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나라 황궁 옛 장양 법랑 도자기 기물 도대체 광주에서 제조한 것이냐 아니면 서양에서 제조한 것이냐? 清宫旧藏洋珐琅器物 究竟是广州制造还是西洋制造
2020년 06월 22일 10:05 버퍼링 뉴스 소스:이페어케이
그림5: 2 건륭형 그림 법랑국화문호항저고궁박물관장
종합비교 이상의 건륭형 화법랑 국화문호 다섯 점과 주전자 하나와 다른 점이 있다서양 장인의 이름 외에 유와 손잡이는 모두 노태동 도금한 것으로 꽃잎 무늬와 유, 손잡이에 찍힌 무늬는 모두 동 도금된 가장자리에 입체감을 주었으며, 나머지 네 주전자는 모두 황색 법랑유약지에 국화무늬를 그려 완전히 평면화하였다.또 주전자 1의 인식은 나머지 4호보다 훨씬 반듯하고 크기가 달라 마치 한자를 모르는 사람이 그림인 것처럼 보인다.또한, 주전자 하나, 셋, 넷, 다섯을 나란히 놓아서 발견하였을 때 주전자 하나에는 유약의 색이 눈에 띄게 빛나고, 특히 개광 안의 큰 국화무늬 유약은 순수하고, 유리질감이 있으며, 문양은 더욱 정교하다.사진을 보면 타이베이 고궁박물관의 소장품은 주전자 3, 4, 5와 같으며 유약, 문양 등은 주전자와 차이가 많이 난다.기형, 유약, 작업 등을 종합하여 판정하였을 때, 상문 각호의 서열과 같이 주전자 하나가 최고이고, 주전자 둘, 주전자 셋, 주전자 넷, 주전자 다섯이 최악이다.
둘? 파일 및 실물
(1) 건륭제 그림 법랑국화문호 제작 프로파일
청궁조판처 문헌에 따르면, 건륭 40년 11월 19일 건륭제 명장.강희어제금태서양법랑그릇1장, 동태서양법랑꽃바구니1장, 동태서양법랑발우1장, 동태서양법랑방노탕관1장, 옹정년제동태서양법랑컵접시1장, 동태화법랑가마화양양조캔1쌍, 동태화법랑보덮개통1장, 동태화법랑 법랑1장이어 2년 후인 42년 11월 13일에 원외랑사덕, 오덕이 광둥세관의 감독인 도쿠이(德魁)를 법랑기 10점에 보냈고, 법랑기 10점을 만들어 교태감(交太監)을 거느리고 건청궁으로 들어갔다.
타이베이 고궁박물관에 소장된 "강희동태화 법랑황지국화방호", [문]물호:고법 224, 참고호:열 36, 그림 6] 높이 9.6cm, 구경 6cm, 외벽 밑에는 '강희어제' 쌍둥이로 된 흰 바탕에 남색 해서( 。書)가 있으며, 크기, 문양 등으로 보아 전술의 건륭형 그림 5점과 거의 일치한다.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이 항아리가 이 문서에 나온 강희어의 '동태서양 법랑방탕관'이었을 가능성이 크며, 항아리는 문서에 나온 그대로의 법랑기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그러나 항아리 첫 서명의 발견은 이 서양 장인이 서명한 건륭형 그림 법랑국화문호일 가능성을 엿보게 한다.먼저 법랑기를 만들었던 석 달 전, "건륭 40년 열하수 팔월 십삼일원외랑사덕의 경우, 태감호세걸 교감가짜 금강석 법랑표적철로인 황새 깃털집 작은 칼자루(상감쇠)는 작은 칼에 법랑 조각을 올리고 박아 만든 것이 부실하다는 전지를 전한다.이 일. 작은 칼을 드래곤 킬러에게 넘겨라.타협을 수습하여 보내오다. 다시 덕쿠이에게 전해지고, 그 뒤를 이어 모든 것을 실천에 옮기다.이어 "전작(傳作)은 황제께서 특별히 주문하신 것을 말하며 건륭제는 특히 "후작(後後作)은 모두 양리성(洋里成)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는데, 신하들은 반드시 그대로 따르겠습니다.다음으로, 기록물 속의 시간 기록을 보면, 건륭제가 복제 법랑기를 만들고, 광동해관이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오는 데까지, 전후 약 2년이 걸렸지만, 건륭 47년 7월 22일, 건륭제명자가 강희년 그림을 법랑해당식함 한 개를 광동해관에 보내어 모조하게 되었고, 건륭 48년 정월 7일에 모조하게 되었다.1년7개월. 마침 광주가 프랑스를 왕복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기도 하다.그리고, 겉보기에는, 주전자 하나와 둘, 셋, 넷, 다섯의 가장 큰 차이는 유화자루가 '강희동태화 법랑황지국화방호'처럼 황색 법랑지유약 대신, 궁중외양정제물 때문에 도안을 보내는 금동도금에 국화무늬를 직접 붙이는 경우가 많으며, 프랑스 장인에게는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림6 강희동태화 법랑황색 국화방호 타이베이 고궁박물관 소장
(2) 파일의 기타 기물
다섯 점의 국화 문호의 특성과 기록에 근거하여, 다른 아홉 점의 모조품을 추정할 수 있다.법랑기는 반드시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져야 한다.강희어제' 또는 '옹정년제'는 문양, 기형, 크기가 자신과 완전히 같은 피복제품(원본), 또 약건물인 '건륭년제'는 문양, 기형, 크기와 완전히 같은 기물을 인식하지만 자신의 유약질은 투명, 문양이 섬세하고 도금, 동활 등의 세부사항이 모두 동일하다.위의 세 가지 특징에 따라 프로파일을 결합하여 제공되는 명칭의 단서로, 양안 고궁의 소장에서는 대략적으로 대조하여 구체적인 실물을 찾아낼 수 있다. [표 1]을 참조한다.
