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734
1월13일[연중 제1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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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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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H5yRmgZTt5c
[수원교구 조봉익 도미니코 신부님 집전 (중견사제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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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의 죄와 허물보다는 미래와 가능성에 더 초점을 맞추시는 예수님!>
오랜 세월 보육원에서 사목하신 수녀님께 전해 들은 이야기입니다. 수녀님이 키우신 한 아이가 주먹 세계의 큰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 번씩 전화를 준답니다.
“수녀님, 저예요. 힘든 일 없으신가요? 도와드릴 일 있으면 언제든 전화 주세요.” 참으로 특별한 상황 앞에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난감하답니다.
언젠가 한 건물에 들어갔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새까만 정장 차림의 어깨들이 입구부터 시작해서 나란히 줄지어 서 있었습니다. 얼굴들도 한결같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 사이를 걸어 들어가는데, 저도 모르게 주눅이 들었습니다. 가만히 보니 조폭 두목쯤 되는 사람 부모님의 축하연 자리였던가 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알패오의 레위를 당신 제자로 부르시는데, 그는 세관에서 일하던 세리였습니다. 예수님 시대 세리들의 삶은 오늘날 조직원들과 유사했습니다. 각종 이권에 개입하고, 자릿세 받고, 고리대금업에 손도 대고, 과도한 이자 부과로 사람들 괴롭히고...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레위는 분위기상 말단 세리가 아니라 중간 보스 정도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큰 형님’에게 거금을 상납해서 일정 담당 구역을 담당하게 되었는데, 그 담당구역을 돌며 마음껏 부를 축척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세리들의 악명은 하늘을 찔렀습니다. 백성들을 그들을 두고 공공연하게 ‘도둑’이라고 칭했습니다. 상종하지 말아야 할 인간으로 첫손가락을 꼽았습니다. 얼마나 사람들을 들들 볶아대던지 ‘세리가 다가오면 집의 기둥이 공포에 덜덜 떤다.’는 말까지 돌았습니다.
더구나 유다 민족들은 징수된 세금이 식민지 지배자 로마로 흘러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세리들을 매국노, 배신자, 배교자로 칭했으며 재판에 증인으로 서는 것조차 금했습니다.
이런 세리의 두목인 레위였는데, 예수님께서는 레위를 당신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이 모습을 본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깜짝 놀랐습니다. 어떻게 저럴 수가, 어떻게 저 사람을 제자로 삼을 수가, 하며 혀를 내둘렀습니다.
참으로 파격적인 예수님,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예수님의 인선이었습니다. 인간 말종으로 여겨지던 세리, 공공연한 도둑, 매국노 레위에게 당신 구원 사업의 한 축을 담당하도록 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참으로 큰 위안을 받습니다.
더 놀랄 일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세리라는 직업을 떠나 예수님의 제자가 된 레위를 위한 송별식이 벌어졌습니다. 그야말로 조폭들의 파티였습니다. 그 잔치에는 당대 내놓으라는 지하 세계 인생들은 다 모였습니다.
참으로 부담스런 자리, 너무나 껄끄러운 자리가 분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태연히 그들 사이에 자리를 잡고 앉으십니다. 완벽하게 그들과 동화되십니다. 한 가족이 되시고, 절친이 되십니다.
예수님의 말구유 탄생 때 보여주신 그 지극한 겸손이 예수님 생애 내내 계속되고 있음을 잘 알 수 있는 광경입니다. 계급과 신분 사이의 벽을 완전히 허무시는 예수님, 격식 따위는 안중에도 없으신 예수님, 우리의 죄와 허물보다는 미래와 가능성에 더 초점을 맞추시는 예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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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행위로 구원받는다고 가르치면 실질적 무신론자가 탄생한다>
이무석 교수의 책에서 ‘작은 눈 콤플렉스’를 지니고 있던 한 여자의 사연이 소개되었습니다. 그녀는 돈도 잘 벌고 명예도 얻은 우리나라의 유명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남편이 술집 여자와 외도를 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분노를 견딜 수 없어 뭐 그리 잘난 여자인지 얼굴 한 번 보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꿈에 그 여자가 나타난 것입니다. 눈이 매우 크더랍니다. 이 이야기를 하며 이무석 교수에게 정신치료를 받았습니다.
이무석 교수는 “혹시 눈이 작은 콤플렉스가 있습니까? 무의식적으로 남편이 그 여자가 눈이 크기 때문에 좋아하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눈 작은 콤플렉스가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쌍꺼풀이 없을 뿐 실제로는 눈이 작지도 않고 예쁜 얼굴이었습니다.
눈에 대한 콤플렉스가 생긴 것은 동생 때문이었습니다. 딸 둘인데 자신은 첫째고 둘째가 태어났을 때 소외감을 느꼈습니다. 아빠가 둘째만 좋아하는 것 같아 마음이 상했습니다. 그리고 동생이 아빠처럼 쌍꺼풀이 있기 때문이라고 결론지은 것입니다.
그녀는 아빠의 관심을 끌기 위해 동생도 잘 돌보고 공부도 잘 하고 좋은 대학에 가서 돈도 많이 벌게 되었습니다. 무엇이든 1등을 놓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아빠는 동생만 좋아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니 아빠로부터 충분히 받지 못했던 사랑을 남편에게 강요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은 자녀의 자존감과 직결됩니다. 부모의 사랑은 자녀에게 얼마짜리라고 가격을 매겨주는 것과 같고 자녀는 그 가격을 믿고 그 가격만큼 살아갑니다. 사랑을 못 받았다고 믿으면 그 떨어진 자존감을 행위로 채우고 극복하게 됩니다.
