도 고요하고 충만하면서도 서럽다.
본능에서 좀 더 심화된 감정, 
그 심연에서 흘러나오는 샘물 같은,
저녁 바람에 실려오는 오월의 숲처럼 싱그러운...

봄밤의 우수가 어디서 오는지 알 수는 없다. 
연두빛의 잎새들의 청순함에서 오는 것인지 
山桃花의 연분홍 순정에서 오는 것인지 
골짜기를 울리는 두견의 애절함에서 오는 것인지
봄밤의 우수는 슬프면서도 슬프지 않는
애틋한 저녁 하늘빛의 떨림 같은 것
아직은 삶의 격랑을 마주하지 못한 
순수한 존재들이 뿜어내는 설레임 같은 것
시나브로 밀려오는 그리움 같은 것이다.

자작나무 어린 잎새들이 눈을 뜨고
야광나무 흰 꽃이 등불처럼 피어날 때
초승달 아래 작은 모닥불이 타오르고
어디선가 내려온 밤의 적막이 등뒤에 앉아 있다.
감로 같은 이슬이 내리는 숲속의 뜨락
봄밤의 우수를 불러 대작하기 좋은 곳
산골 오두막에서 저 홀로 애끓는 마음이 있어
밤의 숨소리처럼 고요해진다.

봄밤 / 이형권















 


고창 보리밭 칠산바다 해당화 증도 삐비꽃, 12사도 순례길

바다의 시간이 멈추어 설 때
가슴을 여는 섬이 있다.
옷섶을 여미는 노두 길이
발소리마저 남기지 않고 사라질 때
외로움이 깊어지는 저녁 해변에서
주단처럼 부드러운 바다의 속살을 본다.

길은 소기점도에서 소악도, 진섬으로 넘어갔다
다시 진섬, 소악도, 소기점도를 지나 
대기점도에 이르렀고
바다는 물마루를 이루어
해산하는 여인처럼 몸을 풀었다. 

붉은 해가 갈매섬 너머로 사라지고
비로소 열리는 청 보랏빛 하늘
어부들의 마을에 등불이 켜지고
바닷가 작은 예배당에 종소리 울릴 때
가만히 우러러보는 하늘가에
순례자의 별이 초롱하다.

기점 소악도에서 / 이형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