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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히브리 2,5-12
마르코 1,21ㄴ-28
극단의 신성함 앞에 극단의 사악함이 굴복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전도 여행의 베이스 캠프였던 카파르나움에 계실 때의 일이었습니다.
마침 안식일이 되어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회당 안에는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 하나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유심히 바라보십니다.
마치 징그러운 벌레라도 바라 보는듯한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 달리, 예수님의 시선을 더없이 부드러웠고 따뜻했습니다.
한없는 측은지심과 연민으로 가득했습니다.
참으로 특별한 순간이었습니다.
고귀하고 아름다운 창조주 하느님의 시선과 망가질 대로 망가진 한 비참한 인간의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시선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갈수록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극단의 신성함 앞에 극단의 사악함이 굴복하기 시작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마침내 참다못한 더러운 영은 두 손 두 발 다 들고 소리 소리를 내질렀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마르코복음 1장 24절)
더러운 영이 들린 가련한 한 인간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측은지심으로 가득한 눈길을 마음 깊이 간직하고 오늘 하루를 살아봐야겠습니다.
2천년 세월이 흘렀지만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그 옛날 바로 그 시선으로 오늘 나를 유심히 바라보고 계십니다.
그 옛날 회당 안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마냥 ‘뭔가’에 단단히 홀린 나, 하느님 아닌 엉뚱한 대상에 단단히 빠져든 나, 한 순간 자신을 통제 못해 언제나 돌아서서 크게 가슴 치는 나를 예수님께서 자비심 가득한 눈길로 내려다보십니다.
이 시대 또 다른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나, 죽음의 문화에 깊이 빠져든 나, 극단적 세속주의와 편리주의에 사로잡힌 나, 배금주의와 소비향락주의에 젖어든 나, 여러 가지 중독증세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나를 예수님께서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옛날 더러운 영에게 외치셨듯이 오늘 나에게 외치십니다.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마르코복음 1장 25절)
카파르나움에서 있었던 더러운 영의 추방 사건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 말씀의 폭발적인 역동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분의 말씀 한 마디에 더러운 영은 순식간에 힘을 잃었고, 더러운 영에 들렸던 사람에게서 튕겨져 나와 내동댕이쳐집니다.
오랜 세월 더러운 영의 횡포와 올가미에 묶여 옴짝달싹 못하고 있던 이를 자유롭게 해주시는
예수님의 권능에 찬 모습에, 카파르나움 사람들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외친 것입니다.
“이게 어찌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영들에게 명령하지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마르코 복음 1장 27절)
단 한 마디 말씀으로 예수님께서는 역사상 그 누구도 행할 수 없었던 전무후무한 기적과 치유를 행하시니 카파르나움 사람들이 깜짝 놀란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용하는 말에는 어느 정도 권위와 힘이 있는지 진지하게 성찰해봐야겠습니다.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말은 이웃을 살리는 말인지
아니면 죽음으로 몰고 가는 말인지 반성해봐야겠습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권위가 있는 말엔 항상 이것이 섞여 있다>
복음: 마르코 1,21ㄴ-28
첫 어부들을 제자로 뽑으신 예수님은 이제 본격적으로 사람 낚는 일을 시작하십니다. 그 일을 시작하시며 오늘 복음에서 강조하는 것은 ‘권위 있는 가르침’입니다.
복음 전파자의 권위는 ‘성령’입니다. 성령만이 악령을 쫓아낼 힘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회당에 있던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을 쫓아내십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라며 놀라워합니다.
권위 있는 가르침과 악령을 쫓아내시는 것은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요? 가르침은 말로 하는 것이고 악령은 성령으로 쫓는 것인데 말입니다. 그러나 말에 성령의 힘이 더해지면 사람에게서 악령이 떠나가게 되는데 그런 가르침이라야 권위가 있는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권위가 없는 가르침은 어떤 것일까요? 금쪽같은 내 새끼와 같은 프로에 보면 아이들은 부모 말을 듣지 않습니다. 아이들의 문제라고만 치부해버릴 수 있을까요? 부모의 말에 왜 권위가 사라졌는지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받으시고 광야에서 40일간 단식하시며 당신 자신과 싸우셨습니다. 성령이 말의 권위인데, 이 성령은 필연적으로 자기가 자기 자신을 이기게 합니다. 이때 흐르는 피가 말과 섞을 때야 말에 권위가 생기는 것입니다.