이렇게 부모의 사랑에 대한 믿음이 확고하지 않으면 ‘행위’에 치중하는 사람이 됩니다. 하느님 사랑에 대한 믿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결과가 발생합니다.
며칠째 계속 저의 책에 대한 어려움을 토로하시는 분들을 위해 설명해 드리고 있는 점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구원은 하느님의 존재를 믿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본성인 하느님의 자비를 믿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믿게 되면 자신이 하느님임을 믿게 되고 그러면 굳이 행동으로 자신을 하느님처럼 높이려 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하느님임을 믿지 못하니 이런저런 행동으로 하느님 자녀‘처럼’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를 바리사이-율법학자의 수준이라고 합니다.
인간이 노력으로 하느님처럼 될 수 있었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필요가 없으셨을 것입니다. 구원은 행위에 집중해서는 안 되고 하느님 자비에 대한 믿음에 집중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 자비에 대한 믿음을 주는 사랑의 표징입니다. 그러니 구원을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세리 레위를 부르시고 그의 집에 들어가시는 것을 심히 불쾌하게 여깁니다.
율법을 잘 지키는 자신들은 무시하시고 죄만 짓는 세리와 죄인들과는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율법을 지키고 선한 행위를 하는 것이 구원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들에겐 예수님이 필요 없어집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되는 것이지 단순한 율법준수로 구원되지 않습니다. 바오로 사도도 이렇게 말합니다.
“어떠한 인간도 율법에 따른 행위로 하느님 앞에서 의롭게 되지 못합니다.”(로마 3,20) 그런데도 자칫 교리를 가르칠 때, 이러저러한 규정들을 잘 지키면 구원에 이를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희생을 필요로 하지 않는 실질적인 무신론자가 탄생하게 됩니다.
우리 구원을 위해 우리 믿음의 공로 외에 더 요구되는 행위는 없습니다. 그래서 세례를 받고 바로 죽은 아기들이 선한 행위가 없어도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사실 사람은 율법에 따른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우리는 확신합니다.”(로마 3,28)라고 말합니다.
또 “믿음에서 우러나오지 않는 행위는 다 죄입니다.”(로마 14,23)라고 말합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의 선행은 다 자기 자신을 위한 의도에서 나오는 이기적 행위입니다.
마지막으로 바오로 사도는 “율법에 따른 행위에 의지하는 자들은 다 저주 아래 있습니다.”(갈라 3,10)라고 경고합니다. 혹자들은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 2,17)라는 말씀 때문에 믿음보다 실천이 중요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아기가 자신이 부모처럼 될 수 있다고 믿으면 곧바로 걸음마와 옹알이를 시작합니다. 이처럼 만약 믿음이 들어왔다면 실천이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실천은 믿음에 따른 자연스러운 행위지 선행을 해야만 구원받기 때문에 억지로 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와 세리가 성전에서 기도하는 내용을 비유로 말씀하신 적이 있으십니다. 바리사이는 율법을 잘 지킨 것을 주님 앞에서 감사하게 여기며 마치 율법을 잘 지킨 것이 하느님 앞에 의롭게 되는 길인 것처럼 믿었습니다. 아마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네가 율법을 잘 지켜 구원받을 수 있었다면 내가 내 아들을 뭐 하러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야 했겠느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써 우리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 아들처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인간에게 당신 아드님의 살과 피를 내어주심으로써 인간도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될 수 있음을 믿게 하셨습니다.
인간은 오로지 하느님의 자비만을 믿음으로써 구원에 이릅니다. 그래서 세리는 고개를 들지 못하고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라고만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루카 18,14)라고 말씀하십니다. 행위에 집중하게 만드는 교리교육에서 벗어납시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상관없는 구원을 추구하게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구원이 “이렇게 은총으로 되는 것이라면 더 이상 사람의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으면 은총이 더 이상 은총일 수가 없습니다.”(로마 11,6)라고 했습니다.