[표 1] 건륭 40년 11월 건륭제 복제 전조 법랑기 기록물 대조표
图七 康熙款画珐琅牡丹纹海棠式花篮 故宫博物院藏
图八:1 乾隆年制款画珐琅牡丹纹海棠式花篮 故宫博物院藏
图八:2 乾隆年制款画珐琅牡丹纹海棠式花篮底款 故宫博物院藏
图九 雍正铜胎画珐琅白地花蝶纹盖罐 台北故宫博物院藏
图十:1 乾隆铜胎画珐琅花蝶圆盖罐 台北故宫博物院藏
图十: 2 乾隆铜胎画珐琅花蝶圆盖罐 台北故宫博物院藏
图十一 雍正铜胎画珐琅白地蓝花执壶 台北故宫博物院藏
图十二:1 乾隆款画珐琅白地蓝花壶 故宫博物院藏
그림 12: 2 건륭형 그림 법랑백지 남색 화호 포트 밑 고궁박물관장
도식에 근거하여 제조하였으므로, 프랑스인은 자신이나 현지의 심미에 따라 국부를 진행했다미국화. 슈징페이(施靜隆)는 "건륭(建隆)동태화 나비원형 뚜껑캔 한 쌍"을 예리하게 발견해 "문화재호: 고법 660, 고법 661, 그림 10: 1, 2] 같은 뚜껑캔들과는 "스타일에서 큰 차이를 보이고 선형(線性)은 펜으로 사라지고, 색조(色 。)로 물들인 서양화법으로 색채가 선명하고 그려졌다.그만큼 화자는 서양화법을 잘 아는 장인이어서 수채화 화법과 비슷할 것"이라고 말했다.또 타이베이 고궁박물관 홈페이지의 기물전장자료 검색시스템에서는 덮개캔인 '뚜껑 및 덮개꽃의 꽃심부에 금좌받침 보석'이 박혀 있다고 묘사했으나 원본 그대로 '옹정동태화법 낭백지화나비문개캔' [문화재번호: 옛 법 503, 그림 9]에는 이런 장식이 없었다.고궁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던 '건륭형 그림 법랑백지 남색 화로호'(문화재호:고116597, 그림12:1]의 덮개 면에는 동도금현무늬가 있지만, 원본 그대로 '옹정동태화 법랑백지 남색 집호'(문화재호:고법229, 그림11]의 덮개 면에는 없다.
특별히 검토해야 할 것은 '강희김태내 법랑꽃그릇' [문화재번호 :고법 270, 그림 13]의 그릇에 프랑스 파리 과표와 1777년(건륭 42년) 파리 금장조합검증 순도에 부합하는 연례 스탬프가 있고[그림 14] 과학적인 검사를 통해 금태와 사발 벽 법랑무늬 장식을 프랑스에서 제작해야 하지만, 그릇 바깥 바닥에서 측정된 비소백은 당시 중국의 법랑일 가능성이 크고 글자체가 반듯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그러나 검사 데이터가 틀리지 않을 경우 프랑스에서 제조한 금태법랑 그릇이 광주에 도착했다가 '강희어제'로 잘못 구워졌을 가능성도 있다.먼저 조판처는 도쿠이에게 '철법랑 말고도 법랑, 건륭년제금(建隆年制金)도 세밀하게 태워야 한다'고 전하였는데 구전유지(口傳 。地)일 가능성이 높으며, 이 사항은 본인만 알고 있었다.그러나 건륭 42년 초부터, 덕괴는 광동해관 감독이라 불렸지만 이미 중병에 걸려 일을 할 수 없게 되었고, 사무는 완전히 광동 순무 리양잉이 맡아 처리하였으므로, 덕괴가 황제의 요구를 이질영에게 알리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양민명인은 원본 그대로 '강희어제(康熙御制)'라는 모델을 태웠다.다음으로, 제작소 문서에 따르면, 건륭제는 복제 성공 법랑기 10점을 보고 즉시 남목함에 명색표를 새긴 후 건청궁으로 보냈는데, 유독 "법랑기에 새로 들어온 금태 법랑그릇 1점, 아대에 가서 본대로 태운 1점"이라고 했는데,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세상에 남아 있는 청경궁에 보관하였다.
