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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농촌지역복지사무소 - 민들레 원문보기 글쓴이: 참숲
이대로 10∼20년쯤 흐르면 지금의 농촌 마을 중 상당수가 사라져버릴 것이라는 이야기를 종종 듣곤 한다. 농촌 마을 주민 대다수가 노인이고, 새로 태어나는 아이라곤 없으니 이처럼 비관적인 전망이 나올 법도 하다.
국어사전에서 ‘마을’이란 단어를 찾아보면 “시골에서 여러 집이 모여 사는 곳”이라 풀이되어 있다. 도시에도 사람들이 모여 사는데, 특별히 '시골'을 강조한 건 왜일까? 아마 마을에는 집들이 단순히 물리적으로 모여 있다는 것 이상의 무언가가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농촌 마을에는 공동체 운영에 도움을 주는 자생적인 활동들이 대대로 이어져왔다. 이를 미풍양속이라 일컫기도 하고, 때로는 전통이라 부르기도 한다. 좀 학술적으로 말하면 주민들 간 상호부조를 통해 공동체 지속을 돕는 자율적인 활동들을 지칭한다. 바로 그런 것들이 농촌 마을을 특징지었다.
구한말 조선 땅에 들어와 선교활동을 했던 미국인 무스 목사는 조선에서 사회조직의 기본 단위가 바로 마을이라고 기록한 바 있다. 또 조선의 마을에는 비밀이 없으며, 때로는 사람들이 자기 일보다 남의 일을 훨씬 잘 안다는 생각이 들 정도라는 지적도 했다. 비밀이 없는 것이 꼭 좋은 것은 아니겠으나, 그만큼 개인의 삶과 마을 공동체 단위의 일이 불가분의 관계였음을 의미한다. 이런 전통이 있었던 덕에 농촌에서는 대대로 영농활동과 공동체 행사뿐 아니라 관혼상제를 비롯한 개개인의 대소사까지 마을 단위로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런데 요즘 농촌에서 마을 공동체 활동은 점차 옛일이 되어가고 있다. 인구 자체가 줄었고, 남은 사람도 노인이 태반이니 예전과 같은 공동체 기능을 기대하기는 힘든 것이다. 윗세대가 해왔던 마을 공동체 일들을 지금도 꾸준히 이어오는 마을이 전국에 얼마나 될지는 실태 조사를 해봐야 알겠지만, 말 그대로 '모여 사는' 것 말고는 별다른 기능을 수행하지 않는 마을이 상당수가 아닐까 한다.
장래에 적지 않은 농촌 마을이 사라지리라는 일부의 우려를 앞에서 전한 바 있지만, 마을의 소멸이 농촌 과소화 문제의 본질은 아님을 지적하고 싶다. 과거 주민 공동체를 지탱해왔던 기능들이 사라지거나 약화되어버린 마을들이 전국 농촌에 광범위하게 '남아 있는' 것이 오히려 더 근본적인 문제라 하겠다. 이런 의미에서라면 농촌의 과소화 문제는 지금부터 10∼20년이 지난 장래에 닥칠 일이 아니다. 우리 농촌은 이미 문제의 한복판에 들어서 있는 셈이다.
물론 그 동안 이러한 과소화 문제에 대응하려는 정책적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에서는 귀농·귀촌을 희망하는 도시 가구를 농촌에 유치하려는 지원책을 펼쳐왔다. 주민의 참여와 마을 공동체 활동에 강조점을 둔 정책사업들도 꾸준히 시행되었다. 농촌 마을 구석구석까지도 기초적인 서비스가 고루 제공되도록 나름의 정책적인 목표를 설정하여 그것을 달성토록 해야 한다는 제안도 있다. 예를 들어 산골의 외딴 마을에도 응급차가 몇 분 이내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한다든지 한 시간 간격으로 버스가 다니는 마을의 비율을 지금의 두 배 수준으로 끌어올린다든지 하는 식의 목표가 그것이다.