무더운 여름날, 한 젊은 스님이 수박을 사러 5일장에 들렀습니다. 완벽하게 익은 수박을 조심스럽게 골라 값을 지불한 스님은 버스 정류장으로 돌아가던 중이었습니다.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가 치고 가서 수박이 땅에 떨어져 조각조각 부서졌습니다.
“이보시오! 남의 수박을 깨뜨린 뒤 어떻게 그냥 가버릴 수가 있어요?”
스님이 소리쳤습니다. 백발의 노부인이 뒤를 돌아 스님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았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중이라면 정신을 차려야지. 이 정도도 못 참느냐?”라고 말했습니다. 가르침과도 같은 여인의 말은 스님의 뒤통수를 강타한 것 같았습니다.
“보살님, 어디 사십니까?” 스님이 호기심에 물었습니다.
“내가 어디 사는지 뭐가 중요하냐? 중요한 건 네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다.”
스님은 그녀를 따라가고 싶은 참을 수 없는 충동을 느꼈습니다. 잠시 후, 노파는 막걸리를 파는 가게로 들어갔습니다.
“남 따라다닐 시간에 네 갈 길이나 가라.” 노파가 말했습니다.
스님은 그 말에 깜짝 놀라며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내가 지금껏 남을 따라다니기만 했구나.” 노파의 말은 계속해서 가르침처럼 느껴졌습니다.
스님은 “부인, 당신은 매우 현명해 보이는군요. 무엇을 공부하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라고 물었습니다. 그 여자는 “지혜는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23살에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이를 키우고 대학에 보내기 위해 갖은 고생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군에 입대하고….”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흘렀습니다.
“어느 날 그의 부대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지뢰를 밟고 죽었다고 하더군요.” 그녀는 계속해서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그 사람 얼굴을 보기 전까지는 믿을 수가 없었어요. 그 후로 눈물이 멈출 수가 없었어요. 먹고 자고 상관없어요. 저는 몇 년 동안 슬픔에 사로잡혀 있었어요.”
스님은 그녀의 말속에 담긴 깊은 고통을 깨닫고 “어떻게 극복하셨나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녀는 “어느 날 지붕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것을 발견했어요. 떨어지는 것을 보다 보니 충격을 받았습니다. 물방울이 냇물이 되어 냇물이 바다가 됩니다. 바다가 다시 구름이 되고 물방울이 되죠. 삶과 죽음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은 돌아옵니다. 그 근원으로. 이것을 느끼고는 슬픔을 멈출 수가 있었습니다.”
노파의 말에 권위가 있었던 이유는 노파의 말은 곧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노파는 자기 자신을 이긴 사람입니다. 그 안에 성령께서 계신 것이고 그 성령이 한마디, 한마디에 그 사람의 피를 섞는 것입니다. 그래서 같은 말이라도 예사로 들리지 않습니다. 나의 삶을 변화시키지 않은 말들은 내가 아무리 되풀이해도 힘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한테서 들으신 말씀으로 당신을 변화시키셨습니다. 그러니 말씀에 힘이 있으셨던 것입니다.
자신을 이긴 사람의 말엔 권위가 있습니다. 자신도 이기지 못한 말은 권위가 없습니다. 아무리 옳은 말이라고 해도 그렇습니다. 잔소리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중 가장 권위 있는 말은 어디서 하신 말씀일까요?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실 때, 그리고 십자가에서 하신 말씀들입니다. 자기를 이기신 말씀. 이 말씀을 듣는 이들은 변합니다. 성령께서 그 사람의 말에 피를 섞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영향력 있는 말을 하고 싶거든 매일 성령으로 자기를 이기는 시간을 꼭 가져야 합니다. 이것을 한마디로 하면 ‘기도’라 할 수 있습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마르 1,21b-28: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다.
예수님께서는 카파르나움으로 가시어 회당에 들어가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거기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한 분이십니다.”(24절) 더러운 영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저렇게 소리를 쳤다. 악마나 마귀나 아버지와 아드님을 알아보지만 믿음이 없다. 믿음은 위대하다.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악마들도 믿음을 지니고 있었지만, 사랑이 없었다. 만일에 우리가 악마와 어울리면 믿음을 자랑할 수 없다. 베드로와 악마의 고백은 다르다.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껴안고자 그러했지만, 마귀들은 그리스도께서 자기들을 떠나시라고 그렇게 말했다. “조용히 하여라.”(25절) 그분은 악마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시고 새로운 가르침을 베푸신다.