구원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에 의해 옵니다. 행위는 믿음의 그림자와 같습니다. 교리교육의 핵심은 믿음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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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인터넷 세상의 힘을 실감한 경험이 있습니다. 운동 중에 한 분이 핸드폰을 분실했습니다. 날은 어두워지고 난감한 상황이었습니다. 요즘 핸드폰은 예전에 허각이 ‘천 년을 살아도 그대 사랑하는 마음뿐인 바보 였죠. 그대 핸드폰이 난 너무 부럽습니다. 지금도 니 옆에 같이 있잖아요.’라고 노래했던 것처럼 모두가 소중하게 여기는 필수품이기 때문입니다. 신부님 한분이 찾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애플에 접속해서 비밀번호를 입력하니 핸드폰의 위치가 지도 위에 깜빡거렸습니다. 우리는 어두운 밤이지만 알람을 울려주는 핸드폰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사무실 복사기의 토너를 갈아야 했습니다. 저도 직원도 방법을 몰라서 고심하고 있었습니다. 함께 지내는 신부님이 문제없다고 하면서 복사기 토너 가는 법을 검색했습니다. 친절하게도 복사기 토너를 가는 동영상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동영상을 보면서 쉽게 토너를 갈았습니다. 이번에는 제가 직접 경험한 일입니다. 블루투스 이어폰이 잘 들리다가 한 쪽이 들리지 않았습니다. 새로 사야 하나 걱정이 컸는데 인터넷 검색을 해 보았습니다. 정말 친절하게도 해결 방법을 알려주는 글이 많았습니다. 인터넷에 올라온 방법대로 하니 양쪽이 모두 잘 들렸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사울은 잃어버린 암나귀를 찾아 길을 떠났습니다. 사울은 종과 함께 에프라임 산악 지방을 돌아다니고, 살리사 지방도 돌아다녔지만 찾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사알림 지방까지 돌아다녔는데 거기에도 없었습니다. 다시 벤야민 지방을 돌아다녔으나 역시 찾지 못하였습니다. 인터넷 검색의 시대가 아니었기에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사울은 사무엘을 만났습니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기름을 부어주면서 사울에게는 새로운 사명이 있음을 알려주었습니다. 사울에게 중요한 것은 잃어버린 암나귀가 아니었습니다. 이제 사울에게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을 다스리고, 원수들의 손에게 구원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오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그것이 율법에 어긋나는 죄가 되는 것은 아닌지 따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을 합니다.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죄가 되고 안 되는 것을 따지는 엄격함은 있었지만, 죄인을 이해하고 함께 받아들여 더불어 살아가야하는 하느님의 자녀임을 생각하는 너그러움이 부족했습니다. 세상을 흑과 백으로 나누는 것은 잘하지만 세상은 다양성 안에 모두가 조화를 이루면 살아야 하는 공동체라는 것은 몰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주 인상적인 대답을 해 주셨습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가난한 이들, 죄인들, 병든 이들, 외로운 이들, 굶주린 이들, 마귀 들린 이들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하는 것이 ‘참된 행복’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에게 해 주는 것이 바로 예수님께 해 주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를 차지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이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배우고, 율법을 가르치는 진정한 의미를 알려주셨습니다. 굳이 인터넷 검색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진리입니다. “주님이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게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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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2,13-17: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예수께서는 돈벌이에 대한 탐욕으로 가득 찬 레위가 세관에 앉아있는 것을 보셨다. 그가 받은 새 이름은 마태오였다. 마태오라는 이름은 선물 받은 사람이란 뜻으로 거룩한 은총의 위대한 선물을 받은 사람에게 어울리는 이름이다. 그는 탐욕에 젖은 세리를 떠나 주님을 따른 사람이다. “나를 따라라”(14절). 이 말씀은 당신을 닮으라는 말씀이다. 발걸음으로 그분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생활방식을 따르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머문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기도 그분께서 살아가신 것처럼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1요한 2,6) 이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다.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14절) 주님의 명령 한 마디에 마태오가 모든 것을 버리고 빈털터리이신 주님을 따랐다. 예수께서는 마태오를 부르시고 그와 함께 식사하시면서 많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하셨기 때문에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을 비난한다. 예수께서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17절) 말씀하신다.
그분은 의로운 이들을 건강하다 하시고, 죄인들을 병들었다 하셨다. 여기서 문제는 건강하지도 않으면서 스스로 건강하다고 생각하여, 의사를 찾지도 않을 뿐 아니라 성가시게 여기며 때리기까지 한다. 자기 병을 제대로 알고 고치기 위해서는 그만한 고통이 따른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13) 우리는 누구도 완벽하게 의로운 사람은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의인이 되도록 기도해야 한다. 우리가 간절히 바라고 그렇게 노력하면 그렇게 되어 갈 것이다. 여기서 필요한 것이 성령의 은총이다. 성령의 은총으로 치유되고 도움을 받지 않으면 그러한 일이 이루어지기는 힘들 것이다. 예술가가 투박한 돌을 아름답게 조각하여 멋진 예술작품을 만들어 낸다. 그래서 그 돌을 귀하게 다룬다. 예수께서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까닭으로, 조각가이신 주님께서는 우리를 투박한 돌을 보시듯 하신다. 투박한 돌이 아니라, 앞으로 만드실 작품을 생각하시며 우리를 사랑하신다. 온전히 그분의 말씀을 따르도록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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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전교구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내가 정말 기뻐하는 것이 악인의 죽음이겠느냐? 주 하느님의 말이다. 악인이 자기가 걸어온 길을 돌아서서 사는 것이 아니겠느냐?”(에제 18,23) 하느님께서는 에제키엘 예언자를 통하여, 죄인들이 당신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죄인들도 당신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결코 포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일 죄인들이 하느님께 돌아가는 법을 잃어버렸다면 어떻게 될까요?
