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소설, 비평, 번역의 경계를 부수고
‘책’이라는 매체의 틀을 깨버린 예술가,
캐나다의 시인 앤 카슨(Anne Carson)이
2026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이번 수상은 단순한 한 개인의 명예를 넘어,
‘오늘날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가장 대담하고 명쾌한 답을 던졌다.
스웨덴 한림원이 밝힌 선정 평처럼,
카슨은 고대 그리스 문학이라는 깊은 전통을
독창적 감각으로 재해석하며 시, 산문,
비평, 번역의 경계를 과감히 허물어왔다.
1950년 토론토에서 태어나 평생 고전문학을
연구해온 그가 선보인 실험적 행보는
‘가장 고전적인 것이 가장 파격적일 수 있다’는
역설을 몸소 증명해 보였다.
대표작『에로스, 달콤씁쓸한』부터
운문 소설『빨강의 자서전』까지,
그의 작품은 고전 신화를
현대적 언어로 되살려낸 정수라 한다.
특히, 헤라클레스 신화의 주변부 인물에
불과했던 괴물 게리온을 방황하는
현대적 소년으로 재구성한『빨강의 자서전』은
고대 신화가 21세기 문학에 어떻게 생생하게
숨쉴 수있는 지를 보여준 결정적 순간이었다.
단순히 내용의 변주에 그치지 않았다.
존 키츠의 시구를 도입해 서늘한 이별을
그려내며 여성 최초로 T.S. 엘리엇상을 받은
『남편의 아름다움』부터, 22권의 소책자를
상자에 담아 독자가 읽는 순서를 정하게 만든
『플로트』, 떠나간 형제를 추모하며
긴 종이를 병풍처럼 펼쳐지도록 제작한
아코디언북『녹스』에 이르기까지,
카슨은 ‘책’이라는 매체의 물성 자체를
끊임없이 해체하고 재구성해 왔다.
문학의 종언을 논하는 시대,
앤 카슨의 노벨상 수상은 고전이라는 유산과
현대의 실험성이 만났을 때 문학이 얼마만큼
확장될 수 있는지를 똑똑히 보여준다.
장르와 예술의 경계를 넘나들며 끊임없이
신선한 충격을 주었던 그의 문학 세계는,
앞으로도 독자들에게 ‘읽는 즐거움’을 넘어
‘문학을 경험하는 새로운 지평’을 선사할 것이다.
앤 카슨은 장르를 초월한 작가다.
카슨의 작품은 시인가 싶다 가도 산문 같고,
에세이인데 논문처럼 깊었다.
논문이지만 딱딱하지 않고 유연했다.
그 안에서 꿈틀거리는 것은 언어,
그리고 그 언어가 빚어내는 리듬이었다.
수상 소식이 전해지자 여러 채널에서
그의 인터뷰가 소개됐다.
수상 직후 행해진 인터뷰도 인상적이었지만,
과거에 강연 등의 행사에서 이뤄진 인터뷰가
오래 기억에 남았다.
글을 대하는 태도가 삶의 지향점과
일치하는 사람을 본 듯도 했다.
“지루함을 피하기 위해서라면
나는 무슨 일이든 할 것이다.
그것은 인생의 과업이다.”
이 말은 그의 첫 시집 <짧은 이야기들>
(난다, 2025)의 서문에도 실려 있다.
글쓰기에 대한 조언을 구하는 물음에
앤카슨은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중간에서부터 시작하세요.
그게 제 유일한 원칙이에요.”
그것은, “한결같음을 유지하면서도
지루함을 견딜 수 없었기에 가능한
글쓰기 방식”이라고 오은 시인은 말했다.
오은 시인도 틈틈이 그러고 있었다 한다.
처음부터 쓰면 먼 길을 떠나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 한숨부터 나온다.
첫 문장에 힘주고 싶은 욕심이
망설임 끝에 도리질로 이어지기도 한다.
개요를 짜서 쓰면 구조가 안정된 글을 쓸 수 있지만,
분방하게 뻗어 나가는 글을 쓰긴 어렵다.
중간에서부터 시작하면 핵심을 놓치지 않고도
자유로이 앞뒤를 오갈 수 있다.
중간에서 말한 것이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인지 파악할 기회도 얻는다.
오끝은 시인은, 끝에서부터 시작하는 것도 좋다고 했다.
나도 동의한다.
매일 감사 일기를 쓸 때, 그 저 날의
전체적인 감정 정서를 먼저 쓰고
거꾸로 그 일들을 찾아가며 감사 포인트를 글로 쓴다.
오은 시인은, 어릴 때의 일기를 떠올려보자고 했다.
“참 즐거웠다”나 “참 맛있었다”로 끝나던 글 말이다.
그때와 반대로, 그 즐거움과 맛있음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아니 한 문장 한 문장 쌓아가는 거다.
안착했을 때의 기쁨도 크지만,
그때의 감정이 온전한 즐거움은 아니었음을 발견하면서
또 다른 인식에 다다를 수 있다.
맛있음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헤아리며
그때의 맛을 정교하게 분석할 수도 있다.
그 과정에서 맛을 구성하는 게 단순히
식재료와 양념, 조리 방식만은 아님을 깨닫기도 한다.
어쨌든 글을 쓸 때 중간에서부터 시작하든,
끝에서부터 시작하든, 어디에서든 시작하자.
삶은 중간에서 시작할 수 없지만,
글은 중간부터 시작할 수 있다.
심지어 끝에서부터 거슬러 올라가는 것도 가능하다.
그저 시작하는 게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