이 같은 시도들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을 뿐 아니라 일부 지역에서는 해법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전반적인 상황 자체를 뒤바꿀 수는 없다. 무엇보다 귀농자 유치 성과는 몇몇 마을에서만 나타날 수밖에 없다. 제2의 새마을운동이라도 대대적으로 벌여 농촌의 공동체 복원을 도모할 법도 하지만, 이미 모듬살이의 기반 자체가 약화된 마을이 태반이니 이것도 여의치 않다. 또한 ‘찾아가는 서비스’에 충실하는 것은 정부가 게을리 할 수 없는 책무이니 지속적인 지원이 필요하겠지만, 그런다고 해서 주택들이 몇 채씩 띄엄띄엄 자리잡은 과소화 마을의 주민들이 느끼는 불편함이 근원적으로 해소될 리는 없다.
이제는 농촌 마을 과소화 문제에 대해 좀 더 근본적인 대안을 찾아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농촌 마을은 계획에 기반하지 않고 자연적으로 형성되어 지금까지 내려왔다. 그러나 상당수 마을들이 공동체 기능을 잃고 스스로 지탱하기 힘든 상황에 접어든 지금, 어느 정도 ‘계획적’으로 농촌 마을을 재편하는 방안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계획적'이라는 말은 농촌에 인위적으로 신규 택지개발 하나 지금 마을에 살고 있는 노인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할 곳을 조성하라는 뜻이 아니다. 여러 사람이 모이는 중심지 역할을 할 곳, 농촌 주민들이 '모여 사는' 터전으로 계속 남아 있을 곳, 몇 채의 주택들이 물리적으로만 집합을 이룰 곳 등을 가려내고, 각 유형에 맞도록 차별적인 정책 지원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의미이다.
마침 정책 환경 변화로 시·군 기초생활권 차원의 종합적 발전계획 수립이 강조되고 있다. 누구보다 지방자치단체의 일선 행정가들이 먼저 이러한 농촌 마을의 중장기 발전 방향에 대해 고민해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첫댓글 글쓴이는 지역민의 입장이라기보다 몇몇 마을을 살펴보고 문제를 파악한 '듯한' 행정가 중심의 사고에 머물러 있는 듯 하군요. 농촌을 보는 관점도 농촌에서 기존에 있던 살릴만한 마을의 가치, 조금만 보태도 되살아날 수 있는 것들을 보기보다 수직하향적인 정책 중심으로 재편해야 한다고 보고 있군요... 이 때까지 얼마나 많은 소위, 농촌 전문가들의 농촌 살리기, 농촌 진흥정책이 그들 시각에서 짜여지는 바람에 농촌의 삶터, 일터를 망가뜨렸는지 모르는 것 같아 씁쓸합니다.
여러 사람이 모이는 중심지 역할을 할 곳, 농촌 주민들이 '모여 사는' 터전으로 계속 남아 있을 곳, 몇 채의 주택들이 물리적으로만 집합을 이룰 곳 등을 가려내고, 각 유형에 맞도록 차별적인 정책 지원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의미이다. / 중심지 역할을 할 곳은 누가 어떻게 정하고, 계속 남아 있을 곳, 물리적으로 집합을 이룰 곳을 대체 어떻게 가려낸다는 것일까요. 비록 지금 삶이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더라도 자기 삶터에 대한 정주성 자체가 삶의 애정이요, 바탕인 농촌 어르신들을 행정가가 판단해서 지원하고 재편한다라...
누구보다 지방자치단체의 일선 행정가들이 먼저 이러한 농촌 마을의 중장기 발전 방향에 대해 고민해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 결국 마지막까지 일선 행정가들의 몫인양 이야기하는 글쓴이. 변화의 대상과 주체는 결국 농촌의 주민인데 그들은 빠져있고 행정가들이 궁리하고 애써서 발전계획을 수립해야 한다는 결론. 여전히 관이 민을 주종적 관계로 인식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됩니다.
여전히 관이 민을 주종적 관계로 인식하고 있는 것/ 이것은 옛날부터 내려오는 관습이 아닐런지요. 이런 부분에서 우리들의 할일이 있는 거겠지요.