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형 ‘컨니’의 추억
다정했던 사나이 우리 형 27주기(周忌)를 추모하며
가족사진 속의 고교시절 형님
명세 형님! 1945년 음력4월3일 홍천에서 해방둥이로 태어나 만 50년도 안 살고 1995년 음력 3월7일(양력4월6일) 일찌감치 하늘나라로 가신 형님은 우리 김 씨네 명(明)자 돌림 남자만 5형제의 장남이셨다.
올해 4월7일(음력3월7일)이 27주기나 된다. 남겨졌던 15살 딸과 13살 아들이 40을 넘어선 세월이다. 딸 영주가 7월2일 결혼을 하게 된다. 미망인 형수와 아우 4형제는 물론 제수씨들 조카들 모두 축복하며 잔칫날을 행복하게 기다리게 됐다. 혼기 지난 조카들 걱정에 면목 없이 형님 기일을 맞이했던 아우들도 올해는 가벼운 마음으로 추모하게 됐다. 코로나의 기승으로 기제사 모임이 어려워 안타깝다. 남겨진 아우들 중 맏이로서 무얼 해줄 수 있을까? 명세 형님에 대한 진한 추억들을 소환해 엮어냄으로써 뜻 있는 추모이면서, 시집가는 조카 딸 영주에 대한 결혼 선물로 삼아야 하겠다는 생각에 형님과의 추억 속으로 달려간다.
명세 형님은 1950년대 후반 우리 형제들 사이엔 ‘컨니’로 불렸다. 그 시절 서울에선 형을 언니라 했고 맏형이니 ‘큰 언니’란 뜻이었다. 둘째인 나는 작은 언니를 줄인 ‘짠니’였다. 물론 다 내 아래 세 아우들이 그리 불렀다.
내 기억 속의 형에 대한 첫 추억은 1955년 내가 충북 단양국민학교 고평분교에 갓 입학한 때부터다. 1952년 경북봉화 우구치 금정에서 금광을 하시던 선친이 잠시 서울 돈암동 미아리고개 쪽과 서대문 동양극장 뒤에 살다 단양으로 내려가 형석광산(현재 단성면 고평리 안골) 덕대를 하시느라 시골에 살던 우리와 달리, 형은 서울 왕십리 행당동(무학여고 뒤편) 적산가옥(? 옥외테라스에 포도가 걸리고 작은 원추형 목욕탕이 있어서 그리 기억)에 살던 고모 네에 남아 국민학교에 다니며 방학 때나 내려오던 시절이다. 편지로 통했는지 형이 내려온다는 날엔 1km 이상 거리의 신작로까지 마중 나가 나타나기까지 마냥 기다렸다. 형 보기가 엄청 즐거웠다. 떨어져 사니 반갑기도 하지만, 취학 전부터 홍길동 모양의 초립동이와 담뱃대 등을 잘 그려 동네 어른들로부터 칭찬받던 나로선 형이 서울에서 선물로 사오는 만화책을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멀리서 서로 확인되면 형은 쪼그려 앉아 만화책으로 얼굴을 가리고 나를 부른다, 굴러가듯이 달려간 나는 만화책부터 나꿔챈다.
단행본이라기보다는 만화세계 만화왕 같은 종합만화잡지였던 것 같다. 기억나기로는 우선 동명의 영화를 각색했던 것인지 “형제는 용감하였다” 가 있다. 주인공은 외국인들인데 2차 세계대전일까? 전쟁에 함께 출정해 헤어져 죽은 줄 알았는데, 브라질 아마죤 정글애서 다시 만난다는 줄거리였다, 역시 번안 만화인지 밀림에서 큰 뱀을 타고 다니던 철민이가 주인공이었던 정글북인지 밀림의 왕자인지 밀림의 북소리였던 지가 있었다. 잊을 수 없는 생생한 추억이다.
이 첫 기억 이전 형님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많지만, 내게는 모두 형님 당사자나 부모님과 고모님 네에서 전해들은 것이고 전설적인 것들이다,
내가 7살로 기록되는 그 때 형은 11살이었는데 나보다 엄청 차이 나게 어른스러웠다. 그 나이에 서울과 단양의 광산촌 골짝 마을 고평까지를 혼자 왕래 했었으니 말이다. 한마디로 용감하고 영리하였다.