오늘 복음에서 레위는 세관에 앉아 있었습니다. 세관은 레위의 일터였습니다. 돈으로 죄를 저지르는 장소였지만, 또한 살아가려면 큰 각오 없이는 떠날 수 없는 곳이기도 하였습니다. 죄와 적당히 타협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벗어날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레위에게 찾아오십니다. “나를 따라라.” 이 말씀과 함께 레위의 삶은 예수님과 함께하는 삶으로 바뀝니다. 회개하는 법을 잃어버린 죄인들, 어쩔 수 없이 죄에 머물 수밖에 없는 죄인들, 예수님께서는 그런 죄인들에게 찾아오시고, 그들을 부르십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벗어나기 힘든 죄 안에 있다면, 예수님의 이 말씀을 꼭 기억하였으면 좋겠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 부르고 계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할 일은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용기 내어 우리 영혼의 의사이신 예수님께 나아가십시오. 비록 이렇게 죄를 지었어도 여전히 사랑받고 있으며, 하느님께서는 단 한 순간도 여러분을 잊으신 적이 없음을 깨닫게 하여 주실 것입니다. 이 신비가 고해성사 안에 온전히 담겨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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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이철구 요셉 신부님]
<회개의 삶>
사제로 살아가면서 느끼는 보람 중 하나가 고해성사를 보는 교우가 진정으로 회개하며 눈물을 흘릴 때입니다. 하느님께 용서를 청할 자격도 없다며 눈물을 흘리는 교우를 접하면서 저 역시 반성할 것이 많은 죄인이라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죄인인 제가 그의 죄를 용서해 줄 수 있는 것은 주님께서 사제 직분 안에 맡겨 주신 은총의 선물 때문입니다.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주님의 말씀은 세상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큰 희망으로 다가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 자비에 의지하지 않고는 구원 받을 수 없는 우리이기에 의인이 아닌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주님의 말씀은 우리의 삶을 회개의 삶으로 이끄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죄인을 부르시는 주님께 우리가 응답할 수 있는 것은 회개의 삶을 통해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이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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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도회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의사는 병자들 속에 산다.>
의사들이 종일 만나는 사람은 병자들입니다. 병자를 만나기 싫어하거나 만나지 않으면 존재 가치가 없습니다.주님은 죄인을 구하려 오시였으니 죄인들 안에 있어야 죄인들의 구원이 가능합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려 왔다.”
선생은 학생들을 가르치고 바른길로 인도하기 위하여 학생들과 함께 있어야 합니다. 교회의 존재 이유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데 있고 온 인류에게 하느님의 뜻의 전달자이며 죄악을 가득한 세상을 구하기 위해 있습니다.
북쪽에 참다운 인간다운 삶이 없고 젊은 지도자가 자기 뜻대로 세계인류에게 공포와 무질서를 주는 것은 종교적 신념이 없이 인간의 탐욕 불의 부정만 있어 국제 세계와의 불통의 상태만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현실은 오늘 남쪽에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여행하다 보면 십자가 없는 동네가 없고 그것도 하나둘이 아니라 밤이면 작은 읍에도 수십 개의 종탑과 십자가가 있으며 골짜기마다 절이 없는 곳이 없으며 종교천국입니다. 그런데 이 나라는 어디로 가는지 갈 길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이 권력에 편승하고 재력에 눈을 돌리고 공명심에 빠져 있는 한 가난한 과부의 돈으로 큰절 큰 교회당 큰 성당을 짓고 세를 과시하는 한 고통과 가난과 불의와 불평등의 억압에서 힘들게 살고 구원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절망과 좌절감만 심어 줍니다.
또한 정치지도자나 교회 지도자나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 속에 살고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과 협력하고 함께 하고 자기를 비난하는 사람을 물리치고 배신자, 비협력자로 낙인을 찍고 물리치는 사람들은 선한 공동체 안에 살 수 없습니다.
인간은 의존하고 살며 의존하는 가운데 충돌이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그 충돌을 피하기만 하면 일치는 불가능합니다. 충돌을 서로 대화나 서로 인격적 관계로 풀어나가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너 내 마음에 들지 않은다고 미워하고 떨어져 나가는 사람은 마음의 가난이 결여된 사람이며 겸손과 온유를 잃어 교만과 독선과 억압과 독재적 정신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저는 바리사이 같은 정신으로 죄인들 마음에 들지 않은 사람들을 물리리치는 삶이 아니라 주님과 같이 죄인들 안에 현존하시는 주님을 따라 사는 정치, 종교 지도자들이 많아지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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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2, 17)
형제들과 함께 살다 보면 어느 때, 제 눈에는 보이는 데 다른 형제의 눈에는 보이지 않나 봅니다. 아마도 보려고 하는 관심이 있거나 없거나 차이에서 그러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오늘 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길을 지나시다가 세관에 앉아 있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보시고 나를 따라라.”(2,14)하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길을 지나가시면서도 허투루 사물과 사람을 흘깃 스쳐보시는 것이 아니라 주의 깊게 바라보셨으며, 그 찰나적인 그 순간에도 ‘레위’의 마음 상태를, 그리고 무엇을 지금 갈망하고 있는가를 꿰뚫어 보셨기에 발걸음을 멈추어 그 앞에 섰던 것입니다. 길은 어떤 목적지에 이르는 수단, 통로이며, 그 길을 통해서 우리는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또한 우리와 똑같은 인생의 길을 걸으셨으며 그 길을 걸으면서 사람이 가야 할 길이 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길을 가다 멈춘 것은 길을 가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일어났기에 멈춘 것이라 봅니다. 신앙의 여정도 인생처럼 길을 걷는 것이지 멈추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레위’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닌 곳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일어나 길을 걸을 마음이 있다고 확신했기에 가시던 길을 멈추어 섰던 것입니다. 아버지의 집을 향하여 늘 길을 재촉하셨던 예수님께서 당신이 가고 있는 그 길에 함께 걷도록 ‘레위’를 부르기 위해서 발걸음을 멈추어 서신 것입니다.
