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도가철학의 시조(始祖)인 노자(老子)가 지었다고 전해지는 책이다. 약 5,000자 81장으로 되어 있으며 일반적으로 상편 37장의 내용을 〈도경(道經)〉, 하편 44장의 내용을 〈덕경(德經)〉이라고 한다.
저자 이이(李耳.생몰년 미상)는 노군(老君) 또는 태상노군(太上老君)이라고도 하는데 높여서 노자(老子)라고 칭한다.
노자는 그 역사적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신원이 자세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노자라는 인물에 대한 기록은 《장자》, 《순자》, 《여씨춘추》, 《한비자》, 《관자》, 《전국책》 등에 보이지만, 전기의 형태로 서술된 것은 사마천이 저술한 《사기》에 의해서다. 사마천에 의하면, 노자는 주(周)나라 수장실(守藏室)의 사관(史官)이었다고 한다. 사관은 오늘날에는 역사가를 의미하지만, 고대 중국에서는 천문(天文)·점성(占星)·성전(聖典)을 전담하는 학자였다. 노자가 쇠망해가는 주나라를 떠나 함곡관(函谷關)에 이르렀을 때, 관문지기인 윤희(尹喜)라는 사람이 노자에게 책 한 권을 써 줄 것을 부탁하자 이에 노자는 상하 편을 저술하여, 도덕에 관해 오천 여 글자의 말을 남기고 떠났다. 그리고 아무도 그 뒤에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고 사마천은 기술하였다.
사마천은 이어서 노자와 동일시되는 다른 인물들에 관해서도 소개한다. 그는 공자와 같은 시대에 살았던 초나라의 노래자(老萊子)라는 사람이 《노자》를 지었다는 설과 아울러, 공자가 죽은 뒤 129년이 지나 활약한 주나라의 태사(太史)인 담(聃)이 진(秦)의 헌공(獻公)을 만났다는 기록이 있는데, 어떤 이는 그가 곧 노자라고 하는 이야기도 있다고 기록하였다. 사마천은 또 노자는 150년의 수명을 누렸다거나, 200년 이상 살았을 것이라는 설도 전하기도 한다.
사마천은 노자와 공자의 만남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공자가 노자를 찾아와 예(禮)에 대해 물었다는 것인데, 이 만남은 다른 문헌에서도 언급되어 있으나, 일관성이 없고 모순되는 점이 많아 단지 전설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진다. 노자와 공자가 만났을 때 노자는 공자의 오만과 야망을 질책했고, 공자는 그로부터 깊은 감명을 받아 그를 구름과 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용에 비유했다고 한다. 또 《예기》 〈증자문〉에도 공자와 노자가 만나는 기술이 있고, 《장자》에도 공자와 노자가 만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아마도 공자와 노자가 만났다는 전설이 일반인들에게 전해지고 있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후한 시대에 이르러 노자는 신화적인 인물로 이해되어 사람들의 숭배를 받게 되면서 노자에 대한 여러 전설이 만들어졌다. 노자의 출생에 대해서는 석가모니의 탄생 신화에 영향을 받아 노자의 어머니가 노자를 72년간 임신하고 있었고, 어머니의 옆구리를 통해 이 세상에 나왔다는 전설이 전하며, 노자가 오얏나무 아래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오얏을 의미하는 이(李)가 성이 되었다는 전설 또한 전해진다. 청대의 최술(崔述)은 노자의 존재를 의심하면서, 《노자》는 노자가 저술한 것이 아니라 극단적 이기주의를 설파한 양주(楊朱)의 위작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 맹자가 묵자와 양주를 배척하고 노자를 배척하지 않은 점을 들어 《노자》는 맹자 이후에 작성된 것이라 했는데, 그 후 그의 영향으로 학계에서 《노자》가 전국시대에 간행되었다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노자(老子)》는 《노자도덕경(老子道德經)》, 《도덕진경(道德眞經)》, 《도덕경(道德經)》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렸다. 노자가 지었다고는 하나 《노자》를 지은 노자가 누구인지‚ 그리고 《노자》가 언제 성립했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이견이 존재한다. 한 사람이 쓴 것이라고는 볼 수 없고, 여러 차례에 걸쳐 편집된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오랜 기간 동안 많은 변형 과정을 거쳐 기원전 4세기경 지금과 같은 형태로 정립되었다고 생각한다.
현행 《노자》는 다수의 판본이 존재한다. 오늘날 우리가 흔히 “도덕경”으로 칭하는 판본은 삼국시대 말기에 왕필이 정리한 것이며, 이를 소위 왕필본 혹은 통용본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왕필본의 경우는 원래의 원본 내용보다도 많은 개작과 변화가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왕필본이 오랫동안 노자의 정본으로 인정받아 왔지만 거기에는 적지 않은 문제가 있다. 즉 왕필본은 그 성립 시기가 노자가 활동했던 춘추전국 시대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기 때문에 오래 전부터 판본 상 여러 문제점들이 지적되어 왔다. 그리고 근래에 지하에서 새로 발굴된 백서본이나 곽점본과 비교해보았을 때 실제로도 상당히 많은 차이점이 밝혀지고 있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현행본의 《노자》 중에 가장 널리 유포된 것은 하상공본과 왕필본이다. 이 두 본은 글자가 다른 것이 상당수 있어서 어느 것이 원래 문자인지 알 수 없다.