선친께서 1940년대 홍천 철정리 철광과 서울 왕십리지역의 자동차수리소, 1950년대 경북봉화 금정 금광, 상경 서울거주, 단양 형석광산, 합천 금·은·납·아연 광산, 삼척도계 탄광 등을 거치시느라 잦은 이사로 인해, 부모님과 떨어져 고모 네에서 학교를 다닌 날이 더 많았던 시절을 보냈다.
그러느라 국민 학교 6학년을 7개 학교를 다니며 보냈다고 했다. 그러니 전학이 다반사였고 갈 때마다 텃세에 시달렸지만, 워낙 완강해서 가자마자 기존의 최고 실력자 ‘이찌가다’(요즘 말로 캡짱)를 초전 박살내 버려 가는 곳마다 당시말로 ‘오야붕’(우두머리)의 자리를 차지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공부도 짱이었으니 믿지 못할 카리스마 넘치는 캐릭터였던 것이다, 그런 형이었다니 어린 나로서도 참 멋져 보여 늘 자랑스러웠었다.
보다 더 어렸던 1951년 1.4후퇴 때 대구로 피난 가서는 4살 위 사촌형이 다니던 천막학교에 생떼를 쓰며 쫓아가 같이 공부하겠다고 덤벼 선생님들을 당혹하게 했다는 당당함도 가졌으니 말이다. 유년이었던 나도 덩달아 같이 가겠다고 울고불고 했었다니, 그 이야기는 하도 많이 들어 한 동안 나의 어린 시절 추억으로 혼동할 정도였었다.
내가 직접 보기 시작한 11살 이후의 형은 참 조숙했었다. 방학동안 잠시 내려와서도, 담배를 말아 피기까지 하던 4-5살 더 많은 동네 젊은이들과 어울리고 다투면서도 결코 힘에서 밀린 적은 없었다. 나무도 함께 하고 옥로를 놓아 산토끼를 잡던 동네 효자 절친도 사귀었을 정도이다. 모친이 전해주던 형의 힘은 선친이 금광을 하던 시절 어려서부터 인삼 녹용 등의 보약을 많이 먹어서 그렇다고 했었는데, 고평에서 한 번 열병을 앓으면서 피를 엄청나게 쏟아버린 이후로는 많이 소실되었다고 했다, 그럼에도 이후로 형의 완력과 카리스마는 고교시절까지 유지되며 변함이 없었다.
1956년도 합천군 삼가면 가회로 이사해서는 형도 서울에서 내려와 가회국민학교를 함께 다녔다, 내가 2~3학년, 형이 5~6학년이었는데, 여기서도 카리스마를 발휘해 살던 동네 덕촌 학생들의 등교 인솔을 형이 맡았다, 비가 내리면 넘쳐 위험한 개천 징검다리 건너기를 슬기롭게 지휘해 학교 선생님들로부터 칭찬받으며 신임도 두터웠다.
중학교도 입시를 통해 진학하던 당시 6학년 때에는 공부도 코피 터지게 열심히 했다. 지방 가회국민학교에서 한국 최고 일류 서울의 경기중학교를 목표로 했으니 말해 무엇 하겠나? 방학 중에도 담임 선생님의 집을 멀리 오가는 특별 과외도 했었는데, 홍수로 넘치는 징검다리를 건너고 눈보라 치는 혹한의 겨울에도 한 번도 쉬지 않았고, 당시 박우사가 펴낸 전과지도서를 통째로 외워버리는 열정을 보였다, 나 역시 학년 전교 1등에 급장이었었지만 형의 지독한 공부 열정에는 혀를 내두르며 탄복했었다,
형의 그 실력이면 경기중학교 입학이 충분히 가능했었지만 1958년 선친이 강원도 삼척 도계탄광으로 이직해 이사를 하게 되면서 경기중학교 진학의 꿈은 아쉽게도 접고 도계중학교에 진학하게 되고 말았다. 당당하게 1등으로.
도계중학교에서 형은 공부에서도 완력에서도 모두 출중했다. 도계의 민영탄광 동원탄좌 달전광업소 소장이신 선친은 그곳 중학교와 국민학교에 상당한 후원도 하는 유지의 위치에 계셨었으니, 형이나 나나 학교에서 기가 살아도 한참 살았을 시절이었다.
하교 시의 형은 집에 그냥 오는 법이 없이 읍내로 가서 친구들과 어울리고 귀가했는데, 형의 가방은 우리 집 광산촌보다 더 골짝에 사는 동급생이 먼저 가져다 놓는다. 당시엔 상용하던 일본말로 ‘가방모찌’(요즘 뜻으론 부하 졸병이나 비서라 할까?)가 따로 있었던 것이다. 물론 힘 약한 동급생을 괴롭히는 깡패학생은 아니고 어려운 친구들을 보살피며 가진 여유로 인정도 많이 베푸는 정의로운 의혈남이어서, 친구들이 많이 따랐다고 보는 게 정확했다.
