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기도)
주님,
새날 주시니 감사합니다.
말씀 앞에 나아갑니다.
십자가 보혈을 의지합니다.
오염된 영혼을 정결케 하여 주옵소서.
오늘도 진리를 보고 기뻐 춤추는 영혼이 되게 하옵소서.
성령님, 의지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12.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13. 네가 어디에 사는지를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14.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15.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16.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1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본문 주해)
12~13절 : 버가모 교회의 사자(심부름꾼)에게 편지하라고 하시는 주님은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분이라고 한다. 좌우의 날선 검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버가모는 로마의 강력한 정치적 세력을 등에 업은, 행정적으로 유력한 도시로서, 황제 숭배의 본거지이므로 ‘사탄의 권좌가 있는 데’(사탄이 사는 곳)라고 표현된다.
정치, 종교, 경제 어느 분야이든지 사탄이 주인 노릇하는 곳이면 사탄이 사는 곳이다.
이곳에서 안디바가 순교를 당했다. 안디바는 계시록에만 기록된 순교자이다.
주님은 안디바를 ‘충성된 증인’(신실한 증인, 진실한 증인)이라 부르신다.
버가모교회는 안디바의 순교에도 불구하고 주의 이름을 굳게 잡고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이들은 극한의 고난 중에도 배도하지 않은 믿음으로 인해 그리스도에게 칭찬받는다.
14~15절 : 그러나 모두가 그런 것이 아니다.
버가모 교회의 신실하지 못한 자들에게 책망이 주어진다. 이들 중에는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당의 교훈을 따르는 이들이 있다. 즉 교인 중 얼마는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고 음행하게 한 발람의 교훈을 따르고 있다.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당의 교훈은 실제적인 음행과 영적인 음행을 다 가리킨다.
세상과 타협하게 하는 발람의 교훈은 니골라당의 교훈과 상관이 있다. 에베소 교회가 거부했던 니골라당의 교훈은 영적 자유를 왜곡시켜, 우상숭배와 부도덕한 삶을 허용하는 교훈이다.
16~17절 : 그러므로 회개하라고 한다.
버가모 교회에 말씀하시는 그리스도는 좌우의 날 선 검을 가지셨다.
이 싸움은 두 가지로 나타난다.
하나는 자기 백성을 끝까지 지키시기 위하여 음행하는 대상을 자기 신부에게서 끊어내시는 싸움이다. 세상의 현실에 순응하며 우상을 숭배하는 신자에게 심판의 말씀은, 좌우의 날 선 검이 되어 마음과 생각을 드러내어 심판한다. 이는 주님의 백성들에게는 환란으로 여겨진다.
또 하나는 음행하게 한 발람이나 니골라와 같은 자를 심판하시는 것이다.
이기는 자에게 두 가지 보상이 주어진다.
‘감추어진 만나’와 ‘새 이름을 기록한 흰 돌’이다.
드러난 만나는 광야의 만나로서, 먹어도 죽는 양식이다. 그러나 감추어진 만나는 생명을 살리는 양식으로서 예수님의 살과 피를 가리킨다.
흰 돌 역시 예수님을 가리킨다.
새 이름은 새로운 본질이 수여됨을 뜻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신 후 ‘새 이름’으로 ‘주’라 일컬음을 받으셨다. (빌2:9~11)
또한 이기는 자는 하나님에 의해 ‘새 이름’으로 불리며 그 이름은 생명책에 기록된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궁극적인 선물은 ‘예수님’이다.
(나의 묵상)
버가모 지역만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모든 영역에 사탄의 권좌가 있다.
정치, 경제, 사회....나의 삶 가운데에서도..... 어느 분야이든지 사탄이 주인 노릇하는 곳이면 사탄이 사는 곳이다.
이곳에 발람의 교훈이 있고, 니골라당의 교훈이 있다.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당의 교훈을 단순히 ‘육체적 음행’이라고 말한다면, ‘나는 그렇지 않아’ 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하지만 예수님은 마음의 음욕도 간음이라고 하셨다.)
영적 음행은 무엇일까?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영적 음행이다.
사탄은 어찌하든지 성도의 마음을 하나님에게서 떠나 다른 어떤 것에 달라붙도록 만들려고 한다.