《노자》 내용은 B.C. 4세기부터 한초(漢初)에 이르기까지의 도가사상의 집적으로 보여진다. 이미 선진시대(先秦時代)에 원본 《노자》가 있었지만, 현행본의 《노자》 중에 가장 널리 유포되고 있는 것이 왕필본과 하상공(河上公)본임을 감안할 때 현행본의 성립은 한대(漢代)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처음으로 《노자》를 상·하로 나눈 사람은 전한 말기의 학자 유향(劉向)이었다. 그 후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에 상편 37장, 하편 44장, 합계 81장으로 정리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는데, 흔히 상편을 도경, 하편을 덕경이라고 부른다.
《노자》는 도(道)와 만물의 관계를 다루는 내용‚ 군주의 통치술 및 처세술과 관련된 내용‚ 군사·외교적인 문제에 관련된 내용‚ 당대 위정자들에 대한 비난‚ 유가(儒家)‚ 묵가(墨家) 등 제가(諸家)에 대한 비판 등 다양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이러한 내용들은 무(無)와 유(有)(혹은 無名과 有名)‚ 약함과 강함‚ 드러나지 않음과 드러남 등과 같은 관계들에 대한 이해를 중심으로 전개되어 있다. 또한 《노자》는 일반적으로 말하는 도(道)란 일면적이며 상대적인 도에 불과하다는 것을 논파하면서 항구적이고 불변적이며 절대적인 본래의 도를 제창한다. 이 때 《노자》에서 말하는 도는 천지(天地)보다도 앞서고, 만물을 생성하는 근원적 존재이며, 천지간의 모든 현상의 배후에서 이를 성립시키는 이법(理法)이다. 다시 말하면, 대자연의 영위(營爲)를 지탱하게 하는 것이 도이며, 그 도의 작용을 덕(德)이라 한다. 이와 같이 《노자》의 가르침을 도와 덕을 중심으로 설파하고 있다는 입장에서 이 책은 《도덕경》이라는 별칭을 갖게 되었다.
《노자》 사상에 대한 전체적인 평가는 연구자들의 의견이 엇갈린다. 법가(法家)의 형명(形名)이론의 근거로 파악하는 견해‚ 황로학(黃老學)과 연관지어 군주의 통치술로 이해하는 견해‚ 《노자》를 권모술수로 파악하여 사리사욕을 추구하는 사상이라고 비판하는 견해, 평화를 가져올 수 있는 군주의 자질을 논하는 사상으로 옹호하는 견해‚ 장생불사를 추구하는 도교적 견해‚ 자급자족하는 소규모 공동체를 지향하는 견해 등 다양한 견해들이 제시되고 있다. 이 외에도 《노자》를 둘러싸고 있는 여러 가지 다른 해석을 보면, 어떤 사람은 문명 자체를 부정하고 원시적 자연 상태로 돌아갈 것을 권고하는 반문명적 주장이 들어 있는 책으로 읽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특수한 수양을 거쳐서 초월적 경지를 맛볼 수 있게 해주는 수양서로 읽기도 하며, 어떤 사람은 우주의 발생 원리를 설명하는 형이상학 서적으로 읽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정치서로, 어떤 사람은 처세술의 기록으로 읽기도 한다.
현대 중국에서는 노자가 달성한 변증법적 인식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그 사상 전반은 귀족 계급의 심정을 대변하는 것이라 비판해왔으나, 비림비공(批林批公) 운동 이후로는 그 사상의 병가적 또는 법가적인 측면으로도 평가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노자》를 애독하였으나 연구서는 그다지 많지 않다. 이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조선시대 때 주자학이 국가의 정치 이념이 됨으로써 노장사상을 공개적으로 연구하지 않은 원인이 있을 것이다. 조선시대의 노자 연구서로 대표적인 것으로는 조선시대 이이(李珥)가 찬한 《순언(醇言)》, 박세당(朴世堂)이 찬한 《도덕경주(道德經注)》, 홍석주(洪奭周)가 찬한 《정로(訂老)》, 이충익의 《담로(談老)》 등이 있고, 일제강점기 때 유영모는 순 우리말로 번역한 《늙은이》란 책을 남겼는데, 그 제자인 박영호는 이에 해설을 덧붙여 《노자에세이》란 책으로 출판했다. 그 후 근래에 연구 서적과 번역본이 수십 종 출판되기에 이르러 노장철학의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실정이다. 일본은 에도시대에도 주자학의 영향을 그다지 받지 않았기 때문에 비교적 노자에 대한 연구서가 많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