베드로는 칭찬을 받았다.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 베드로를 복되다고 하신 것은 그의 말이 아니라, 그 마음 안에 있는 사랑을 보신 것이다. 같은 고백을 악마도 하였다. 그러나 베드로는 사랑으로 고백했지만, 악마는 두려움으로 말하였다. 베드로는 “주님, 저는 주님과 함께라면 죽을 준비도 되어있습니다.”(루카 22,33) 말씀드렸고, 악마는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마태 8,29) 하였다. 믿음을 지니되 사랑과 함께 지니라는 말씀이다. 믿음이 없이는 사랑을 지닐 수 없다. 올바른 믿음을 고백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연필을 어떻게 만들까요? 우선 용광로에서 만든 강철로 나무를 벱니다. 그리고 다시 잘라서 작은 조각으로 만들어 건조하고, 염색한 뒤에 또 말립니다. 작은 조각에 흠을 낸 뒤 서로 이어 붙여 고정합니다. 연필의 핵심인 연필심은 흑연에 흙, 동물성 지방과 황산으로 만든 화합물을 섞어서 만듭니다. 피마자 씨앗에서 추출한 피마자유로 만든 액체로 연필의 나무와 심을 코팅하고, 수지를 써서 라벨을 붙입니다. 연필 끝에는 구리와 아연으로 만든 놋쇠를 붙이고, 유채씨유, 염화황부터 황화카드뮴에 이르는 수많은 화학물을 사용해서 만든 지우개를 여기에 붙입니다.
이런 제조 과정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연필 한 자루가 새롭게 보이지 않습니까? 만드는데 별로 어렵지 않은 간단한 물건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것이 그러했습니다. 별것 아닌 것처럼 생각하지만, 그 어떤 것도 별것 아닌 것은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혼자서는 연필 한 자루 하나 제대로 만들 수 없습니다. 즉, 우리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 또 도움을 주는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함께’의 중요성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부족함을 아시는 주님께서는 우리와 늘 함께 하시겠다고 하셨고, 우리도 함께해야 함을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라도 함께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도 하느님 나라에서도 함께해야 하는 우리입니다. 그러나 함께할 수 없는 존재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악’입니다.
사실 악은 늘 우리와 함께하려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하느님 곁에서 멀어지기 때문입니다. 깨끗한 삶이 아닌 더러운 삶을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인물에 대해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라고 표현합니다. 더러운 영은 예수님께서 어떤 분인지를 세상에 알립니다.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악은 분열을 일으킬 따름입니다. 분명히 정답이지만,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의 말을 누가 믿겠습니까? 정답인데도 믿지 않으면서 예수님을 의심하게 되고, 그 결과 예수님 곁을 떠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악과 절대로 타협하지 않으십니다. 꾸짖으며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주님과 또 이웃과 함께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악과는 함께해서는 안 됩니다. 악을 단호하게 끊어 버리고, 사랑 안에서 주님과 또 이웃과 함께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느님 나라에 가까워지게 됩니다.
오늘의 명언: 죽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정말 무서운 것은 결코 살아보지 못하는 것이다(빅토르 위고, ‘레미제라블’ 중).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그분께서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마르 1,22)
예수님의 권위는
그분의 깊은 사랑이었네.
사람들은
지금까지
어느 누구에게서도 보지 못했던
거룩한 사랑을
그분에게서 보았네.
예수님의 권위는
그분의 깊은 겸손이었네.
사람들은
한 없이 낮추고 낮추어서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는
숭고한 겸손을
그분에게서 보았네.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출처 : 묵상글 단톡방)
율사들은 아는 것은 많았지만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는 것을 자랑하고
자신들의 권위를 내세우고
기득권 유지를 위한 도구로 일삼았을 뿐입니다.
이것이 그들이 권위를 인정받지 못하고
권위적으로 변질된 결정적 이유입니다.
우리가 부서지기 쉽고
깨지기 쉬운 여린 인간이지만
내가 만나는 이들에게
최선을 다하는 삶이야말로
그 어떤 가르침보다
소중하고 값진 깨달음을 줍니다.
따라서 말로만이 아니라
삶으로 보여 줄 수 있는 가르침이야말로
최고의 권위 있는 가르침입니다.