图十三 康熙金胎内填珐琅花卉碗 台北故宫博物院藏
그림14. 강희금태내 장법랑 화훼공기 타이베이 고궁박물관 소장 사발내부는 프랑스 파리의 과표와 1777년(건륭42년) 파리 김장행회의 순도 검증에 부합하는 연례 스탬프이다.
한편, 건륭제43년 행문 5월 26일 전령 : 광동해관(廣東海官)이 상을 차리는 법랑병(法琅病)으로 그릇을 차렸다.만약 기득자가 있으면, 공물을 따라 들어오고 다시 해서는 안 된다.그 특전법 낭기그대로 따라하며 보내왔다"고 말했다.광둥(廣東)세관은 건륭제(建隆帝)의 유지를 받들어 '특전법(珐法) 낭기(琅器)'로 계속 만들어져 건륭 49년 11월의 연공(年功)에서 이름건수 모두와 건륭제 40년의 전래 법랑기(法 。器)를 만들어 일일이 대응하는 기록을 볼 수 있다.타이베이 고궁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건륭동태화 법랑백지 블루꽃 집호' [문화재호: 고법 3]참고호: *여사칠오40, 그림 15] 나중에 그대로 만든 그릇 중 하나인 것 같은데, 녹나무 상자에 '건륭제 연태 광법랑호 하나'라고 새겨져 있어 나중에 만든 기물을 그대로 광주에서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림 15 건륭황동태화 법랑백지 블루꽃 집호 타이베이 고궁박물관 소장
이상의 논술을 종합하여, 다섯 점의 건륭형 그림 법랑국화문호에서 나타낸 특전에 비해서 연락 드리겠습니다.점, 건륭제가 40년 건륭제(建隆帝)에 광둥(廣東)성 바다의 관발(關發) 도안을 본떠 만든 법랑기를 만들어 광동해 관발(關發) 도안을 프랑스에 보냈고, 이후 건륭제(建隆帝)의 지시에 따라 계속 제작했던 법랑기는 모두 광저우(廣州)에서 제조한 '광법랑'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3. 생산지 분석
건륭제는 건륭제 40년에 이번에 전조 법랑기를 모조하였다고 전해질 때, 그렇지 않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서양에서 제작할 예정인데, 광둥세관의 감독인 더쿠이(德 。)가 유지에 대해 오해하거나 '과도한' 집행을 한 탓이다.
우선 언어논리적으로 볼 때 건륭제가 서양에서 제작할 계획이었다면,굳이 '광 법랑 말고 법랑'을 강조할 필요는 없다.다음으로, '양법랑'은 말 그대로 서양에서 온 법랑이지만, 제조처 문서에 기재된 기물제작에 관한 기록이나 황제의 뜻에 따라 제작기술이 서양에서 유래한 법랑기, 또는 서양에서 수입한 법랑유약을 소제하는 화법랑기를 가리키며 서양으로 가서 만든 법랑기는 보이지 않는다.함. 그리고 건륭제는 계시지만석 달 전에는 '후후년에 모든 일을 해나가면 반드시 좋은 것이 된다'고 강조하였으나, 이 공문서를 자세히 읽어 보면, 이것은 더더욱 '모조 금강석 법랑 표적 구들장 황새 깃털집 칼'의 품질 불량표에 대한 것이다.불만을 표시한다. 실제로 후일의 기록물과 실물을 보면, 전물(傳物)작업은 서양에 보내지지 않았고, 건륭제(建隆帝)도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그러나 당시 광둥(廣東)세관의 감독인 더쿠이(德魁)가 긴장한 상태였을 가능성이 있고, 조판처 파일에 따르면, 덕쿠이(德魁)는 건륭(建隆)에서 38년 '김소란(金烧 。)의 법랑(法 。)의 표적칼'을 '임시 금강석 법랑(靶炕石)의 표적철구황새령(鹳 。 。)의 칼'과 같은 물건으로 바쳐 2년도 채 되지 않아 품질에 대한 책임을 면하기 어려웠다.건륭제는 일처리가 부실했던 광동해관(廣東海關) 감독에 대해 보통 은냥(銀 两) 보상, 벌봉, 해직( 革職) 등의 징계를 내렸고, 덕쿠이(德魁)는 건륭 33년 과실로 1년간 벌봉당한 적이 있어, 이번엔 비교적 온화한 '경고'인 셈인데, 만약 일을 잘못했다간 황제가 더 이상 이렇게 정중하게 굴지는 않았을 것이다.덕괴는 '후후(後後) 모든 전래(傳傳)가 양리성성을 갖추었다'는 지시를 받고 전조화인 법랑기 10점을 복제하는 임무가 곧 닥쳤기 때문에 '광법랑 말고 반드시 법랑'이라는 뜻이 서양으로 가서 만들자는 것이 아니었음을 알았을지 모르지만, 일단 취지가 있는 이상 관철하지 못했다.
