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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권호만barnabak
위험을 각오한 잔치
요한복음 12:1-8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서에 서명을 하게 될 때의 일화입니다.
대표들이 모여서 독립선언서에 서명을 하게 될 때 누가 먼저 할 것인가? 가 문제였습니다.
그 순서의 의미는 적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민족을 대표하는 33인중 제일 먼저 서명을 한다는 것은 엄청난 명예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서로 눈치를 보고 있을 때 한용운 선생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서명순서는 죽는 순서야. 손병희를 제일 먼저 써”
그래서 손병희 선생이 제일 앞에 서명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한 33인은 어떻게 보면 죽기를 작정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독립만세운동을 시작할 수 없었고 더구나 민족대표로 서명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8장에 보면 주님께서 시몬의 집에 들어가서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십니다.
시몬의 장모가 열병에 걸린 것은 흔히 있을 수도 있는 일이지만 학자들은 장모의 열병과 시몬의 부름을 연관시키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열심히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으면서 잘 살지는 않았지만
안정된 가정을 이끌어가던 사위가 어느 날 예수라는 랍비를 만나고부터는 고기도 잡지 않고 가정도 팽개치고 예수만 따라 다닙니다.
사위의 이 모습이 장모의 입장에서는 좋게 보일 리가 없었습니다.
처자식이 있는 가장이 집안일을 팽개치고 돌아다니고만 있으니 처자식은 누가 먹여 살릴 것인가?
장차 이 가정이 어떻게 될까?
걱정하다가 결국 몸져눕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입장에서는 이것은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자기가 주님을 따르면 처자식은 어떻게 살까?
왜 걱정이 안 되었겠습니까?
같이 살고 있는 장모님이 충격을 받고 머리를 싸고 들어 누실 것도 충분히 예상하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런 일들을 각오하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어려움과 고난과 부담을 각오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8:34)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주님을 위하여 위험을 각오한 일단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예수님을 위해 잔치를 베풀기로 작정한 베다니 문둥이 시몬과 나사로의 가족들입니다.
예수님을 위해 잔치를 베푼다는 것은 당시의 상황을 보면 위험을 각오한 잔치요 위험을 각오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11장 57절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누구든지 예수 있는 곳을 알거든 신고하여 잡게 하라 명령 하였음이러라.”
당시 최고의 권력을 가진 대제사장들은 예수를 잡기 위해 지명수배를 내렸습니다.
지명수배가 내려진 사람을 보호하거나 숨겨두면 범인 은닉죄, 불고지죄로 함께 처벌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문둥이 시몬과 나사로의 가족들은 예수님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숨겨두고 알리지 않은 것도 큰 죄였을 텐데 하물며 예수를 위해서 잔치를 베풀었다?
이것은 괘씸죄가 플러스된 중범죄에 해당될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이 알려진다면 그들은 절대 무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베다니에서 예수님을 위해 벌인 잔치는 위험을 각오한 잔치였습니다.
위험을 각오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지금도 위험을 각오해야 드릴 수 있는 예배가 많이 있습니다.
북한의 지하교회에서 드려지는 예배는 죽기를 각오하지 않으면 드릴 수 없는 예배입니다.
이슬람권에서 드려지는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음까지는 아니더라도 물질적인 손해를 각오하고, 친구들이나 가족들에게서 따돌림을 받고, 직장에서 불이익을 각오해야 드릴 수 있는 예배도 많습니다.
그 예배가 진정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가 되는 줄로 압니다.
우리는 좋은 환경에서도 예배를 드려야 하겠지만 어려움을 각오하고라도 예배를 드리고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이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진정한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들이 왜 위험을 각오한 잔치를 벌였을까요?
예수있는 곳을 알거든 신고하라는 명령을 몰라서 그렇게 했을까요?
아니면 세상 돌아가는 사정을 몰라서 그랬을까요?
그들은 예수님에게 지명수배가 내려졌음을 알고 있었고, 예수님을 숨겨두면 처벌받는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위험까지도 각오해야 할 잔치를 벌였을까요?
이들에게는 명령을 거역하고 고초를 당하고 어려움을 당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문둥병을 고침 받고 죽음에서 살아났기 때문입니다.