때로는 사제로서 살아가면서
교회와 사회의 무거운 짐을 지고
고뇌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지만
지금 내 앞에 있는 피정객 한 분 한 분에게
오늘 하루도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최선을 다해 제 삶을 나누겠습니다.
옛 말이 떠오릅니다.
“몸으로 가르치니 따르고, 말로 가르치니 반항한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마르 1, 22)
하느님 나라를
당신의 온삶으로
열어 보여주시는
예수님의 살아있는
권위입니다.
살아있는 권위는
묶인 것을
풀어주시며
올바른 길로 우리를
인도하여 주십니다.
이렇듯이
올바른 실천은
올바른 삶의 기쁨으로
이어집니다.
올바른 실천이
올바른 권위입니다.
올바른 실천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살아있는
권위입니다.
살아있는 권위는
약한 이들을 먼저
섬기고 보살피는
사랑의 삶입니다.
사랑의 삶을 통해
평범한 일상이
영원한 기쁨이 됩니다.
우리의 일상이
실천을 선택하는
깨어있는 일상이길
기도드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온몸으로
사랑을 실천하시며
가장 아픈 마음을
어루만져 주시며
풀어주십니다.
예수님의 살아있는
권위가 우리를
부끄럽게 합니다.
따뜻한 권위는
따뜻한 관심에서
시작됨을 믿습니다.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마르1,22)
'하느님의 권위!'
오늘 복음(마르1,21ㄴ-28)은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공생활의 주 활동 무대인 가파르나움의 한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몹시 놀랍니다. 그분께서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권위로 예수님을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으로 알아보는 더러운 영을 몰아내십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마르1,25)
더러운 영이 나가자 사람들이 모두 놀라 이렇게 말합니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마르1,27) 이 말로 보아서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학자들은 더러운 영을 쫓아낼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간직하셨던 권위는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하느님(힘.능력)의 권위'입니다.
예수님 공생활은 예수님께 부여된 '하느님의 일'입니다.
인간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이 일과 사랑을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홀로 한적한 곳에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이 기도 안에는 지친 육신의 쉼의 의미도 있었겠지만, 당신에게 맡겨진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기억하고 확인하기 위함이고, 소진되어진 하느님의 힘과 능력을 다시 충전하기 위함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에게도 '하느님의 권위'가 필요합니다.
우리도 예수님께서 선포하시고 명령하신 '하느님의 나라 건설이라는 하느님의 일'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권위'는 예수님께로 향해 있는 나의 '겨자씨 한 알만 한 작은 믿음과 기억의 기도로 주어지는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우리는 '천사들보다 잠깐 낮아지셨다가' 죽음의 고난을 통하여 '영광과 존귀의 관을 쓰신' 예수님을 보고 있습니다."(히브2,9)
복음말씀
제1독서
<하느님께서 구원의 영도자를 고난으로 완전하게 만드신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2,5-12
5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지금 말하고 있는,
곧 앞으로 올 세상을 천사들의 지배 아래 두신 것이 아닙니다.
6 어떤 이가 어디에선가 이렇게 증언하였습니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그를 기억해 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그를 돌보아 주십니까?
7 천사들보다 잠깐 낮추셨다가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시고
8 만물을 그의 발아래 두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만물을 그의 지배 아래 두시면서,
그 아래 들지 않는 것은 하나도 남겨 놓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보기에는
만물이 아직도 그의 지배 아래 들지 않았습니다.
9 그러나 우리는 “천사들보다 잠깐 낮아지셨다가”
죽음의 고난을 통하여 “영광과 존귀의 관을 쓰신”
예수님을 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겪으셔야 했습니다.
10 만물은 하느님을 위하여 또 그분을 통하여 존재합니다.
이러한 하느님께서 많은 자녀들을 영광으로 이끌어 들이시면서,
그들을 위한 구원의 영도자를
고난으로 완전하게 만드신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11 사람들을 거룩하게 해 주시는 분이나
거룩하게 되는 사람들이나 모두 한 분에게서 나왔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형제라고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12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는 당신 이름을 제 형제들에게 전하고
모임 한가운데에서 당신을 찬양하오리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예수님께서는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21ㄴ-28
카파르나움에서,
21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22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23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소리를 지르며 24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25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26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
27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라,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하며
서로 물어보았다.
28 그리하여 그분의 소문이 곧바로
갈릴래아 주변 모든 지방에 두루 퍼져 나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