사실 레위가 앉아 있었던 자리는 바로 세관이었습니다. 그는 세관에서 일하면서 어쩔 수 없이 가족을 부양하며, 먹고 살기 위해 세리로서 살아가고는 있지만 늘 상 그곳에 만족하지 못하고 행복하지 않았는지 모릅니다. 사는 게 죽을 맛,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은 그리고 매일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반복되는 일상에서 오는 답답함과 지루함, 그리고 삶의 무의미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런 레위의 속내를 꿰뚫어 보시고, 그런 그의 내적 갈등과 갈망을 알아차린 예수님께서 그 앞에 멈추어 섰습니다. 어쩌면 그의 모습에는 당신께서 치유해 준 중풍 병자와 같으면서 다른 형태의 무감각-무감격-무감동으로 일상에 마비되어 살아가는 그의 모습이 보였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미 몸에 익숙하고 또 다른 가능성이 자신에게 주어지리라 상상할 수 없었기에 숙명처럼 그렇게 매일 그 자리에 나와 앉아 있었는데, 그날 길을 가던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다가와 밑도 끝도 없이 대뜸 “나를 따라라.”(2,14)는 말씀이 벼락처럼 들려왔을 것입니다. 마치 아침잠을 흔들어 깨우는 자명종처럼 자신에게 들려 왔을 것입니다. 이는 지금껏 자신이 추구해 왔던 익숙한 안정과 평안을 향한 초대가 아니라 전혀 낯설고 불편하고 어려운 삶의 현실로 초대였습니다. 그런데 레위가 선뜻 아니요, 라고 거부할 수 없었던 것은 아마도 오랫동안 자기의 내면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었던 어떤 내적인 갈망과 갈증을 본인도 느껴왔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예수님을 따라나설 수 있었다고 봅니다. 어떤 그 무엇을 향한 레위의 내적 갈망을 꿰뚫어 보신 주님께서 그의 갈망에 불을 점화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초대를 받아들인 레위가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2,14)라는 표현에서, ‘일어나다.’는 것은 ‘부활하다.’는 의미와 동일한 뜻으로 죽음과 같이 영혼이 마비된 상태에서 새로운 삶으로 건너간다는 것을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물론 레위는 어디로 가는지, 어떤 길로 가는 것인지 아직 그 길을 알지 못했음에도 망설이지 않고, 오직 예수님만을 바라보면서 그분의 뒤를 따를 것입니다. 그 길은 분명 어제와 다른 진리와 생명의 길이며, 이로써 레위는 죄인에서 의인으로 다시 변화되어 가는 길에 들어선 것입니다.
아우슈비치의 대학살에서 살아난 임마누엘 레비나스는 ‘타자’라는 문제와 우리 삶을 향한 타인들의 요구를 종교의 궁극적인 문제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제일의 철학은 형이상학이 아니라 윤리학이라고 주장을 했었습니다. 즉 존재보다 더 근본적인 것이 있으니 곧 관계 안의 존재라는, 것입니다. 레비나스는 타자에 대하여 표현할 때, 사용한 은유는 얼굴입니다. 타자를 자신의 선입견과 기존 범주에 편입하려고 고집할 때, 우리는 상대의 얼굴을 지우고, 그의 본모습을 위축시키고, 그가 기여할 바를 축소시킨다, 는 것입니다. 우리는 타인을 자신의 이야기에 끼워맞추도록 부름 받은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이야기 속에 내주하시는 하느님을 만나고 체험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레비나스의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는 것을 보고,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2,16)라고 불평하고 비난하는 율법 학자들은 그들 곧 세리와 죄인들의 얼굴을 지우는 것이며, 또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선입견과 편견에 갇혀서 그들과 그들의 인생에서 함께 계시며 일하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거부하고 부정한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들으려는 관계 속에서만이 타인의 얼굴, 존재를 지우지 않고 하느님의 얼굴을 마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어울려 식사하시는 것은 결국 그들의 얼굴을 통해 보이지 않으신 아빠 하느님 얼굴을 보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관계 안의 존재로서 사신 가장 두드러진 모습이 바로 그가 혹 그들이 누구이든 관계하지 않고 함께 식사를 드셨다는 점입니다. 그분은 음식에 대한 배고픔보다 함께 식사할 사람들에 대한 배고픔이 있었습니다. 함께 식사하는 것보다 더 친밀하고 친숙한 사랑의 나눔과 교류 그리고 친교의 시간과 자리가 우리네 인생에는 없다, 고 보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온갖 밑바닥 인생들을 불러 모아 함께 식사 하셨습니다. 사랑스러운 자를 사랑하는 것이 무슨 대단한 일이냐고 물으십니다. 건강한 사람을 고쳐 주는 것이 무슨 성공이냐고 물으십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단지 율법 학자들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말합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2,17) 이를 증명하듯이 당신의 제자들을 안락하고 단란한 가정에서 불러내어 세리와 죄인들, 여자들, 아이들, 나환자들, 이방인들과의 관계 속으로 떠미셨습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이런 부류들의 얼굴을 지우고, 적대적인 담장 안에 가두며, 한 사람의 인간으로 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예수님께서는 이런 세상의 너무도 강한 편견과 선입견의 틀을 깨부수시기 위해 이렇게 강하고 무거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이런 저를 부르신 하느님의 자비를 알기에 저 또한 베드로처럼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루5,8) 고 고백하렵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저 자신을 잘 알기에 미사의 참회 부분에서 『죄인을 부르러 오신 그리스도님,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부분을 할 때, 『의인을 부르러 오지 않으시고 죄인을 부르러 오신 그리스도님,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경문을 바꿔 기도하는 까닭도 저 자신에 대한 자각에서, 그리고 그렇게 표현할 때마다 제가 불림을 받은 것은 의인이어서가 아니라 죄인이기에 부르셨고, 그 누구보다도 하느님의 자비를 더 필요로 하고, 하느님께서 이런 죄인인 저를 부르셨음을 다짐하고 마음에 간직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영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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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24년 주목하는 젊은 트랜드 중 하나가 ‘육각형 인간’이라고 합니다. 어떤 대상의 여러 가지 특성을 비교 분석할 때 사용하는 육각형 이미지를 ‘헥사곤 그래프’라고 합니다. 모든 기준 축이 끝까지 꽉 차 완벽한 모습을 보이면 정육각형이 되기 때문에 육각형은 완벽이라는 의미로 종종 쓰입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외모, 학력, 자산, 직업, 성격, 특기 등 모든 측면에서 흠이 없는 ‘육각형 인간’을 선망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가능할까요? 올해의 트랜드라고는 하지만 모든 부분에서 이렇게 완벽한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요? 완벽한 사람과 같이 있으면 불편하다고 말합니다. 그 완벽한 사람으로 인해서 자기의 나약함과 부족함, 불완전한 모습이 계속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한 후배에게 신학생 때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형은 너무 완벽해 보여서 싫어.”