그런데 그 다른 어떤 것 중에 우리들로 하여금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들이 있다.
‘하나님을 믿어도 먹고는 살아야지’ 하며 돈을 집착하는 자신을 합리화 시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애국심을 싫어할 리가 있나?’ 하며 나라 사랑을 마땅한 것으로 말한다.
‘하나님께서 자식을 사랑하는 것을 막을 리가 있나?’ 하며 가족 사랑을 우선으로 내건다.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마10:35~38)
사탄은 자기 중심적 사고에서 시작하는 집착을 ‘사람으로서는 당연한 일’ 이라 여기도록 유혹하여, 하나님 앞에 당당하고도 뻔뻔한 이상한 믿음을 가진 자가 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바로 영적 음행인 것을 모르도록 교회 안에서도 이러한 사고가 넘치도록 만든다. 심지어는 이러한 것들을 더 달라고 열심히 기도하게까지 하니, 영적 음행을 더 잘 하게 해 달라고 비는 꼴이다.
현대판 발람의 교훈이요, 니골라당의 교훈이 교회에 넘쳐나도 모른다.
복음의 알기 전, 사탄의 권좌가 있는 곳은 어디 다른 장소가 어디가 아니라, 바로 내 마음 중심이었던 것같다.
교회도 다니고, 입으로 주님도 부르고, 그 누구 못지 않게 사역과 봉사에 열심을 내었지만, 그 마음의 원함은 오직 자아확장이었으니, 바로 사탄의 통치를 받는 자가 아닌가?
그렇게 사탄이 50여 년을 내 마음에 똬리를 틀고 있었어도 나는 누구에게 통치를 받고 있는지도 몰랐던 것이다.
복음을 알고 난 이후 매일 말씀으로 살게 되니, 좌우에 날선 검으로 오신 주님이 나를 주관하신다.
나는 발람의 교훈과는 거리가 먼 거룩한 자인 줄 알았는데 내가 바로 주인공이었던 것과 나는 니골라당을 미워하는 자인 줄 알았는데, 내가 니골라당의 주동이었다는 것을 말씀의 빛으로 보게 하신다.
그리고 이것을 너무도 애통히 여기지만 내 힘으로는 절대 희게 할 수 없는 반점의 표범이요, 어찌할 수 없는 피부색을 가진 구스인인 것을 알게 되니 주님의 십자가 보혈만을 의지하게 된다.
현대판 발람(니골라당)의 교훈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마땅하고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이나, 주님께서 보내신 성령이 임한 자는 이것이 사탄의 계략임을 구분할 수 있다.
매일을 말씀으로 살지 않으면, 사탄의 계략을 구분하지 못한다.
인간은 항상 죄악된 자기 본성을 따라 사는 자이기 때문이다.
날마다 죄우에 날 선 검으로 다가오시는 주님과 교제할 때, 나의 부실함과 어리석음 때문에 때로는 너무 아프지만, 그 아픔 뒤에 보혈로 덮어주시는 그 은혜 때문에 항상 기쁨의 춤을 출 수 있다.
그것은 이미 ‘감추인 만나’와 ‘흰 돌에 새겨진 내 이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말씀을 통해 날마다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자가 되었으니, 나는 이미 최고의 상급인 예수님을 상급으로 받고 사는 자가 되었다.
돈을 사랑함만이 저급한 것이 아니라, 나라를 사랑함과 가족을 사랑함도 마찬가지이다. 이 모든 것이 결국 이기적인 나의 만족을 위한 것임을 알게 되니 이 마음을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 나는 사탄의 통치를 거부하는 자가 된다.
사탄의 머리를 힘 있게 밟으신 주님께 찬양과 감사를 드린다.
(묵상 기도)
주님,
수십 년을 사탄의 통치를 받고 살았어도 아무 감각이 없었던 자를 흔들어 깨워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제 말씀의 빛 안에서 말씀이신 주님의 통치를 받는 자로 살아갑니다.
감추인 만나로 배부르게 먹여주시고
흰 돌에 새겨진 새 이름으로 불러주시니 감사합니다.
이 생명의 삶이 이 땅에서부터 누리게 하신 영생입니다.
이것을 누리며 전하게 하옵소서.
성령님, 언제나 의지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