1절에 보면, “이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나사로는 죽은 지 나흘 만에 예수님에 의해 살아났습니다.
수의에 싸여 무덤에 장사되고 냄새까지 나던 나사로를 주님이 살려주셨습니다.
이 일은 나사로는 물론이고 동생인 마리아와 마르다 자매에게도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나사로를 살려주신 주님을 위해 뭔가 대접하고 싶었는데 지금까지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님이 베다니에 오셨습니다.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놓칠 수가 없었습니다.
이 때가 마지막 기회다 싶은 이들은 어떤 대가를 치루더라도 예수님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이 아니면 이미 세상을 떠나고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었던 나사로였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제2의 인생을 살아가게 된 나사로에게는 대제사장의 명령보다 예수님을 대접하고 감사하는 것이 우선이었습니다.
가장인 오빠를 살려주신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누가 뭐래도 어떠한 일이 벌어져도 주님을 대접하고 싶었습니다.
어려움을 각오한 잔치는 죽음보다 더 강하고 죽음보다 더 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있을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고 사랑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먼저 경험하였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여주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주님은 십자가의 고통과 수치를 다 당하셨습니다.
죽음보다 더 강하고 죽음보다 더 귀한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경험하였기에 우리는 모든 일을 제쳐두고 주님 앞에 나와 매주일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도 이 잔치가 어려움을 각오하고 베푼 잔치라는 사실을 알고 기쁜 마음으로 참석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잔치 중에 예수님을 더욱 기쁘게 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잔치가 한참 진행되어졌을 때 나사로의 누이동생인 마리아가 값비싼 향유를 열어 순전한 나드 한 근을 예수님의 발에 몽땅 부었습니다.
그리고는 자기 머리털을 풀어 예수님의 발을 씻어드렸습니다.
이 향유는 300데나리온, 즉 장정이 일 년 동안 일을 해서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야 살 수 있는 값비싼 향유였습니다.
이 향유는 마리아가 준비한 혼수품이었을 것이고 그녀의 재산목록 1호였을 것입니다.
그런 귀한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의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닦아 드렸습니다.
위험을 각오한 잔치의 클라이맥스는 마리아의 헌신이었습니다.
예수님께 드려지는 예배에는 가장 귀한 것을 드리는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이런 소중함과 헌신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그렇다고 매 주일 이런 헌신을 드려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헌신은 사실 마리아도 일생에 한 번 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들이 드리는 예배나 헌신에는 자기희생이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자들이 드린 헌금과 과부의 헌금을 보시고 교훈하신 때가 있었는데요(눅18장)
부자들은 금액으로 보면 과부와는 비교할 수 없는 많은 금액을 헌금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헌금이 칭찬을 받지 못한 것은 그 헌금에는 희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과부의 두 렙돈은 부자의 헌금에 비하여 정말 보잘 것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헌금에는 희생이 있었기에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자기하고 싶은 것 다 하고 시간이 남아서 예배드리는 것은 희생이 없는 것입니다.
자기가 쓸 것 다 쓰고 남아서 헌금을 하는 것도 희생의 헌금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주님 앞에 드리기 위하여 어떤 것이 희생되는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주님은 기쁘게 받으시는 것입니다.
이런 사건이 벌어졌을 때 그 방안의 분위기가 어땠을까요?
성경은 두 가지의 상반된 분위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①하나는, 향유냄새가 집에 가득하였습니다.
향유를 부었으니 향유냄새가 집에 가득한 것은 당연하겠지요.
그러나 이 말씀은 마리아와 같은 헌신이 있을 때 거기에 향유냄새가 가득하게 된다는 사실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어느 공동체를 막론하고 향유 냄새보다는 좋지 않은 악취를 뿜어내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정부도 그렇고 정당도 그렇고 기업도 그렇고 학교도 그렇고 심지어 교회도 그렇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마리아와 같이 헌신하고 희생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 이익만 챙기고 손해는 보지 않으려는 이기적인 마음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고후2:15)
그리스도의 향기인 우리는 아름다운 향기를 발해야 합니다.
사랑의 향기, 헌신의 향기, 겸손의 향기, 희생의 향기를 발해야 합니다.