가까이 하고 싶은데, 너무 완벽하게 보여서 가까이하기 힘들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맞습니다. 사람들은 약간 나사 빠져 보이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그 부족함을 보고서 “나도 괜찮구나.”라는 마음이 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처럼 완벽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왜 이렇게 부족하고 나약한 존재로 하느님께서 창조하셨을까요? 함께 살아가는 길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사 빠져 보이는 것 역시 괜찮습니다. 함께 살면서 그 부족함을 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겉으로 완벽해 보이는 모습만을 보이려는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자신의 부족함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겸손의 자세가 필요한데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리인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지요. 그 자리에는 많은 세리와 죄인 역시 함께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본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라면서 따지듯이 묻습니다.
사실 당시의 세리는 세속적이고 물질적으로 풍족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특히 로마 제국을 위하여 일하고 있었기에 매국노였고 그래서 부도덕한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심지어 거지들도 이들의 돈은 받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종교적 우월감에 가득 찬 바리사이들이 이들을 멸시하지 않았겠습니까? 이 멸시의 범주 안에 예수님까지도 집어넣었던 것입니다.
‘나는 옳고, 나와 같지 않으면 틀렸다’라는 교만을 예수님께서는 싫어하십니다. 그래서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라면서 부족함을 인정하는 겸손한 사람만이 주님과 함께할 수 있음을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지금의 ‘나’는 주님과 함께하고 있습니까? 교만한 사람은 주님까지도 내칠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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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넌 할 수 있단다>
마르코 2,13-17 (레위를 부르시고 세리들과 음식을 드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호숫가로 나가셨다. 군중이 모두 모여 오자 예수님께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그 뒤에 길을 지나가시다가 세관에 앉아 있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예수님께서 그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게 되었는데, 많은 세리와 죄인도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이런 이들이 예수님을 많이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리사이파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넌 할 수 있단다>
“나를 따라라.”(마르 2,14)
내가 부르는 나의 사람아
넌 할 수 있단다
나를 따르렴
내가 믿는 나의 사람아
넌 할 수 있단다
나를 믿으렴
내가 바라는 나의 사람아
넌 할 수 있단다
나를 바라렴
내가 사랑하는 나의 사람아
넌 할 수 있단다
나를 사랑하렴
내가 함께하는 나의 사람아
넌 할 수 있단다
나와 함께하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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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죄인을 부르러 왔다>
가능한 1개월에 한 번 정도는 고해성사를 보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늘 성사를 보면서 들어갈 때 마음과 나올 때의 마음이 다르다는 것을 느낍니다. 성사를 보고 나서 그 거룩해진 마음을 잘 지켜야 하는데 작심삼일입니다.
허물을 벗은 기쁨이 큰 만큼 더 열심히 살아야 하지만, 자유를 얻고는 곧 옛 모습으로 돌아가고 맙니다. 예수님과 깊이 만나지 못하고 그저 형식적이고 습관적인 신앙생활에 익숙해져 위선을 떨면서 여전히 사랑을 받으려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길을 가시다가 세관에 앉아있는 레위를 보시고 “나를 따라라”(마르2,14)고 말씀하셨습니다. 레위는 마태오라는 세리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세리는 세금 징수를 위임받은 사람입니다. 세리들은 이스라엘 사람으로 이스라엘을 식민 통치하는 로마인들의 하청을 받아서 세금을 거두어 바치던 사람입니다.
이들은 세무 당국과 계약을 맺어 세금을 징수했는데 정한 액수보다도 더 많이 거둬들여 차액을 착복하는 경우가 많았고 이들은 돈밖에 모르는 탐욕스러운 사람으로 따돌림받았으며 직책상 죄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민족적인 시각에서는 압제 세력인 로마에 빌붙어서 동족의 피를 빨아먹는 매국노요, 반역자입니다. 세리는 직업상 이민족인 로마인들과 가까이 지냈기 때문에 늘 부정한 상태에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경건한 이들은 그들과 상종하지 않았고 그래서 유다교를 올바로 믿으려면 세리 직을 떠나야 했습니다.