건륭제 사후에 법랑기가 서양 장인이 만든 것을 알았는지는, 필자가 현재 파악하고 있다.자료를 보면 그는 아마 이 일을 모를 것이다.이 글을 시작하여, 건륭제는 건륭제 3년 때부터 본조와 전조의 법랑기물을 상자 속에 넣고, 색표를 새긴 후 단응전에 소장하였는데, 이와 함께 열조어용조주, 강옹건 삼대어묵 등의 집물을 보관하였는데, 이번에 특별히 전조와 완전히 같은 집기를 복제하여 '건륭년제'라는 돈을 불살라 하였다.즉석 및 샘플 법랑기로 직접 배송건청궁 입궐의 의미는 분명해졌고, 선대의 개척정신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였을 가능성이 크다.따라서, 건륭제가 이 기물들이 서양인이 만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이를 성조와 화합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세종의 기물을 함께 공장하다.또 당시 광주에서 화법랑기를 제작하는 데에도 5개월이 걸렸으며, 건륭제가 제작 기물을 제작하는 데 2년이 걸렸을 가능성도 높지 않아 비록 프랑스에 가서 기물을 제작하는 데 2년이 걸렸지만, 건륭제가 특별히 이 일을 염두에 두고 재촉하지 않았다면 광해관 감독이 자진해서 보고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며, 건륭제께서 40년, 청궁을 만드신후 기록부를 살펴보기도 하였다.
사? 소결
국화문호 및 나머지 9점의 집기 원배목함은 이미 산실되었으니, 명명법칙상으로 말하면 당당하다.목갑에는 '양법랑'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을 것이다.따라서 문양, 공예의 특징 등을 볼 때, 청궁이 소장하고 있던 그림의 법랑기물이라는 것이 광동산(廣東産)이고, 또한 광동산(廣東産)이기도 하다는 슈징페이(施靜 。)의 관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건륭제는 전조의 법랑기를 본떠서 상자 속에 넣고, 명색 표찰을 새긴 후, 건청궁 단응에 공복하여 보관하였다전 중, 그러나 그가 생각지 못한 것은 데쿠이발 도안이 프랑스에 보내져 만들어진 것이고, 또 어떤 프랑스 장인이 국화문호 밑에 이름을 남겼다는 것이다.오해의 소지가 있는 그림이지만 이 그림들은 의외로 중불교류의 역사문화적 증거가 됐다.
졸문은 시작에 불과하므로 여러 가지 문제가 아직 해결되고 더욱 깊이 연구되어야 한다.기물참조호 여러 개가 '여사칠오(七四75)'로 언급돼 있는데, 고궁물품점찰보고서와 달리 양안 고궁박물관이 이 같은 현상을 볼 때 문제의 유물이 남으로 이동했을 가능성을 추정할 수 있어 구체적인 이유는 검토가 필요하다.국화문호 등 프랑스에서 기물이 제조한 상세한 상황도 더 깊이 탐구할 필요가 있다.이 열 점의 프랑스 장인을 법랑기에 제작하여 선별하였다나와서 일련의 과학 검사를 진행하다그 후, 비교적 정확하고 효과적인 공법 및 화학성분 등의 기준을 학계에 세워 청대 국산과 수입 법랑유약의 차이를 명확히 하고, 양안 고궁박물관의 소장품들을 더욱 선별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서양 장인이 만든 법랑기도 있었을까.뿐만 아니라 초기 화법 기술을 도입하고 제작하는 데 연구 데이터가 큰 참고 가치를 지닌다.
부기: 본문은 작문 과정에서 프랑스의 친구인 샤들(Jean-Al)을 받았습니다.exis Chatelain)선생님, 중국과학원 자연과학사연구소 손현빈 박사님, 타이베이 고궁박물관 후루원 여사의 큰 도움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본문의 작자 단위는 고궁박물관 기물부이며, 문장은 원래 제목이 《서양 제작건조》이다.용형화 법랑기물고( 隆器物考), 전문원(全文原)은 《고궁박물관원간》 2020년 제7호에 게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