이런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할 때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기 위해서는 마리아와 같이 희생하고 헌신하는 사랑의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②두 번째는 가롯 유다의 책망이 있었습니다.
갑작스런 마리아의 행동에 집안에 있는 사람들이 큰 충격을 받아 아무도 말을 하지 못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 어색한 분위기를 제일 먼저 깨트린 사람이 가롯 유다입니다.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이 가롯 유다의 말은 일견 바른 말같이 생각되어집니다.
‘그 값비싼 향유를 왜 낭비하느냐?’
‘그렇게 낭비할 바에야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느냐?’
어디하나 틀린 것이 없는 말 같습니다.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나 세상 사람들은 주님께 드려지는 것을 낭비라고 생각합니다.
예배하는 것은 시간의 낭비요, 헌금을 드리는 것은 물질의 낭비요,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세월의 낭비라고 생각합니다.
그럴 시간이 있으면 잠이나 더 자고 헌금할 돈이 있으면 고기나 더 사 먹으라고 합니다.
아울러 신앙생활을 인정을 하면서도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지 않는가?’ 하는 말을 듣게 되는데요,
‘믿는 것은 좋은데, 헌신하는 것은 좋은데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가?’
‘그렇게 유난하게 그렇게 유별나게 믿을 필요까지는 없지 않느냐. 다른 사람처럼 적당히 믿으라.’는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내가 정말 유별나게 믿는 것인가? 흔들릴 때가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이 정상이요 올바르게 신앙 생활하는 것이요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가롯 유다가 마리아를 책망하고 비판하였을 때 주님은 마리아의 편을 들어줍니다.
“그를 가만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마리아의 헌신은 예수님의 죽음을 예비하는 거룩한 헌신이 되었다고 합니다.
마리아는 사실 주님의 은혜가 너무 고맙고 감사해서 향유를 부은 것 뿐입니다.
그런데 그 향유는 인간을 위해 골고다 언덕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시신을 미리 장례하는 향유가 되었다고 의미를 부여해줍니다.
아울러 주님은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막14:9)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없었더라면 가롯 유다는 정말 똑똑한 사람,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람, 인생을 지혜롭게 살아가는 사람으로
인정을 받았을 것입니다.
반면에 마리아는 인생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미련한 여인,
사리를 판단할 줄 모르는 어리석은 여인, 쓸데없는 일에
귀한 것을 낭비하는 여인으로 무시를 당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인생에 대한 최종적인 판단은 어떤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하시는 줄 믿습니다.
주님이 누구의 손을 들어주느냐에 따라 인생의 승패는 결정되는 줄 압니다.
모든 것을 사랑으로 판단하시고 마음의 생각까지 감찰하실 주님의 판단이 중요합니다.
그 주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가롯 유다가 똑똑한 것 같았지만 그는 예수님을 배반한자로 오늘까지 기억되고 있습니다.
반면 마리아는 가장 미련한 여인 같았지만 오늘날까지 아니 앞으로도 예수님을 가장 사랑한 사람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10:24)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당시의 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많은 어려움을 당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 둘 예배에 참석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불이익을 당하거나 어려움을 당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지요.
신앙보다는 현실적인 선택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럴 때 히브리서 기자는 그럼에도 모이기를 힘쓰고 예배하기를 힘쓰자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위험을 각오하고 잔치를 벌여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끝까지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께 충성하며 주님을 예배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위험을 각오한 잔치는 베다니에서만 아니라 우리들의 삶속에서도 끊임없이 벌어져야 합니다.
문둥병을 고침 받은 시몬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나사로가 이런 잔치를 벌였다고 한다면 영원한 생명을 얻은 우리는 더욱 마땅히 주님을 위한 잔치를 벌여야 합니다.
설령 그 잔치가 위험을 각오한 잔치라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오늘 사순절 네 번째 주일을 지키고 있습니다만 사순절은 죽기를 각오한 잔치를 벌여야 할 때입니다.
시간을 드리고 물질을 드리고 정성을 드려 주님께 희생과 헌신을 드리는 사순절이 될 때 부활의 기쁨이 넘치게 될 줄 믿습니다.
(2023.03.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