하필 그런 세리를 예수님께서 부르셨고, 더군다나 하느님과의 친교 자리를 상징하는 식사까지 하셨습니다. 깨끗한 사람만 참석할 수 있는데 죄인들을 그 자리에 불렀다면, 그것은 그들의 죄를 용서하신 행위입니다.
그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이기에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음식을 나누며 당신의 삶을 보여주셨습니다. 많은 세리와 죄인은 선택받아서 행복했습니다. 의인을 자처하는 바리사이파 율법 학자가 아니어서 행복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내가 죄인이기 때문에 나를 부르십니다. 내가 건강하지 않기 때문에 의사로서 오십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 2,17) 공개적으로 죄인 취급을 받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결코 주님의 부름을 받는 데는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
죄인을 끌어안으시는 예수님의 사랑이 세관에 앉아있던 레위의 인생을 새롭게 하였듯이 오늘도 구체적 삶의 자리에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내 처지나 상황이 어떠하든 상관없이 다양한 방법으로 나를 부르시고 당신의 모든 것을 주시고자 하십니다.
따라서 레위가 ‘일어나 예수님을 따랐듯이’ 내가 예수님을 따라나서면 인생이 바뀝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실천하면 행복을 차지하게 됩니다. 부르심에 응답하고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인생의 주관자이십니다. 그리스도인은 복음적 환경에서 살아야 하고, 복음적인 환경을 만들어 가야 합니다. 복음적인 삶을 살려면, 먼저 익숙하게 앉아있던 고정된 자리에서 일어나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누구를 따라나설 것인가? 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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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더불어(together) 주님을 따름의 여정>
-“성소(聖召)는 선물(膳物)이자 평생 과제(課題)입니다”-
며칠전 노트북 수리 후 원장 수사와 나눈 대화입니다.
“모든 답은 이 안에 있습니다.”
“컴퓨터 세계도 끝이 없네요.”
“끝까지 알려 할 것 없어요. 아는 만큼 살면 되요.”
새삼 버려야 할 걱정이요 욕심임을 깨닫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가톨릭교회도 많이 분열되어 있다 하네요.” “에페소공의회때는 얼마나 분열되어 있었는데요!” 심각한 분열이라 하는데 교황님의 일상이나 표정은 한결같고 평화로워보입니다. 분열의 일상화를 믿음으로 받아드리고 모든 근심 걱정을 주님께 맡겨드리며 편안히 사는 모습입니다. 분열중에도 역시 내적으로 일치되어 있는 것이 가톨릭교회의 저력입니다.
한밤중 일어나 맨먼저 확인해 보는 교황님 동향에 말씀입니다. 교황님께서 젊은이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가만히 있지마라, 위험을 감수하라. ‘위험, 쉬지 않음, 놀람’. 삶은 관리되는 것이 아니라 내주는 것이어야 한다.”
교황님께서 학생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가 얼마나 너희 마음을 차지하고 있는지 나눠라.”
세속의 선교 사제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세상을 위해서 세상안에 있어라. 그러나 세상의 것이 되지는 말라.”
89세 노령에도 쉴사이 없이 일하시는 영원한 젊음의 교황님 말씀에서도 활력이 넘칩니다. 새삼 젊음은 나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칠줄 모르는 열정에 있음을 봅니다. 어제에 이어 계속되는 마르코 복음과 사무엘 상권의 독서를 묵상하면서 순간적으로 떠오른, “아, 주님은 졸지도 잠들지도 않으시고 침묵중에 쉴사이 없이 참 부지런히 일하시는구나! 교황님은 이런 주님을 닮았구나!”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어제 금요강론중 내용도 잊지 못합니다. 심각하지 말고 낙천적이 될 것을 강조하는 성 베네딕도입니다 “수도생활이 어렵고 힘들게 느껴질 때라도 부드럽고 편안해야 한다. 까닭은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의 멍에를 메고 가는 일이기 때문이다.”
문득 떠오른 어제 맑시스트회원들에 대한 교황님의 격려 말씀입니다. “우리 아르티나사람들은 말합니다. ‘찌푸리지 마라, 뒤로 물러나지 마라.’ 다시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주저앉지 마라, 포기하지 마라, 더 나은 세상을 꿈꾸기를 멈추지 마라.’” 얼마나 멋진 용기를 주는 말씀들인지요!
우리 모두 주님께 불림 받아 더불어 주님을 따름의 여정을 살아갑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에 대한 구체적 답을 말씀드렸습니다.
유다인 랍비이자 신비가인 여호수아 헷쉘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나는 불림 받았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합리주의 철학자 데칼트와의 대조가 참 극명합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께 불림 받았기에 무명의 존재감 없는 삶에서 이제 하나하나 하느님의 자녀로서 유명의 존재감 충만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주님께 불림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얼마나 놀랍고 고맙고 반갑고 기쁜 일인지요! 말그대로 성소의 신비입니다. 어제는 중풍병자를 고쳐주신 주님은 오늘은 레위를 부르시니 참 분주한 일상이십니다.
주님은 길을 지나가시다가 길목에 위치한 세관에 앉아있던 세리 레위를 부르십니다. 길에서 길이신 주님을 기다리던 레위의 내적갈망을 한눈에 알아채신 주님이십니다. 주님께는 선입견도 편견도, 차별도 없습니다. 맨먼저 보시는 마음속 순수한 사랑이요 갈망입니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즉시 일어나 그분을 따르니, 바로 레위의 내적열망의 표현입니다. 주님은 혼자 외로이, 쓸쓸히 지내던 레위를 부르시어 당신 제자들의 식탁 공동체에 합류시킵니다.