그러니 동생들에게 당시 ‘컨니’로 불리기 시작했던 문무 겸비해 잘난 형은 참으로 든든하며 자랑스러웠었다.
형은 5형제 중에 키가 작고 납작 동그란 얼굴에 콧날도 낮은 2,3,4째와 달리 그곳 도계에서 태어난 막내와 함께 키도 크고 갸름한 얼굴에 콧날도 우뚝한 미남형이어서 여학생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다.
도계중학교 들어가던 입시에서 1등인 형 다음으로 2등을 했었으며, 내가 장성에서 열린 삼척군 관내 학생웅변대회 도계초등학교 대표로 나갈 때 도계중학교 대표로 나섰던 여학생(이름은 잊은)이 내가 형의 동생이라니 내내 나를 알뜰살뜰 보살펴 주었었는데, 내게 형 이야기를 어찌나 묻고 반복하던지, 어린 내가 보기에도 그 누나의 형에 대한 호감이 각별했던 것으로 기억난다.
도계중학교를 졸업하는 형은 고등학교는 결국 서울로 유학 갔다. 당시 사립 고등학교에서 새로운 실력자로 떠오르던 대광고등학교에 당당하게 합격했던 것이다. 방학 동안 서울 고모 네에서 입시 학원에도 다니던 노력의 결실을 본 것이지만, 지방의 중학교에서 서울 고등학교에 합격했다는 건 그만큼 형의 두뇌가 명석했고 기본실력이 탄탄했었음을 보여준 것이다.
도계국민학교에서 줄곧 학년 1~2위를 달리며 반장을 하던 나는 자만해 입시공부 한 번 하지 않고 형이 진학한 대광고등학교와 한 울타리 안 대광중학교에 응시했다가 미역국을 먹고 만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신설동 고모네에서 잠시 사귄 친구들은 덕수, 수송 등 당시 일류 초등학교출신으로 1차인 경기·서울·경복중학교에 응시하다 실패해 2차 중 제일 세다는 대광중학교를 노리고 있었는데, 내가 감히? 1차도 보지 않고 바로 2차를 노리다니 게임이나 되는 소리였던가?
대광고등학교를 들어간 형은 탄탄한 중학교 시절의 기본실력으로 서울출신 동급생들에 못지않게 여전히 공부와 운동 모든 면에서 우수하게 성장해 갔었다. 친구들도 많이 사귀고 당수도도 배우면서 명석하고 건강하며 강단과 의리 넘치는 청년학생이었다. 2학년에 오르는 1962년 2월 초 우리 어머니가 갑자기 세상을 뜨시기 전까지는~~! (계속)
2022년 4월7일 27주기를 맞는
우리 형을 추모하며
아우 명수가
첫댓글 一鼓! 감명스럽게 잘 읽어보았소.
항상 명석하고 특출한 천재라 생각했지만 이 글을 보니 감히 흉내내기 어려운 창안이라 생각되오.
해방후 1970년대까지 우리의 삶이 어떠했는지 짐작이 가오. 이제 우리는 종심을 훌쩍 뛰어 넘었으니
무슨욕심이 있겠소. 앞으로 무엇을 하겠다는 생각보다는, 오히려 힘들었지언정 아름다운 지난날을 회상하는것이 큰 행복이 아니겠소. 과거는 언제나 찬란해 보인다는 말이 이제 실감이 납니다.
개인적인 상황에 필요해서 적게된 개인적인 이야기라 면구스러웠었는데 이리 좋게 봐 주시니~ 그저 읽어주신 것 만으로도 고마운 마음 어쩔 바를 모르겠습니다.
우리 인팔이 형님과 같은 해방둥이시네.
오래전의 일을 회고하여 형님을 되살려드린 이런 일은 세상 어느 누구도 못할 일일걸세.
우리시대의 소중한 역사가 될 것이네.
훌륭한 형님을 두셨어.
여러 아픔들이 우리네 삶에는 언제나 함께 하지만
이제는 그러겠거니 받아들여야 되겠지.
부모님도 형님도 떠나시고 또 언젠가는 예고없이 우리도...
모두 잘 즐기면서 사시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