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Ⅲ-50] 벌초 이야기와 아버지 그리고 사촌계
민족의 명절 추석을 앞두고, 엊그제 주말(1일)에 ‘벌초인구’의 많은 이동으로 고속도로가 붐볐다한다. 귀성행렬 못지 않은 게 요즘의 벌초행렬인 것을. 꾀복쟁이 친구들이 서울에서, 광양에서 벌초를 하려 내려오고 올라오면서 예초기를 빌려달라는 전화다. 1년에 한두 번 볼까말까하는 사이지만, 한동네에서 거의 스무살 때까지 동고동락했기에 반가운 ‘불알친구’들이다. 사촌들끼리, 더 나아가 육촌들이 1년에 한번 모여 가족산소 벌처를 하는 풍경은 아름답다. 이 산, 저 산 산자락에서 울려대는 예초기 소리에 모처럼 사람 사는 동네같다.
영명하신 아버지는 집 뒷산에 있는 가족묘지 150평을 누구 명의도 아닌 ‘별도등기’를 해놓았다. 5년 전 귀향하면서 벌초는 자연스레 고향에 사는 내가 하는 걸로 얘기가 됐다. 나부터 ‘당연히 그래야지’ 생각했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기분이 처음 시작할 때와 같지 않다. 여느 집처럼 형제들이, 사촌들이 모여 벌초를 하면 모양새도 좋고, 힘도 덜 들을텐데, 그렇지 못하는 대가족 집안형편이 안타깝다. 솔직히 말하자면 형제 갈등이 깊기 때문이다. 갈등이라기보다 대화 자체를 안한 지가 오래된 탓이다. 이유를 꼬치꼬치 말할 일은 아니지만, 시골 살면서 우리 형제들이 우애스럽지 못하다는 것처럼 속상할 때가 없다. 왜냐하면 이장집은 1년에 두 번, 그리고 벌초때 어머니 슬하 자식네들과 손자, 증손 등 40여명이 모여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서 술 한잔 먹자며 부를 때처럼 곤혹스러울 때가 없다. 아, 우리집도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저렇게 모였는데, 이제 다시는 그런 날이 안오겠지, 하는 자격지심 때문이다.
예전 어른들 말이 틀린 게 없다. 대부분 형제들이 많으니 겨우 초등학교 밖에 가르칠 수 없는 게 현실이었다. 그런 형제들이 대도시에 나가 제 밥벌이들을 하며 고향에 부모님을 끔찍하게 아끼고 보살피는 일 말이다. 효자들이 따로 없는 것. “어머니 집에 보일러 놔드려야겠어요”라는 어느 며느리의 말이 광고멘트로 나와 히트를 친 적이 있었다. 재래식 아궁이를 고치고 보일러 놔드리는 자식들은 공교롭게도 대부분 가방끈이 짧았다. 반면에 대학까지 어렵게 가르치고 박사도 됐건만, 고향에 얼굴 한번 비깜(왕래) 한번 하지 않고 부모님을 쳐다보지 않는 집들도 많다. 우리집이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언제부터인가 고부갈등이 형제갈등으로 되고, 더 나아가 형제갈등이 깊어지면서 집안 전체의 복합적 갈등으로 확대된 셈이라는 것은 말할 수 있다. 쉬쉬한다고 덮어질 일도 아니고, 동네방네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을 굳이 부정할 필요는 없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아무튼, 그리하여 형제들이 추석 전 날짜를 정해 벌초를 하는 일이 어느해부터인가 사라졌다. 그러니 예전 농경사회때의 미풍양속인 ‘남매계’와 ‘사촌계’가 성립될 수 없는 것은 당연지사. 다른 집안의 남매계-사촌계 모임을 듣거나 볼 때마다 속상하는 건 이루 말할 수가 없다. 형제가 몇 명이나 된다고? 그게 안되고, 더 나아가 이제는 완전히 불가능하게 된 것일까? 생각하면 어느 누가 마음이 편하고 괴롭지 않겠는가? 이런 글을 남긴다는 것은 집안 망신이고 창피한 일이긴 하지만, 어찌 이런 불화와 비극이 우리집에서만 생기는 일이겠는가? 서로 속 있는 말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어쩌면 열 집이면 대여섯 집은 그런 듯도 하다.