이제 혼자가 아닌 더불어 주님을 따르는 여정이 시작된 것입니다. 마침내 운명이 바뀌어 이제 불림 받은 존재로 존재감 충만한 삶을 살게 된 레위입니다. 죄인과 세리들과 식사를 함께 하시는 것을 비판하는 바리사이파 율법학자들을 주님은 다음 말씀으로 제압해 버리니 참 통쾌, 유쾌, 상쾌합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영원한 감동을 선사하는 다음 복음 말씀입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우리가 잘나서 부른 것이 아니라 병자라 죄인이라 부르신 것입니다. 잘 들여다보면 모두가 병자요 죄인입니다.
얼마전 ‘요셉수도원이 아니라 요셉종합병원’이라 하며 속으로 웃은 일이 생각납니다. 저부터 시작하여 하나하나 아프지 않은 분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프고 부족한 사람들이 서로 돕고 사는 수도생활입니다. 참으로 병자이자 죄인인 현실을 겸손히 받아들일 때 회개와 더불어 주님의 용서와 치유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제1독서 사무엘 상권에서 주님은 사무엘을 통해 사울을 임금으로 부르십니다. 사무엘은 주님의 명령대로 기름병을 가져다가 사울의 머리에 붓고 입을 열어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당신에게 기름을 부르시어. 그분의 소유인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세우셨소. 이제 당신은 주님의 백성들을 다스리고, 그 원수들의 손에서 그들을 구원할 것이요.”
부르심의 선택은 그대로 은총의 선물입니다. 성소는 평생과정입니다. 한두 번 부르심에 응답이 아니라 평생, 살아있는 그날까지 시종여일 주님을 따라 닮아가는 성소의 여정입니다.
그래서 성소는 은총의 선물이자 죽을 때까지 평생과제가 됩니다. 불림받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진리입니다. 혼자가 아닌 더불어 주님을 따름의 여정입니다. 날마다 끊임없이, 한결같이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고 따라가면서 주님을 닮아가면서 참나의 실현입니다.
마지막 천국의 문턱에서 주님은 우리 마음의 얼굴이 얼마나 당신을 닮았나 검사하실 것입니다. 주님의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주님을 따름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줍니다. 늘 읽어도 늘 좋고 새로운 제 좌우명 고백기도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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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2,17)
<예수님을 따른 사람들!>
오늘 복음(마르2,13-17)은 '예수님께서 레위를 부르시고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드시는 말씀'입니다.
"나를 따라라."(마르2,14)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세관에 앉아 있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부르십니다. 그러자 레위는 일어나 예수님을 따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레위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게 되었는데,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이 식사 자리에 함께합니다. 그러자 바리사이파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투덜거립니다.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마르2,16)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2,17)
오늘 복음이 전하고 있는 것처럼,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을 많이 따르고 있었고, 예수님 주변에는 늘 이런 사람들로 넘쳐났습니다.
우리는 왜,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따라가고 있는가?
그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내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신앙 공동체는 죄인들이 모여있는 공동체이고, 그리스도이신 예수님 안에서 부활하는 공동체입니다.
신앙 공동체는 친목 단체가 아닙니다. 어떤 영업적 이익을 위한 영업 수단의 공동체가 아닙니다. 신앙 공동체는 믿음의 공동체, 희망의 공동체,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나의 잘남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아니라, 내가 죄인 임을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로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지금 여기에서 다시 태어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그리스도인들이 신앙 공동체 안에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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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LZFRZaLuM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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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 2, 17)
죄인을 먼저
찾아오시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주님께서는
병든 이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주님께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함께
나눠야 할
주님의 행복이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죄인들을
향하시고
죄인들은
주님을
향합니다.
죄인들의
시간 안에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들로
가득합니다.
주님께서는
기쁘게
죄인들을
만나십니다.
그래서
죄인들이
있어야 할 곳은
오직 주님의
사랑뿐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믿기에 죄인들은
주님과 함께
걸어갑니다.
죄인들에게
하느님 나라를
열어주시고
내어주십니다.
우리는
온실 속의
화초가
아닙니다.
풍랑과 광야를
체험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삶을 다시 시작하는
사랑의 자녀들입니다.
사랑받는 자녀들은
죄 속에서도
제일 먼저
주님께 열리고
제일 먼저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합니다.
죄인들에게
구원의 확신과
간절한 사랑을
각인시켜
주십니다.
오늘도
죄인들에게서
새로운 길을
만드시는
주님을 따릅니다.
사라지지 않을
영원하신
사랑과
함께하는
오늘의
행복입니다.
죄인들의
기쁨이며
죄인들의
참행복입니다.
죄인들이
행복하면
하느님 나라도
행복합니다.
죄인들의 눈물
죄인들의 회개로
예수님께서는
삶을 잔치라
부르십니다.
그 잔치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예수님과
우리자신입니다.
새로운 삶이
죄인들과
함께하시는
예수님의 식탁에서
시작됩니다.
죄를 먹고
사는 것이 아닌
사랑과 용서를
먹고 사는
우리들입니다.
사랑의
멋진 날이며
감사의
기쁜 날입니다.
마음을 다시
고쳐주시는
예수님께
우리의
모든 삶을
뜨겁게
맡깁시다.
죄인들도
하느님 나라의
진정한 백성임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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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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