어제 오후와 오늘 새벽 거의 4시간에 걸쳐 가족산소 벌초를 하며, 올해따라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리가 어지럽고 마음이 심란했다. 내년에는 내가 나서서 형제들이 모여 벌초를 하자고 해야겠다. 정히 형님들이 오지 않는다해도 작은집 두 동생과 함께하면 얼마나 보기에 좋을 것인가? 힘도 훨씬 덜 들고. 괜히 나에게 벌초하느라 애썼다며 10만원씩을 줄 필요도 없지 않겠는가. 남들 보기에도 좋은 일. 교통체증 등 편의를 봐 내가 혼자 해도 못할 것은 없지만, 1년에 몇 번이나 만난다고, 이 일을 빌미로 만나 함께 잠깐 땀을 흘리고 산소에 앉아 돌아가신 어른들에 대한 얘기꽃을 피우는 것만큼 아름다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조상을 섬기는 일이야말로 아직까지는 사람이 살면서 크게 내세울만한 대의명분일 터.
추석을 앞둔 엊그제 주말에. 효녀 세 딸들이 요양원의 아버지를 모셔와 당신집에서 하루 주무시게 하는 좋은 꾀를 냈다. 아버지는 이제 희노애락에 대한 어떤 표현도 하지 않으신다. 심지어 당신집에 와 좋다는 말씀도 안하셔 억지로 물으니 “그걸 말이라고 허냐?”고 반문한다. 툇마루에 앉아 1km쯤 떨어진 앞산을 바라보며, 소싯적 해마다 30리 산길을 혼자 걸어 벌초하러 다녔다는 말씀을 하신다. 세상에나, 열 살때부터 근 30년을 그렇게 ‘나홀로 벌초’를 하러 30리 산길을 걸어다녔다는 것이다. 당신이 태어난 곳은 장수군 산서면 백운리(동고지마을), 8살에 5대 독자인 아버지가 졸지에 30세로 돌아가신 것은 어쩔 수 없다치자. 참척을 당한 할아버지가 곡기를 끊고 식음을 전폐, 27세 며느리와 8살, 2살 손자를 남겨둔 채 5개월만에 아들을 따라 먼길을 가셨다는 게 건 또 무슨 얘기인가. 청상과부 할머니는 할 수 없이 두 아들을 앞세우고 남동생들이 사는 친정(임실군 오수면 봉천리 냉천마을)으로 이사를 와 터를 잡았다했다. 지금 열 살이면 애기가 아닌가. 그 어린 나이에 어머니가 시킨다고 낫을 들고 왕복 60리 산길을 걸어 벌초를 30년동안 했다는 게,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 그런 아버지, 당신의 아버지와 할아버지, 두 분이 사신 90년보다 현재도 8년이나 더 사시고 있다. 정말로 하늘이 안타까워 명을 늘려주신 덕분에 120세를 사실 것인가?
상할아버지(증조)와 할아버지, 할머니와 어머니 봉분을 이발해드리며 속으로 빌었다. 우리 아부지 고생할 만큼 고생했고, 천수도 누릴 만큼 누리셨으니 그저 제발 아프지 않고 잠자듯 돌아가시게 해주시오. 희노애락 표현도 못하실 만큼 ‘멍한’ 할아버지가 되셨으니, 우리 자식들이 보기에도 안타깝고 짠하고 민망하여 어쩔 줄 모르겠소. 1세기에서 10년 빠지는 90년 동안 홀어머니를 모시고 6살 아래 남동생 그리고 4남3녀 총생들 낳아 기르고 가르치며 제금(결혼 분가)까지 내주시라 참말로 애쓰셨잖소? 이제 이만하면 편하게 모셔가는 게 어르신들이 할 일이 아니겠소? 제발 하루빨리 그리 해주시오. 저렇게 사시는 건 더 큰 고생이 아니겠소? 저는 최소한 그렇게 생각합니다.
벌초를 하면서 내내 든 나의 생각이 나쁜 것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오래 사시다보면 생각지도 못한 참척 등 흉하거나 나쁜 일들도 겪을 수 있다는 게 두렵다. 딱 지금쯤이면 아직까지 아주 크게 나쁜 일을 겪지 않았으니 다행이지 않은가. 정말로 한 생을 잘 사신 게 틀림없는 이 마당에 조용히 눈을 감으신다면 아버지의 일생은 ‘아름다운 마감’을 하는 게 아닐까? 슬하의 많은 총생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둔 김대중 선생의 임종처럼 ‘나 잘 살다 간다. 너희도 행복하게 살다 오라’는 유언을 해도 좋고 못해도 좋지만, 나는 아버지가 내년 백수까리 누리시고 돌아가시기를 소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